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자동차가 유럽에서 선보인 신형 SUV '그랜디스'를 두고 자동차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겉보기엔 미쓰비시 고유의 '다이내믹 실드' 디자인을 입힌 새 모델이지만, 실상은 르노 심비오즈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배지 엔지니어링'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그랜디스는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 체제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르노의 CMF-B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고, 스페인 발라돌리드의 르노 공장에서 심비오즈와 나란히 생산된다. 실내 역시 스티어링 휠의 로고를 제외하면 르노 차와 구분이 어려울 정도다.

이런 현실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외관 디자인이다. 전면부는 기존 ASX와 거의 동일한 미쓰비시 패밀리 룩을 유지했지만, 헤드라이트와 측면 프로필은 심비오즈 그대로다. 후면부만이 그나마 미쓰비시만의 개성을 드러낸다. 새로운 테일라이트 디자인은 과거 에볼루션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스포티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짝퉁'으로 치부하기엔 미쓰비시가 처한 현실이 만만치 않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중간 규모 제조사들이 독자 개발로 경쟁력을 유지하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전동화 전환기에는 플랫폼과 파워트레인 공유를 통한 효율성 확보가 생존의 열쇠가 됐다.

그랜디스의 파워트레인 구성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1.3리터 터보 마일드 하이브리드(138마력)와 1.8리터 풀 하이브리드(154마력) 두 옵션 모두 르노 기술이다. 미쓰비시가 자랑하던 4WD 시스템이나 독자적인 하이브리드 기술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그랜디스가 의미 있는 건 미쓰비시의 유럽 시장 재진입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판매됐던 3열 MPV 그랜디스의 이름을 되살린 것도 유럽 고객들에게 익숙한 브랜드 기억을 활용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실용성 측면에서 그랜디스는 나쁘지 않은 선택지다. 5인승 구조에 슬라이딩 리어시트로 434~566리터의 가변 트렁크 공간을 확보했고, 파노라마 선루프와 10.4인치 터치스크린 등 편의사양도 충실하다. 가격 경쟁력까지 갖춘다면 실용적인 패밀리카를 원하는 유럽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랜디스는 현시대 자동차 산업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브랜드 고유성과 경제성 사이에서 후자를 택한 미쓰비시의 선택이 과연 옳은지는 시장이 증명해 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건 전동화 시대에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남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Copyright © 구름을달리다.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 학습 이용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