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테이블로 즐기는 아날로그 음악의 매력

확실히 아날로그가 대세다. 사라질 줄 알았던 LP의 신규 수요층이 생기고, 희소성 있는 음반엔 프리미엄이 붙는다. 국내·외 LP를 다시 재생산한다는 소식도 들리고, 내 주변의 음악 애호가들 중엔 턴테이블을 메인 소스기로 사용하는 유저가 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아날로그에는 ‘과정의 즐거움’이 있다. LP를 꺼내 정성스레 먼지를 털고, 플래터에 올린 후, 소릿골의 첫 지점에 맞춰 톤암을 이동한다. 잠시 숨을 멈춘 채 카트리지를 조심스레 내리는 이 수순은 마치 내가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 직접 연주에 참여하는 느낌이다.


정교하게 세팅된 턴테이블과 톤암, 그리고 카트리지와 포노 앰프의 조합이 선사하는 음악은 디지털 사운드가 범접하기 힘든 감성과 음질을 지닌다. LP는 직접 만지는 ‘접촉의 정감’이 있고, 레코딩 당시 원음을 그대로 담아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불변의 포맷’이다. 현재 진행형인 디지털 사운드의 그것과는 다른 원숙함을 가졌다. 무엇보다 넓은 대역폭의 정보량은 청자에게 편안함을 제공한다. 

턴테이블은 언뜻 보면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는 수십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된 정교한 메커니즘의 산물이다. 레코드의 표면 기록을 카트리지를 통해 정확히 읽기 위해선 플래터의 일정한 회전 관성이 요구되며, 모터나 샤프트의 소음 역시 유입돼선 안 된다. 이를 위해 턴테이블 제작에 있어 물성을 고려한 소재를 적용하고, 철저한 공진 대비 설계가 필요하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슬로베니아의 기계 엔지니어 출신인 프랑크 쿠즈마(Franc Kuzma) 씨는 완벽한 아날로그 사운드 재생을 목표로, 1982년 자신의 이름을 딴 아날로그 전문 기업 쿠즈마(Kuzma) 사를 설립한다. 그의 모토는 합리적인 가격과 안정성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1985년 이후부터 출시된 스타비(Stabi) 턴테이블 시리즈는 세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다.


오늘 소개하는 스타비 XL DC는 쿠즈마의 플래그십 모델로 1999년부터 생산된 롱런 모델이다. 초기 명칭은 XL로, 2개의 AC 모터를 이용한 전형적인 하이엔드 벨트 드라이브 방식의 제품이었다. 이를 1개의 PS DC 모터로 개선하여 신형 제품을 내놓은 것이다. 모터는 1개로 바뀌었지만 시스템은 더 간결해지고 토크값도 이전 대비 두 배로 강해져, 스타트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플래터가 회전하기 시작한다. 기존 모델은 외장 전원부에 온·오프 스위치가 있었지만, DC 모델은 이를 분리한 별도의 컨트롤부를 제공하여 사용 편의성을 높였다.  

쿠즈마의 제품 철학은 그들의 모델명에서 쉽게 드러난다. 안정성(Stability)에서 이름을 따온 ‘Stabi’ 턴테이블이나, 슬로베니아 언어 중 단단함을 의미하는 ‘Stogi’ 톤암 등 직관적 단어를 통해 제품을 어필하고, 일체의 미사어구를 생략한다. 이것이 쿠즈마가 유저들과 소통하는 방식인 것이다.


스타비 XL DC의 외관을 보면 공들여 쌓아 올린 첨탑이 연상된다. 베이스와 톤암 타워, 모터 어셈블리는 각각 독립적으로 구성되며, 모두 황동으로 제작되어 우수한 감쇠 특성을 지닌다. 두 덩어리가 합쳐진 슬래이브 구조의 베이스는 무게만 27kg이며, 모터 어셈블리가 7kg에, 톤암 타워는 14kg나 된다. 여기에 플래터 무게까지 합치면 약 80kg으로 그야말로 거함급 턴테이블이다.


약 11cm 두께의 플래터는 원치 않는 모든 진동의 흡수 및 분산을 위해 고밀도 알루미늄과 아크릴 플레이트의 다층 구조로 만들어 졌으며, 베이스에 접촉하는 스핀들 샤프트의 지름은 무려 3cm에 가깝다. 접촉면의 경우 루비볼을 사용하고 윤활유가 채워져 코깅 현상을 줄이고, 원활한 회전을 도모한다.

