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5살만 받아요, 직장인 사이에서 핫한 '30만원 대학'

낯선이와 만나는 ‘판 깔기’의 귀재 백영선씨
낯선대학, 리뷰빙자리뷰, 100일 프로젝트 등
특히 3040 직장인이 느끼는 심리적 위기 극복에 도움되고파

‘판 깔기’로 설명되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판’은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활동의 장에 가깝다. 백영선(43)씨는 직장인을 위한 대학인 낯선대학,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는 리뷰빙자리뷰, 매일 특정 할 일을 수행하는 30·100일 프로젝트 등 다양한 판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백씨는 이 모든 판 깔기를 직장생활과 동시에 병행했다. 2015년, 직장생활 14년차에 접어들면서 번아웃(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신체적 ·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 찾아왔다.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하던 중 전에 읽었던 ‘낯선 사람 효과’(리저드 코치, 그렉 록우드)라는 책이 떠올랐다. 낯선 사람 효과란 성공과 행복에는 지연, 학연 등 강력한 연결이 아닌 그냥 알고만 지내는 정도의 ‘약한 연결’이 큰 영향을 미침을 일컫는다. 인생의 변화는 가까운 사람이 아닌 건너 건너 알던 사람으로부터 받는 자극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백씨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30~40대 직장인과 느슨한 연결망을 형성해 고민과 경험을 공유하는 장을 만들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2016년 3월 낯선대학 1기를 시작으로 다양한 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출처: 백영선씨 제공
백영선씨.

◇ 낯선대학·리뷰빙자리뷰·100일 프로젝트…판을 까는 남자


“2016년 연초에 10년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 제주도로 워크샵을 갔습니다. 마흔을 넘거나 눈 앞에 둔 사람이 겪는 고민은 비슷하더군요. 사회생활을 어느정도 한 뒤 찾아오는 심리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답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각자의 지인을 모은 뒤 서로 선생과 학생이 되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보는 게 어떨지 제안했죠. 반응이 좋아 프로그램 운영 방식, 장소 섭외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해 그해 3월 ‘낯선대학’ 1기 입학식을 열었습니다.”


낯선대학은 대학원 형식을 본 떠 1년과정으로 매주 같은 요일, 퇴근 후 2시간 정도 진행됐다. 백씨를 포함한 초기 멤버 7명이 각자 지인 7명정도 데려와 총 50여명의 낯선 사람들이 모였다. 자신만의 콘텐츠가 있으려면 어느 정도 경험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해 33~45살로 나이를 제한했다. 입학식 날 추첨을 통해 발표 순서를 정하고 매주 다른 강연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놨다. 직장생활로 쌓인 노하우, 재밌던 경험, 자신의 취향 등 강연 주제는 다양했다. “흥미로웠던 점은 각자 지인을 데려오니 시인, 아나운서, 기자, 스타트업 대표, 마케터,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모였다는 거예요. 친한 사람끼리 낯선대학을 진행했다면 결코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이었죠. 다양한 직업군이 모인 덕분에 경험해보지 못한 분야를 접해 볼 수 있었습니다. 또 3040 직장인으로서 느끼는 고민이 나 혼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위로와 깨달음도 얻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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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대학은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연사가 돼 다양한 주제로 강연한다. (아래) 낯선대학 체육대회 모습.

1기 활동이 끝날 때쯤 ‘다른 지인에게도 낯선대학을 추천하고 싶다’는 의견이 많았다. 성원에 힘입어 낯선대학은 2019년까지 4기째 활동 중이다. 현재까지 200여명의 사람들이 낯선 대학을 거쳐갔다. 전 기수가 졸업하면서 다음 기수 멤버를 추천하기 때문에 각 기수끼리도 느슨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직장인이 되면 다른 분야의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단순히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것을 떠나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죠. 낯선 대학은 지인의 지인들이 모여 매주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공유합니다. 이런 점이 3040 직장인의 공감을 샀어요.”


