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자들의 우아한 취미생활, 그림으로 만나다
얼마 전에 출간된 김탁환 작가의 새 장편소설 [대소설의 시대]는 18세기 조선을 무대로 한 작품입니다. 여기서 대소설(大小說)이란 오늘날의 장편소설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여성들’이란 사실입니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18세기는 여성들이 소설 창작의 주체이자 독서의 주체로 맹활약한 시기였답니다.
김탁환의 소설에서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등장하는 임두라는 작가도 여성이고, 그 소설을 베껴 쓰는 이들도 여성이며, 다음 편이 나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가장 열성적인 독자들도 여성이죠.
(우) 윤덕희 <책 읽는 여인>, 비단에 담채, 20×14.3cm, 18세기, 서울대박물관 소장
그 시대 여성들이 그토록 이야기에 목말랐던 까닭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습니다. 위 그림은 ‘책을 읽는 행위’를 묘사한 옛 그림 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제아무리 풍속화가 만개한 18세기라 해도 당시에 이런 그림이 그려지고 전해졌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놀라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대소설의 시대]를 읽고 나니 이런 그림이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것이 아무 이상할 게 없더군요. 이 그림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사대부 화가 윤두서의 아들인 윤덕희(尹德熙, 1685~1776)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017년 9월 한 고미술 경매에 이것과 아주 비슷한 그림이 한 점 출품됩니다. 같은 사람이 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판박이 같은 그림이었죠.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게 아닐까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뭔가가 있었습니다.
한 여인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모습만 보면 위의 것과 같은 그림입니다. 심지어 왼손 검지로 책을 가리키는 자세까지 똑같죠. 이 그림을 남긴 화가는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책 읽는 여인]의 화가 윤덕희의 아버지입니다. 이제 의문이 풀리죠. 아버지와 아들이 비슷한 구도의 독서하는 여인을 그렸다! 경위야 어찌 됐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셈이죠. 이렇게 부자가 나란히 책 읽는 여인을 그림으로 남긴 것도 한국 미술의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부분입니다.
기나긴 독서의 역사에서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여성적인 삶의 형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불과 300여 년밖에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여성들에게 독서는 그만큼 간절하고 절실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남성이 책을 읽는 것만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수많은 그림에 남성의 독서가 묘사됐지만, 십중팔구는 커다란 풍경의 일부로 그려졌을 뿐입니다. 독서하는 남성을 따로 떼어 그린 경우가 극히 드문 이유입니다.
2017년 한 경매에 출품돼 관심을 모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입니다. 화면 아래 띠풀로 지붕을 이은 정자에서 어느 선비가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군요. 이 그림에서 보듯 인물은 거대한 자연의 극히 작은 일부로 묘사돼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저 사람이 뭘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물론 예외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옛 산수화 속에서 독서인은 이렇듯 아주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얼마 전에 교보문고에서 상반기 독서 시장 통계를 발표했는데요. 상반기에 서점에서 책을 구매한 사람을 성별로 보면 여성이 60.7%였습니다. 연령대별로는 40대가 32.9%로 가장 많았고요. 두 통계를 합하면 책 구매자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40대 여성(21.5%)입니다. 더 재미있는 현상은 책과 관련한 책의 표지에서 ‘독서하는 여성’을 묘사한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입니다.
굳이 많은 예를 일일이 들 필요도 없습니다. 이 표지들은 제가 최근에 본 것들 몇 가지일 뿐입니다. 찾으려 들면 훨씬 더 많은 사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죠. 그것은 다시 말하면 ‘여성의 독서’가 그만큼 화가들에게 특별한 소재로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물론 가장 오른쪽 책의 표지처럼 남성의 독서도 있습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지만요.
다시 우리 그림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조선 후기에 시장이 크게 발달하면서 세책방(貰冊房)이라는 가게가 성황을 누리게 되는데요. 요즘 말로 하면 서점보다는 책 대여점에 가깝습니다. 김탁환의 소설에도 쥐 영감이라 불리는 당대 최고의 세책방 주인이 꽤 자주 등장합니다. 이들은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새 소설 작품의 시장에 나갈 만한지 아닌지를 예리하게 가려낼 줄 아는 비평가이기도 했죠.
세책방이 등장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8폭짜리 병풍 그림 [태평성시도]인데요. 자그마치 2,170여 명이 등장하는 이 대작은 조선 후기 생활사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그 시절에 도심에서 번성한 시장의 모습이 참으로 다채롭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병풍의 제4폭에 문제의 세책방이 보입니다.
1층은 책은 빌려주는 곳입니다. 탁자 위에 책이 잔뜩 쌓여 있고 건물 안에서 한 명, 밖에서 한 명이 책을 들춰보고 있습니다. 가게 주인이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빌려 갈 거야 말 거야 하는 표정일까요. 그 위로 이층에선 누군가 열심히 붓을 놀리고 있죠. 책을 그대로 베끼는 필사(筆寫)에 여념이 없군요. 지금처럼 복사기나 프린터가 없던 시절에는 손으로 베껴 쓸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부를 만들어서 빌려주거나 파는 거죠. 영화 [음란서생](2006)에도 세책가가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책 욕심 있는 이들은 자기만의 근사한 서재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김탁환의 [대소설의 시대]에 어김없이 이 개인 서재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소설의 주인공인 김진이 산속에 마련한 자기만의 은밀한 서재! 그곳에는 세상에 없는 진기한 책들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어느 책이 어디 있는지는 오로지 주인만 알 뿐이죠.
조선 후기에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험준한 바위 절벽이 강과 맞닿은 경치 좋은 골짜기 안에 호젓한 기와집이 보입니다. 바위산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공간에 보일 듯 말 듯 깃든 모습이 참 절묘하죠. 화면 아래 오른쪽에 보이는 세 사람이 그곳을 찾아가는 모양입니다. “저쪽으로 가면 된다네.”
산방(山房)은 산속 암자를 뜻합니다. 안에 책이 그득그득 쌓여 있는 게 보이죠. 이 그림은 중국의 어느 고사를 그린 겁니다. 흔히 소동파로 널리 알려진 중국 송나라 때 시인 소식(蘇軾, 1037~1101)의 [이군산방기 李君山房記]라는 글에 나오는 고사인데요. 요약하자면 소식의 친구가 산속 암자에서 공부를 하다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구천여 권에 이르는 장서를 후대에 남겨 많은 이가 그 책으로 공부를 하게 했다는 이야기랍니다. 일종의 공공도서관 역할을 했던 것이죠. 책이 귀하던 시절에 그런 모범적인 사례가 있었다면 공부하는 이들은 얼마나 좋았을까요.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했던 그 옛날의 독서. 출세하느냐 마느냐가 책에 달려 있었으니, 부모들의 교육열은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그림은 [평생도]라는 이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는 8폭 병풍 그림의 한 부분인데요. 평생도란 말 그대로 한 사람의 일생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죠. 위에 보이는 장면은 그중에서도 사랑채에서 아버지로 보이는 이가 글 익히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글공부에 열심인 자식을 보며 마음 가득 차오르는 기쁨을 감출 수 없을 것이고,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큰 효도가 또 어디 있을까요.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한 사람의 일생에 기억할 만한 행복의 순간이 ‘책’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이 그림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독서라는 건 결국 ‘남’이 아닌 ‘나’를 가꾸고 살찌우는 일입니다. 옛사람들이 남긴 그림에서 ‘책 읽는 기쁨’을 만납니다.
김석 KBS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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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