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사랑한 그녀, 소꿉친구로 만나 한평생을 혁명가의 아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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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광의 독일 작가 사랑이야기]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19세기는 물론 20세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세계 정치 철학과 경제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정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삶은 정치적 박해와 망명의 연속이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트리어에서 태어나 파리, 브뤼셀을 거쳐 결국 영국 런던에서 삶을 마감했다. 저널리즘과 정치 활동에 힘쓰는 동시에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와 함께 역사적 유물론을 발전시키며 공산주의 이론의 기초를 세웠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은 근대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 중 하나로 평가된다. 또 그의 대표작 『자본론』은 자본주의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저서로 유명하다. 그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 등 곳곳에 영향을 미치며, 다양한 정치적 운동과 이론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인간의 의식이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이었다.

왼쪽 뒤부터 시계방향으로 엥겔스,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자녀인 예니 라우라, 예니 일리노어, 예니 카롤리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삶, 특히 아내 예니 폰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phalen, 1814~1881)과의 사랑 이야기도 매우 감동적이다. 둘의 관계는 단순한 연애를 넘어 지적·정치적 동반자로서의 깊은 유대감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의 사랑 이야기는 그의 철학적·정치적 업적만큼이나 감동적이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예니는 망명 생활을 할 때 모든 불행과 고난을 남편과 함께 나누었고, 읽기 힘든 남편의 악필 원고를 다시 옮겨 적었으며, 빚쟁이들과 싸우며 전당포를 들락거렸다. 그게 마르크스의 개인 생활을 평가하는데 오해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가장으로서 무능력했다는 비방 말이다.

독일 트리에 시(市)에 있는 마르크스의 생가

무도회의 여왕 예니

마르크스와 예니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소년 마르크스는 비상하게 단호한 인간, 누구의 방해도 허용하지 않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었다. 당시 예니는 열두 살이었고, 마르크스는 겨우 여덟 살이었지만 예니는 카를의 강력한 의지에 복종했다. 예니는 마르크스의 소꿉친구였고, 소년 시절 마르크스가 비밀을 털어놓을 만큼 절친한 친구 관계였다.

예니는 ‘트리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이자 ‘무도회의 여왕’이었다. 변호사, 의사, 공무원, 군 장교들이 그녀의 매력과 활달한 성격에 빠져 사랑을 애타게 갈구했다. 1831년, 황홀했던 한여름의 파티 후에 그녀와 밤새 춤을 췄던 젊은 판네비츠 소위(Karl von Pannewitz, 1803∼1856)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청혼했다. 예니는 일단 대답을 하진 않았으나 잘생긴 장교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고, 결국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예니가 약혼자에게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게 하라!”라는 햄릿의 유명한 말을 어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시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군인은 상관의 명령이 ‘진실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대답했다. 또한 그녀는 1830년 7월 파리에서 일어난 일처럼 약혼자도 절망적인 상황을 호소하는 맨몸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총을 쐈을까를 알고 싶었다. 그는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은 명령’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대화 후에 예니의 감정은 바뀌었고, 그녀는 약혼한 지 불과 몇 달 후에 결코 그의 아내가 될 수 없다고 잘라말했다.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 폰 베스트팔렌.

소꼽친구에서 약혼자로

마르크스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본에 갔지만 법학은 거의 공부하지 않고 학우회에 가입해 술을 진탕 마시거나, 토론을 하고 결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예니에게도 가족들에게도 통 소식을 보내지 않았다. 이런 과외 활동을 하느라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썼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미납 청구서들을 보내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항상 돈이, 그것도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돈 버는 법은 배우지 않고 돈에 관한 글을 쓰는 데 평생을 바쳤다.