낯선대학은 사회 초년생을 위한 ‘낯선대학 Y’, 낯선대학 1박 2일 버전인 ‘낯선 콘퍼런스’로 확대됐다. 보다 젊은 연령대를 위한 모임도 만들자는 의견의 많아 2017년 하반기 시험 운영을 거쳐 2018년 초 ‘낯선대학 Y’를 열었고, 25~33살 청년들이 모여 그 나이대에 가진 생각과 고민을 공유했다. 올해 2기가 운영되고 있다. 낯선 콘퍼런스는 낯선대학의 축소판이다. 기획자, 메이커 등 특정 컨셉을 정하고 그 분야에서 활약하는 지인들을 초대해 제주도에서 2박 3일동안 언컨퍼런스 형식(현장에서 직접 주제를 정해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올해 11월 초까지 총 4회 진행, 150명 이상이 참여했다.

출처: 백영선씨 제공
낯선 콘퍼런스는 올해 11월 초까지 총 4회 진행됐고, 그동안 150명 이상이 참여했다.

백씨가 기획한 또다른 판인 ‘리뷰빙자리뷰’는 베스트셀러 ‘퇴사준비생의 도쿄’에서 소개한 가게를 투어하는 여행 패키지를 다녀온 뒤 SNS에 자랑하는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온통 ‘부럽다’는 댓글을 읽고 장난처럼 ‘여행리뷰하면 들으러 오라’는 글을 썼는데 실제 수요가 많아 참여자를 모집하고 장소를 섭외해 도쿄 여행 경험을 리뷰했다. 반응이 좋아 리뷰는 8번이나 진행됐다. 문득 ‘여행뿐 아니라 다른 경험도 공유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경험 공유 살롱’이라는 컨셉을 잡고 리뷰빙자리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SNS를 통해 연사를 섭외하고, 20명 이내로 참여자 신청을 받았다. 연사의 일방적인 강연이 아닌 연사와 참여자가 대화하는 듯한 살롱 형식으로 진행하기 위해 참여자를 제한했다. 호텔 레스토랑 셰프, 학자, 직장인 등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호텔 고객서비스 리뷰, 연구 결과, PT 발표 잘하는 법과 같은 주제로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다. 사람들은 의외로 정제된 글로 쓴 리뷰보다 말로 풀어내는 경험담을 더 반겼다. 2017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49번의 리뷰빙자리뷰가 진행됐다.


리뷰빙자리뷰로 경험 공유를 하다보니 아예 ‘같이 경험해보는 판’을 깔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는 30·100일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30·100일 프로젝트는 참여자들과 함께 30일 혹은 100일동안 약속한 할일을 꾸준히 해내는 걸 목표로 한다. 예를 들어 ‘100일 동안 짧은 글 쓰기’, ‘30일 동안 매일 물 마시기’ 등의 할 일을 설정하고, 매니저는 참여자가 할 일을 완료했는지 확인하거나 참여를 독려한다. 사기를 높이기 위해 참여자들은 프로젝트 시작 전 10만원을 내고, 결석하면 1회 당 벌금 1000원이 차감된다. 성공시 전액 돌려받지만 실패해도 10만원 중 벌금은 사회단체에 기부돼 나름의 보람이 있다. 30·100일 프로젝트에는 낯선대학에서 만난 멤버들이 도움을 주기도 했다. 시인과 함께 ‘시인에게 30일동안 매주 글 보내고 피드백 받기’ 혹은 성우와 함께 ‘성우에게 매주 목소리 코칭받기’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출처: 백영선씨 제공
3040 직장인뿐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리뷰빙자리뷰에 참여한다.

