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의 프레젠테이션, 아무나 못 따라하는 이유
애플의 신화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만큼이나 프레젠테이션으로도 유명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디자인된 키노트keynote(맥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PPT 프로그램) 화면, 나긋한 목소리, 청중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진행력, 예상치 못한 이벤트…. 그의 프레젠테이션에 청중은 열광했다. 사람들을 매혹한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잡스는 엄청난 횟수의 리허설을 통해 프레젠테이션 구성을 보완했다고 한다. 하나의 슬라이드에 하나의 포인트만 남을 때 까지 수정을 하고 또 했다. 철저한 준비로 완벽에 가까운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인 것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스타일을 따라 한다. 비슷한 키노트 화면, 말투, 내용까지 유사하게 연출한다. 하지만 그 프레젠테이션들은 잡스의 것과 같지 않다. 잡스의 진정성만큼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잡스는 아이팟을 내놓으면서 마치 그것이 그의 자식인 것처럼 느끼게 했고, 아이폰을 만들면서는 세상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담아 전했다. 그리고 그런 잡스의 마음이 우리 가슴에도 와닿았다.
진심, 이것이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에 숨은 비밀이다. 프레젠테이션은 진심이 전해져야 청중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실수하지 않고 말을 잘할 수 있을까’보다, ‘어떻게 하면 그 말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가닿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얼마나 외운 대로 줄줄 잘 읊느냐보다
얼마나 내용에 ‘혼’이 실리느냐로
승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꼭 팔고 싶은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 때 나는 철저하게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서 혼심을 다해 그 생각을 광고주에게 쏟아낸다. 내 아이디어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보다 내 진심이 담긴 태도에 광고주의 마음이 움직였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마음은 롤러코스터에 오르는 마음과 비슷하다. 무서울 걸 알면서, 내려갈 때 소리 지르게 될 걸 알면서 우리는 기꺼이 열차에 몸을 싣지 않는가. 그렇게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으로 나는 프레젠테이션을 즐긴다. 긴장감 넘치는 무대 위에서 펼치는 외로운 싸움.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청중을 압도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야 한다.
커뮤니케이션 이론 중 하나인 메라비언의 법칙에 따르면 상대방에 대한 호감을 결정짓는 요소에서 말의 내용(언어)이 차지하는 비중은 7퍼센트에 불과하고, 목소리나 말투(청각)가 38퍼센트, 표정과 자세 같은 태도(시각)가 55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즉, 대화에서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보다 시각적・청각적인 요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가 호감이냐 비호감이냐는 보통 프레젠테이션 초반에 판가름 난다.
사실 나는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사람보다 끼어들 틈을 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말을 똑 부러지게 잘하는 사람은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꼭 공감 능력도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반면 말을 좀 어눌하게 이어가더라도 그 속에 진심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신뢰가 간다. 말을 청산유수로 하지는 못하더라도 ‘버퍼링’의 위기를 위트 있게 넘기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매력이 보인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노래를 완벽하게 부르기보다 자기만의 색깔로 진정성 있게 부르는 사람이 더 큰 울림을 준다. 비록 음정이 정확하지 않아 불안할지라도 청중의 심금을 울리는 가수에게는 분명 다른 무기가 있다.
올해 초 방영된 <내일은 미스트롯>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한 고등학생 쌍둥이 자매가 출연했다. 활기차고 상큼한 매력으로 심사위원의 시선을 사로잡은 자매였는데, 노래를 하다가 그만 고음 부분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자매는 당황하는 대신 노래 중임에도 “죄송합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태도가 오히려 심사위원단의 마음을 움직여, 자매는 하트를 여덟 개나 받으며 예비 합격했다.
이처럼 투박하더라도 진정성을 담았다면 그 마음은 전해지기 마련이다. 경쟁 PT를 하다 보면 의외로 완벽에 가까운 PT를 보여준 사람이 지는 경우가 많다. 반면 PT 기술은 떨어지지만 메시지를 가슴에 와닿게 전달해 PT를 승리로 이끄는 경우를 자주 본다. 빈틈없는 연출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대하는 태도다. 스티브 잡스의 ‘스타일’을 따라 하기보다 나만의 ‘진정성’을 담아 보여주라는 것이다.
발음부터 시작해 시선, 서 있는 자세까지 시중에는 다양한 PT 기술을 알려주는 책이 넘쳐난다. 하지만 프레젠테이션에서 이기려면 결국 기술이 아니라 열정이 담긴 진심이 전달되어야 한다. 광고를 크게 히트시키겠다는 욕심이든, 좋은 제품을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의지든 그 마음이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전해질 때 프레젠테이션의 힘이 발휘된다.
우리는 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대를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설득하는 가장 쉽고도 본질적인 방법은 진심을 전하는 것이다.
진심을 매력적으로 전하는 능력, 이것이 곧 설득력이다.
이 책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하우만을 담지는 않았다. 묵묵히 하다 보니 단련으로 이어진 나의 일상과 생각을 한자 한 자 써나갔고 꾸준히 쓰다 보니 한 권의 책이 되었을 따름이다. 오직 크리에이티브만을 향한 발악을 진솔하게 담았으니 나름 건질 만한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습관은 평범하지만 과정은 평범하지 않았던 나날들의 진심이 투명하게 전해진다면 더없이 좋겠다. 아무쪼록 재미나게 읽어주길 바란다.
- 오롯이 혼자 되는 새벽녘에 이채훈(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