일본 의사파업때 환자 수천명이 사망했다는 말은 사실일까?
일본의 의사 파업에 대해서 상당히 잘못된 정보가 돌아다니고 있다. 일본의 의사 파업은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기본 기제부터가 달랐다. 항간에 돌아다니는 환자 수천 명 사망, 후생성 장관의 도게자, 모든 의료인력의 진료 거부 등은 모두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거짓 정보이다. 심지어 일본의 의사 파업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정부와의 일치된 소통 창구도 존재했던, 50년 전 파업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상당히 ‘선진적인’ 파업이었다.
실제로 일본 의사 파업은 1961년 1차 파업과 1971년 2차 파업으로 나뉘는데, 1961년 1차 파업은 당시 자민당 정권에서 국민건강보험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하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57년 일본 의협 회장으로 취임한 타케미 타로 회장은 61년 국민건강보험 도입에 대응하기 위해 진료보수(우리나라의 의료수가) 30% 인상을 포함한 4개 요구안을 정부에 발송했는데, 이를 자민당 정권이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실제로 61년 1차 파업 당시 일본 의사들의 휴진율은 파업 시작일인 2월 19일 약 40% 수준으로써 지난 2000년 우리나라의 의약분업 사태 당시의 의협 추산 휴진율과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일본은 당시 의사와 치과의사가 연대하여 정부와 맞섰다는 점인데, 특히 61년 3월 1일 총파업을 앞두고 약제사협회 회장이 의협을 찾아 의사-치과의사-약사를 모두 포괄하는 공동 투쟁 전선을 형성한 것이 중요했다.
결국 자민당 정권은 삼사회(三師會, 의사/치과의사/약사의 공동 협의체)를 대상으로 진료보수 협의에 나섰고 결국 61년 3월 24일 협의에 성공했다. 다만 후생성 장관이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다든지 의사들의 요구를 백지에 적었다는 것은 모두 거짓 정보이며, 진료보수 인상률 15% 를 골자로 협의한 것이 전부이다. 다만 이후 7월 새로 취임한 후루이 요시미 후생성 장관이 합의안을 파기하자, 삼사회는 재차 파업을 예고했고 이에 자민당은 후생성 장관을 경질하고 8월 나다오 히로키치 신임 후생성 장관을 파견하여 재합의에 이른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한편 2차 파업은 71년 5월에 있었는데, 이 당시의 쟁점은 진료보수의 물가연동제였다. 이 때는 소위 ‘보험의사’ 들의 사퇴서가 주요 투쟁 수단이었는데,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운영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당연지정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민개보험의 지정을 받은 보험의사들이 일제히 사퇴원을 제출했다. (전체 보험의의 83.9%) 그러나 당시 보험의 사퇴원은 제출 후 1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효력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정부와의 협상 기한을 정한 투쟁이었다.
실제로, 타케미 타로 일본 의협 회장은 막무가내 투쟁파가 아닌, 협상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실제로 1차 파업 때는 진료보수 30% 인상, 2차 파업 때에는 32.3% 인상을 요구했지만 실제 합의안에는 61년 15%, 71년 13.7%의 수가 인상이 합의되었으며 실제로 물가연동제는 합의안에 언급되지 않아 이것이 과연 성공한 파업인지는 의문이다. 타케미 회장의 업적은 단지 투쟁을 이끈 것뿐만이 아니라 투쟁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시스템을 장기적 안목으로 구축한 것이다.
실제로 타케미 회장은 의협 이외에도 치과의사, 약사까지 모두 연대하여 공동 투쟁 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정부 측에 부담을 주는 데 성공했으며, 이를 위해 의약분업(일본의 의약분업은 우리나라보다 무려 49년이 앞선 1951년이다) 이후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던 약사 사회까지 포섭했다.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의사-치과의사-약사가 연대한 삼사회를 중심으로 의료비 지불측/의료계측/정부측이 모두 포함된 중의협(중앙사회의료보험협의회) 체계를 개선하는 것에 이르렀다.
실제로 자민당 정권은 자신들의 입김 하에 둘 수 있는 중의협 공익대표들을 활용하여 의사들의 요구를 무시하기 일쑤였으나, 그 때마다 일본 의료계는 일치단결하는 것에 성공했고, 실제로 정부의 약속 위반 및 합의 파기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원하는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의협 회장에 무려 25년 간 재임한 것이 후생상의 도게자로 따낸 것이라든지 무턱대고 장기 파업에 돌입하여 사람 목숨을 바쳐가며 이룬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요약하자면, 타케미 회장의 업적은 아래와 같다.
(2) 중앙사회의료보험협의회에서의 의사-정부간 세력균형 확보
(3) 장기적 안목을 통한 시스템 구축과 막무가내식 투쟁 자제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는 어떠했는가? 개원의 중심의 의협, 전공의 중심의 대전협, 의대생 각기 이해관계가 모두 달랐으며, 뒤늦게 범투위가 구성됐지만 실제로 범투위 내부에서도 협상 방식 및 대표자의 지정 등에 대해 난맥만이 이어졌다.
또한 최대집 회장의 경우 과거 박근혜 대통령 복위 투쟁 등 정치적 이슈에 앞장서다 보니 자신의 이미지가 상당히 훼손된 상황에서 협상에 임해야 했으며 이는 결국 기본적인 여론의 손상을 끌어안고 정부를 상대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대전협의 미숙한 투쟁은 결국 의대생의 국시 거부라는 어정쩡한 형태의 결과물만을 낳게 된 것이 아닐까.
아, 나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하실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의사 파업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조사한 자료가 멀쩡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참고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자료는 한국의학논문데이터베이스에도 엄연히 등재돼 있는 공신력 있는 자료이다. 파업을 하겠다는 의사들이 이런 자료들을 맨 먼저 찾아 봤어도 모자랄 판에, 극단적인 내용의 유튜브나 거짓 정보에만 천착을 해서야 무엇이 되겠는가 싶다.
by 힝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