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 병장 시절 겪은 박정희 서거, 12·12의 추억
개인의 체험과 역사 사이
언제나 역사 속에 존재하지만, 역사와 자아와의 관계를 인식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전쟁과 같은 역사는 그 외연이 워낙 크고 넓어서 그것을 겪은 이들의 공동의 기억으로 환기되곤 한다. 어떤 이에게 죽음의 공포로, 또 어떤 이에게는 굶주림의 고통이나 절망 따위로 전쟁이 떠오르는 형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극적으로 전개된 우리 현대사에서 6월항쟁 같은 기억은 당사자가 아니면 쉽게 체험할 수 없다. 이런 경우 현장에서의 체험은 역사와 자아와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동시대를 살았으나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이들에 비겨 그는 날것의 역사를 겪은 것이기 때문이다.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4·19혁명이나 5·16쿠데타 같은 사건이 전개된 시간 속에서 성장했지만, 그걸 자신의 체험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신문이나 방송, 혹은 누군가의 전언으로 환기되고 구성되는 상상의 사건에 그치기 때문이다.
10월 26일. 1909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며 1979년에는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된 날이다. 안 의사의 의거는 물론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이지만, 1979년 대통령 박정희의 유고는 내겐 각별한 기억으로 떠오르는 사건이다.
10·26은 내게 늘 12·12와 한 쌍이 돼 떠오르는 사건이다. 중앙정보부장이 절대권력을 살해한 10·26이 신군부가 자행한 군사쿠데타 12·12를 낳았기 때문이다. 10·26에서 12·12로 이르는 일련의 역사적 전개는 1961년에 박정희가 감행한 군사정변의 반복이었다.
1977년 5월에 입대한 나는 논산에서 신병 기본훈련을 받고 바로 특전사로 배치됐다. 용산에서 버스를 타고 특수전사령부로 이동할 때까지 나는 ‘공수특전부대’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하다못해 나는 베레모를 쓴 공수병조차 보지 못한 촌놈이었다.
특전사 보충대에서 며칠간 머문 뒤 나는 당시 인천 부평에 있던 제9공수특전여단으로 재배치됐다.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나는 특전사 교육대에서 공수 기본교육과 특수전 교육을 이수함으로써 공수병이 됐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그해 7월 한 달을 나는 순전히 악으로 공수낙하 교육을 이수했다.
귀대해 전투 중대의 화기 특기병으로 근무하던 내가 대대 본부 인사과 행정서기병으로 보직을 바꾼 것은 이듬해 4월께다. 대학 재학 중이면서 글씨를 그나마 반듯하게 쓴다는 이유로 나는 행정병으로 선발되는 행운을 잡은 것이었다.
1979년은 박정희의 유신 독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던 해다. 그러나 세 해째 짬밥을 먹고 있던 나는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무관하게 고참병이 돼 가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각성하지 못한 얼뜨기 병사였다. 그 무렵 우리는 부마항쟁도 무슨 낯선 나라의 소식처럼 듣고 있었던 것 같다.
10월 26일, 나는 십여 명의 전역 대기병(훈련 기간 중 전역하는 병사로 부대에 대기)과 함께 부대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 대대는 일찌감치 천리행군을 떠났고 대대 필수 행정 요원 몇 명과 같이 날마다 권태와 무료를 죽이고 있던 때였다.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9시께 갑자기 여단 본부에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대대 상황실 앞에 비무장으로 잔류 병력이 집합해 있는데 퇴근했던 인사장교가 숨이 턱에 닿아서 들어왔다. 그는 우리가 묻고 싶은 걸 되물었다.
- “…….”
천리행군을 떠난 우리 대대를 제외한 나머지 3개 대대가 출동한 것은 사실이었다. 인사장교는 여단 본부로부터 우리 잔류병들로 부대 외곽의 8개 초소를 운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행정병뿐 아니라 제대를 코앞에 둔 왕고참들도 총을 메고 경계근무에 나서야 했다.
말뚝 보초로 두세 시께 한번 교대해 쉬고 연달아 다섯 시간쯤 경계를 서고 아침 8시에 교대를 하고 들어오니까 조수인 후임병이 ‘박정희가 죽었다’고 말해 줬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나는 절대권력의 죽음이 유신체제의 종언을 고한다거나 이후 압살 직전의 민주주의가 기지개를 켤 수 있다는 사실 따위는 짐작하지도 못했다. 우선 자리에 들어 눈을 붙이고 싶다는 욕구가 더 컸다.
박정희 18년 독재는 심복이 쏜 총탄 몇 발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현역 병사들은 그다음 다음날에 이른바 ‘7대 군가’에서 ‘유신의 국군’을 뺀다는 육군회보를 통해서 권력의 무상을 확인했다.
사제 식사를 즐겼다던 청와대 내부 경비 66특전대대에 짬밥이 나오고 결국 이 부대는 해체됐다. 백발백중 특등사수 출신의 옛 동료들이 소속부대로 복귀하는 걸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절대권력의 유고를 실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독재자의 죽음으로 비로소 그의 유산인 유신시대가 막을 내린 것은 역사의 발전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정작 그의 죽음이 사병들에게 끼친 것은 훨씬 심각한 수준의 민폐였다. 시달된 육군회보는 외출·외박·휴가 일체를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나는 손목을 끊어버리고 싶은 후회로 가슴을 쳤다.
전역을 앞두고 가능하면 늦게 찾아 먹으리라고 일부러 마지막 정기휴가를 미루고 있었던 나(휴가 담당자였다.)는 거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 휴가를 찾아 먹지도 못하고 전역마저 늦추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실제로 병사들 사이를 떠돌아다녔다. 3년 전인 1976년에 일어난 이른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당시에 사병들의 전역이 연기된 사례가 불길하게 인용되곤 했다.