본에서 트리어로 돌아온 마르크스는 예니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드디어 사랑이 시작되었고, 그들은 서로 영원히 함께 할 것을 결심했다. 불타오르던 사랑은 마르크스가 트리어에서 헤겔의 강의를 들으러 베를린으로 갔을 때 시련을 겪었다. 예니는 쓸쓸하게 버려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르크스는 대학에서 두 학기를 마친 후, 1836년 여름 트리어에서 예니와 ‘비밀리에’ 약혼했다. 이후 예니는 7년 동안 마르크스의 약혼자로 지냈다. 마르크스는 1836년 12월 크리스마스 선물로 예니에게 ‘사랑의 책’과 ‘노래의 책’이라는 제목이 붙은 세 권의 시 모음집을 보냈는데, 예니는 기쁨과 슬픔의 눈물을 함께 흘렸다. 그녀는 이 시들에 감동했지만 동시에 열정적인 어린 연인을 지킬 수 없을까봐, 마르크스가 다른 모든 여자들의 마음을 황홀하게 할까봐, 그의 열렬한 사랑이 식어버릴까 봐 불안해했다.

예니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마르크스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두 사람은 변치 않는 깊은 사랑을 나누었다. 예니는 독일 프로이센 귀족 가문의 딸이었고, 마르크스는 유대계 변호사의 아들이었기에 둘의 결합은 가족의 반대에 부딪혔다.

하루는, 트리어의 상원의원인 예니의 이복오빠 페르디난트가 아름다운 여동생이 카를 마르크스와 약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베를린 경찰국에 미래의 매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보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깜짝 놀랐다. 마르크스는 법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역사와 철학 강의를 들었으며, 엄청난 양의 맥주와 와인을 마시거나 블랙 시가를 피우면서 젊고 급진적인 무신론자 동료들과 함께 신, 인간, 사회에 관해 논쟁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페르디난트는 아버지에게 마르크스가 베를린에서 보여준 일들을 알렸고, 여동생이이 유대인 말썽꾸러기와 한 약혼을 강제로라도 반드시 깨야한다고 고집부렸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예니가 경솔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딸의 인생에 어떤 명령을 내릴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당시 스물네 살이었던 예니는 의지가 확고한 여성이었다. 미래를 불안해하던 예니가 당시 마르크스와 주고받은 편지들의 일부는 지금도 남아있는데, 그 어조는 항시 같았다. “내 사랑, 나의 유일한 사랑, 꼭 좀 빨리 내게 편지를 주세요. 그리고 잘 지내고 있다고, 언제나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마르크스를 향한 한결같은 사랑

예니는 자신의 약혼자가 정치 영역에 뛰어들려고 할 때 불안했지만 그녀의 사랑은 불안을 뛰어넘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달리 바람둥이가 아니었지만 다른 여자들과 사랑 놀음을 할 기회가 있으면 그 기회를 잡았다. 반면, 마르크스에 대한 예니의 사랑은 한결같았다. “신의 사랑이 없으면 내 인생도 끝이 나요. 그리고 이러한 죽음 이후에는 어떠한 부활도 없어요.”

예니는 마르크스가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학계에 자리잡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제 거의 ‘남편’이나 다름없는 그가 자유주의적인 언론 <라인신문>에서 일한다고 하니 불안해졌다. 그녀는 편지를 썼다. “정치에 발을 담그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당신에겐 고향에서 희망과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연인, 당신의 운명에 모든 것이 달린 연인이 있다는 걸 늘 염두에 두세요.”

1942년 5월 5일에 실린 첫 정치 기사에서 마르크스는 ‘언론의 자유는 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며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인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이 첫 기사에 깊은 인상을 받은 예니는 평생 인내와 사랑으로 마르크스의 악필 원고를 정서하는 일을 했다.

책벌레 남편과의 결혼 생활

마르크스와 예니는 1842년 말, 이듬해 6월에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그대로 실천했다. 두 사람은 결혼 사실을 신문에 공고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부부 재산 공유를 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결혼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거기에다가 채무는 공유 재산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별칙을 첨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니가 남편과 가족이 진 빚과 평생 씨름해야 했기 때문에 그 조항은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신혼 침실은 점점 남편의 연구실로 바뀌어갔다. 예니는 종종 자신이 인간과 결혼했는지, 책벌레와 결혼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남편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독서를 도왔다. 결혼 후, 그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박해를 겪으면서 파리, 브뤼셀, 런던과 같은 여러 나라의 도시를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들이 런던으로 간 것은 영국이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망명을 허용한 유일한 국가였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지독한 에고이스트였지만 매우 재미있는 남자이기도 했다. 마르크스의 유머는 때때로 통렬하고 신랄했다. 그의 뛰어난 조크에는 누구나 웃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그에게 유머 감각이 없었다면 짓궂은 성격 때문에 그를 지지하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주위 여성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혁명 운동과 저술 활동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예니는 마르크스를 끝까지 지지하며 헌신적으로 내조했고, 마르크스는 그런 그녀에게 깊은 애정과 고마움을 느꼈다. 1836년, 마르크스는 예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 나의 사랑하는 예니, 당신은 나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나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라고 고백했다.