기본으로 제공되는 매트는 세미 하드 섬유와 고무의 합성 재질로 만들었으며, 클램프는 충분한 무게의 황동과 아크릴로 제작했다. 이 둘의 조합은 LP의 플레이 시 발생하는 잔 진동을 감쇠시키고, 레코드 면을 플래터에 균일하게 밀착시키는 역할을 한다.


톤암 타워의 암 보드는 여러 브랜드의 톤암 규격에 따라 교환이 가능하며, 특히 정상적인 사용 중에 아지무스의 손실 없이 VTA를 조정할 수 있게, 내부에는 직경이 1인치, 높이 4인치의 리니어 타입의 볼 베어링이 달려 있어 0.1mm씩 80mm 범위 내에서 조정이 가능하다. 옵션 품목인 디지털 측정 레벨기를 추가하면 0.01mm까지 세밀한 조정을 반복할 수 있다.


청음 테스트에는 쿠즈마 4-Point 톤암에, 블루일렉트릭(Bluelectric)의 실버 스피리트(Silver Spirit) MC 카트리지를 장착하고, 입실론(Ypsilon)의 MC 20L 스텝업 트랜스포머에 VPS-100 포노 앰프를 매칭했다. 30여 년을 넘게 오직 아날로그 기기만을 제작한 쿠즈마의 경험과 기술이 빚어낸 스타비 XL DC 턴테이블은 과연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줄지, 떨리는 마음으로 음감에 들어갔다.

우선 세이지 오자와 지휘의 말러 교향곡 1번 타이탄 4악장. 첫 음이 터지는 순간 광활한 무대와 대단한 안정감이 느껴진다. 마치 진득한 황토를 겹겹이 바르고, 그 위에 단단한 대리석을 깔아 놓은 무대 위에서 단원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고, 흥에 겨워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착각이 들 정도다. 악기들은 고유의 음색들을 뽐내며 잘 짜인 쇠사슬처럼 연결되어, 각자의 영역에서 레이어를 형성한다. 이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하모닉스는 견고한 무게 중심을 만들고, 깊고 장중한 정위감을 표현한다. 번뜩이는 광채는 마치 숭어처럼 튀어 올라 흥을 돋운다. 대단한 생동감과 균형감이다.


카르미뇰라와 소나토리 데 라 지오이오사 마르카 그룹이 연주한 비발디 사계 겨울 3악장에서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첼로의 한 줄 스트링은 끊기지 않고 생명이 다할 때까지 이어지며, 그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바이올린의 음색은 마치 LP 소릿골에 기록된 모든 정보를 남김없이 긁어모아, 두터울 땐 두텁고. 가녀릴 땐 한없이 여린 선도 높은 디테일을 보여준다. 남성적인 육중함이 로우 미드 영역의 어퍼 베이스를 받쳐주고, 그 위를 여성스러운 예리한 현악의 선율이 수를 놓는 형상이다.


아날로그를 즐기는 이유는 특유의 호소력이라 할 것이다. 리빙스턴 테일러의 ‘Grandma's Hands’를 재생하자, 아카펠라 단원들과 어울린 보이스는 스튜디오 모니터가 아닌 넓은 성당에서 노래하는 듯한 공간감이 연출된다. 숨소리가 실제 소리처럼 바로 앞에서 한 호흡씩 생생하게 느껴지고, 숨김없이 소리를 방출한다. 원근감의 표현이 극대화되어 실제 눈앞에서 공연을 보는 듯하다.


디지털 포맷이란 경쟁자가 가져온 자극은 아날로그의 완성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특히 쿠즈마의 아날로그 기기들이 표현하는 음의 수준은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며, 유연하다. 이미 턴테이블을 사용하고 있거나, 막강한 디지털 소스기기를 운용하는 오디오파일에게 스타비 XL DC의 청음을 권하고 싶다. 일청 시에는 본인이 자주 듣던 음반을 꼭 지참하길 바란다. 자신이 그토록 즐겼던 음악들이 재해석되어 완전히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글 | 이상훈


수입원 소노리스 (02)581-3094 

[Kuzma Stabi XL DC]

가격 4,000만원(4 Point 톤암 별도 : 800만원)

속도 33, 45. 78RPM

플래터 재질 알루미늄 & 아크릴

베어링 타입 루비 볼-인버티드

섀시 브래스

크기(WHD) 45×30×45cm

무게 77kg, 22kg(플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