비사로 후대에 전해지는 역사
12월, 휴가가 재개되자 나는 일착으로 휴가를 떠났다. 12월 14일 정기휴가를 마치고 귀대했을 때야 나는 이틀 전에 우리 부대가 출동했다는 걸 알았다. 그날 밤 우리 여단은 서울로 출동하다가 부천 근처에서 회군했다고 했다. 그게 뒤에 사람들이 ‘사태’라 부르다가 ‘쿠데타’로 최종 규정된 12·12쿠데타라는 역사와 내 개인사가 만나는 지점이다.
정작 현역 사병으로 그 현장을 지키고 있었지만, 우리는 박정희 사후에 신군부를 중심으로 진행된 권력 찬탈을 ‘장님 코끼리 만지기’ 정도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10·26의 전모는 합동수사본부(합수부)의 발표나 방송 따위로 간신히 꿰맞추고 있었지만, 우리 사병들이 쿠데타와 관련된 고급 정보에 접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980년 2월에 나는 만기 전역했다. 3월에 대학에 돌아갔는데 두 달 후에 광주항쟁이 있었다. 5월에 계엄이 실시되면서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한 해병대 병력이 학교를 닫아 버렸다. 그리고 신군부의 공포정치가 수년간 이어진 것은 누구나 아는 바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5공 청문회 등을 통해 12·12 쿠데타와 광주항쟁의 모습이 조금씩 밝혀졌다. 역사가 소수의 권력에 의해 농단되고 비화의 형식으로 후대에 공개되는 사회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1980년 전후사에서 국민은 역사에서 완전히 소외돼 있었다. 그런 비사를 통해 나는 오랫동안 맞추지 못한 퍼즐 조각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12·12 군사반란·12·12 하극상·12·12쿠데타·12·12 쿠데타적 사건 등이라고도 한다. 신군부 세력은 이 사건으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1980년의 5·17 사건을 일으켜 새로운 권력을 획득하였다.
5·17 사건은 명백한 정치적 쿠데타로 간주될 수 있지만 12·12사건 당시에는 신군부의 정권장악 목표가 아직 명백하게 표출되지 않았으므로 12·12군사반란은 예비 쿠데타로 간주되기도 한다.”
- 「12·12 군사반란」 항목의 ‘개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12는 전두환을 비롯한 일부 정치군인들이 이끄는 사조직이 하극상으로 군권을 장악한 쿠데타다.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인 육참총장을 강제연행하면서 군내 반대파들을 무력화시켰다.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하극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39년, 개인의 체험과 역사는 어떻게 만나는가
주로 영관급인 1·3 공수특전여단의 대대장들이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는 데 동원됐는데 이 과정에서 사령관 부관이었던 김오랑 소령이 총격으로 사망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영관급 장교들이 장군 전용의 지프에 달린 별판을 군홧발로 짓이겼다는 이야기는 당시 흔히 듣던 이야기였다. 강제 예편돼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은 1989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육본 쪽에서는 쿠데타군을 막기 위해 동원한 부대가 내가 근무하고 있었던 9공수여단이었다. 내가 전입할 때 여단장이었던 노태우는 청와대 작전참모로 옮겨갔고 당시 여단장은 갑종간부후보생 출신의 윤흥길 준장이었다. 명령에 따라 여단은 즉각 출동했지만, 아군 간의 교전을 두려워한 육군 수뇌부가 중도 회군 명령을 내림으로써 부대는 부천에서 원대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사에서 첫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에게 총애받던 정치군인들은 배운 대로 오욕의 역사를 반복했다. 이 정치군인들은 군령체계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엄청난 하극상을 통해 군대와 그들이 지키고자 한 가치를 우스개로 희화화해 버렸다.
5공 청문회 등에 불려 나온 그 빛나는 별자리들이 보여준 것은 다만 환멸이었을 뿐이다. 상관에게 총을 겨누고 권력을 빼앗은 이들은 한 시절의 영화를 누렸지만, 자신의 저지른 패악에 대해 발뺌으로 일관했고 어떤 책임도 지려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앉은 것은 군인이 아니라 단지 죄를 면하고자 하는 비루한 인간이었을 뿐이었다.
12·12가 김영삼 정부 때 전두환·노태우가 사법적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일반의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두환은 뻔뻔스럽게 사실을 왜곡하는 자서전을 펴내는 등 역사를 우롱하고 있다.
박정희가 시작하고 전두환 등 신군부가 재현한 쿠데타는 2016년부터 시작된 국정농단을 이유로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당하는 와중에서 기무사 등 군부의 실권자들에 의해 다시 반복될 위기가 있었다. 다행히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우리 역사가 군부에 의해 뒤집힐 수 있을 만큼 취약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39년이 지났다. 한 세대가 바뀌는 30년을 10년 가까이 지난 것이다. 사람들은 12·12도 잊었고 신군부 독재도 잊었다. 세기가 바뀌고 정치적 지형도 바뀌어 촛불혁명을 통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역사가 이뤄지고 있다.
우리 국민은 지난 4월과 5월에 이뤄진 남북정상회담과 지난 9월의 대통령 방북과 같은 역사의 전개를 겪었다. 남북이 연출한 파격적인 만남과 같은 이 초유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역사와 자아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게 될까. 서른아홉 번째 10·26을 맞으며 무명의 시민이 겪은 개인적 역사와 공식 역사 사이의 간극을 무심히 생각해 본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