지독한 가난과 싸우며

다음해 6월 19일, 마르크스와 예니는 마침내 결혼했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예니는 잦은 이사와 가난 속에서 자녀들을 키워야 했다. 예니의 어머니는 사위가 혁명 활동을 포기하고 전도유망한 저널리스트의 경력을 쌓아가길 바랐다. 또한 마르크스는 치질, 눈병, 종기 등 건강이 좋지 않아 예니는 그의 간병에도 많은 힘을 쏟아야 했다.

예니 역시 열악하고 불결한 환경에서 잦은 병치레를 해야 했고, 아이를 잃고 상심이 깊어져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다. 1860년에는 천연두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 질병은 끊임없이 가족을 방문하는 손님과 같았다. 마르크스는 결국 생활고를 이기기 위해 철도국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심한 악필 때문에 이마저 좌절되고 말았다.

마르크스와 예니는 일곱 자녀를 두었지만, 그중 네 명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이러한 가족의 비극과 경제적 고통 속에서도, 그들의 관계는 끝까지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마르크스는 예니의 지성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그녀는 마르크스의 사상적 동반자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카를 마르크스.

혁명적 이상을 함께 한 아내

흔히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가정을 건사하지 못하고, 술과 도박으로 전전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그의 삶은 혁명가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를 위해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헌신한 아내가 있었다.

근 40년간 어려운 결혼생활 끝에 1881년 12월, 예니가 지상에서의 고단한 삶을 마치고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르크스는 큰 충격을 받고, 그녀를 잃은 슬픔에서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 아내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은 죽음이 오는 것을 느끼고 “카를, 기운이 없어요”라는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예니의 장례식에 마르크스는 참석하지 못했다. 건강이 나빠 의사의 지시에 따라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애도사는 엥겔스가 읽어내려갔다. 마르크스는 딸 예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내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녀는 무엇이든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고 진실된 사람이었기에, 그녀가 남긴 인상은 누구에게나 깊고 밝은 영향을 미쳤단다.”

마르크스는 건강이 급속히 악화해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채 알제리, 몬테카를로, 스위스 등 태양과 깨끗한 공기를 찾아 여행했다. 1882년 12월에는 러시아에 자신의 영향이 점차 강하게 침투되고 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러시아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 그리고 3개월 후인 1883년 실내복을 입고 난롯가에 앉은 채 세상을 떠나, 사랑하는 아내 곁에 안장되었다.

마르크스의 사랑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혁명적 이상과 함께 한 동반자로서의 사랑이었다. 예니는 그에게 있어 단순한 아내가 아니라 사상의 동지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마르크스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위대한 사상가로 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미래의 사위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혁명적 투쟁에 나의 온 힘을 바쳤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네. 다시 산다해도 똑같이 살 거야. 그렇지만 결혼은 결코 하지 않을 걸세. 내게 힘이 있는 한 아내의 삶을 망가뜨린 불행으로부터 딸을 구해내고 싶네.”

마르크스는 짜르의 통치를 받는 러시아 농민들에게서 유럽 노동자들이 고대했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달성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필자 생각에는 사회주의 이념이 인간은 유물론적 결정론의 역사적 과정에 묶인 존재이며, 개인의 모든 영감, 희망, 꿈들은 집단 의지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비인간적 관념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나키스트인 바쿠닌도,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가 자유에 기초한 인간의 권리를 침해할 것이기 때문에 위험할 것으로 보았다. 자유 없는 평등은 국가의 압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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