◇ 대학시절부터 행사 기획·진행에 빠져


백씨가 퇴근 후 판 깔기를 기획하고 병행할 수 있었던 건 본래 공연 및 행사 기획·진행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대학 오리엔테이션날 공연 동아리의 공연을 보고 혼을 뺐겼다. ‘꼭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덜컥 지원했지만 노래도 악기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사회자를 자처했다. 이후 백씨의 대학생활은 학업 대신 공연·행사 기획 및 진행으로 점철됐다. 학교 행사 사회를 도맡고, 학교 앞 주변 상인들과 제휴해 거리축제 등을 기획했다. 자신이 기획한 행사·공연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짜릿함은 엄청났다. 자연스레 졸업 후 축제사무국에 입사해 전주소리축제, 남양주 세계야외공연축제 등에 참여했다. 2010년 Daum의 문화 마케터로 이직했다. 영화제·뮤직 페스티벌·연극·뮤지컬 등 예술계와 협업해 다양한 브랜딩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Daum 재직 당시 2000명 직원 중 10명의 직원만 받을 수 있는 우수 사원상을 받을 만큼 정력적으로 일했다. 2014년 Daum이 카카오와 합병했고, 이후에도 송년회 등 내부 행사 사회를 맡아 ‘카카오 송해’로 불렸다. “퇴근 후에도 할 일이 많으면 피곤하지도 않느냐고 많이 물어봤죠. 그러나 낯선대학, 리뷰빙자리뷰, 30·100일프로젝트 등 모든 활동은 충전되는 경험이지 방전되는 경험이 아닙니다. 이 활동들의 특징은 참여자가 주도권을 쥔다는 겁니다. 큰 틀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건 제 몫이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참여자들과 함께 만들어가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주도하는 일을 할 때는 쉽게 방전되지 않아요. 설사 몸의 힘은 떨어져도 마음의 힘이 좋기 때문에 균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백씨는 자신이 깔아논 판에 참여해 삶이 긍정으로 변했다는 피드백을 받을 때 가장 뿌듯하다고 말한다. “‘30일 동안 매일 아이에게 애정표현하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조손 가정의 할아버지께서 손자녀와 더 가까워졌다며 정말 고맙다고 글을 남기신적 있습니다. 그때 참 짜릿했죠. 또 낯선대학 멤버 중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셰프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주위에서는 경력이 아깝다며 무모한 선택이라고 반대한다더군요. 그런데 낯선대학에서는 어떤 아이디어든 칭찬하고 응원해줘 자신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 멤버는 개인 가게를 냈고,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멤버들끼리 종종 찾아갑니다.”

출처: 백영선씨 제공
강연하고 있는 백영선씨.

용기를 얻은 건 참여자만이 아니다. 백씨도 올해 9월 17년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홀로서기에 나섰다. 먼저 100일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대리 사회'의 김민섭 작가와 함께 작가-독자의 만남을 편리하게 중계해주는 플랫폼인 ‘북 크루(Bookcrew)’를 만들었다. 작가 섭외, 작가 토크쇼 운영 등을 기획 및 진행할 계획이다. 개인 창업으로는 어른들의 성장을 돕기 위한 워크샵, 콘퍼런스, 교육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는 플라잉웨일(Flying whale)을 만들었다. 서울문화재단, 콘텐츠진흥원 등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또 맥주 만들기·등산 등 호스트가 활동을 기획하고 참여자는 소정의 비용을 내고 참가하는 아웃도어 소셜 서비스 업체 ‘프립(Frip)’의 임팩트디렉터와 한국예술종합대학교에서 예술경영 겸임교수 제안을 받고 근무 중이다. 그야말로 N잡러(여러 일을 하는 사람)의 삶을 살고 있다. “마흔이 넘어 창업에 도전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깔아논 판을 통해 변화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 역시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 있음을 깨달았어요. 그동안 진행했던 활동을 본 프립과 한예종에서 연락이 왔고, 지금이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죠.”


◇ 퇴근 후 판 깔기, 인생이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골목


백씨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돈도 안되는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하세요’다. 실제로 낯선대학, 리뷰빙자리뷰, 30·100일 프로젝트 등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동안 얻은 수익은 거의 없다. 낯선대학은 백씨를 포함한 모든 멤버가 1년간의 학비 30만~40만원을 내지만 대관료, 조교 운영비 등 전반적인 운영비로 쓰인다. 리뷰빙자리뷰는 대관료와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해 참가비를 받고 있으나 몇 만원에 불과하다. 수익성 있는 모델로 키워 보라는 의견도 많았지만 백씨는 최대한 많은 사람과 함께, 더 오래 즐기고 싶다고 한다.


판 깔기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길 바라는지 묻자 망설임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인생이란 길고 넓은 길을 걷다 마주친 작은 골목 같았으면 좋겠어요. 별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본업에서 지쳤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거죠. 지치지않고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때론 타인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것도 중요해요. 낯선대학, 리뷰빙자리뷰, 30·100일 프로젝트 등의 활동이 저를 포함한 누군가가 다음 발자국을 내딛거나 혹은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글 jobsN 박한솔 인턴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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