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장소가 있다. 독일 뉘르부르크링, 영국 실버스톤, 프랑스 르망 같은 서킷이다. 일본 시즈오카현 후지산 기슭에 자리한 후지스피드웨이는 그 곳들과 조금 다르다. 더 이상 레이스만 보기 위해 잠시 들렀다가 떠나는 경주장이 아니다. 서킷을 중심으로 호텔과 박물관, 레스토랑, 쇼핑 공간, 반려동물 시설, 온천까지 갖춘 거대한 '자동차 관광도시'로 변신했다.

후지스피드웨이를 운영하는 토요타는 최근 후지산 자락에 복합문화공간 '후지 모터스포츠 포레스트 테라스'를 개장했다. 토요타는 지난 5일 일본 시즈오카현 오야마정에서 식음·휴식·숙박 기능을 결합한 이 시설을 선보다. 2027년에는 온천과 호텔을 추가 개장해 모터스포츠 관광 거점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후지 24시간 레이스 취재를 위해 찾은 현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후지산이었다.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후지산 아래에는 레이스카가 질주하는 서킷이 펼쳐졌다. 그 옆에는 현대적인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과거라면 경기장과 주차장이 전부였을 공간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동차를 매개로 하루를 보내고, 하룻밤을 묵고, 가족과 휴식을 즐기는 거대한 관광단지로 바뀌고 있었다.


실제 후지 모터스포츠 포레스트는 단순한 서킷 개발 사업이 아니다. 후지스피드웨이를 중심으로 후지 모터스포츠 뮤지엄, 후지 스피드웨이 호텔, 포레스트 테라스를 연결해 하나의 생태계로 만드는 프로젝트다. 토요타는 이를 통해 자동차를 이동수단이 아닌 문화 콘텐츠로 확장하려 하고 있다.
포레스트 테라스에 들어서면 일반적인 자동차 전시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통유리 너머로 숲이 보이고, 레스토랑과 카페에는 관광객들이 여유롭게 식사를 즐긴다. 건물 곳곳에는 자동차 관련 전시와 굿즈가 배치돼 있지만 분위기는 오히려 리조트에 가깝다.
이번에 문을 연 시설에는 메밀 전문점 '후지노카', 도쿄 유명 베이커리 '트라스파렌테 셀레스테', 참치 전문점 '토라이치', 중식당 '키스린', 반려견 케어 서비스 '페트리트' 등이 입점했다. 모든 식음시설에는 반려동물 동반이 가능한 테라스 좌석이 마련됐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자동차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관광객들의 모습이었다. 레이스를 보러 온 관람객보다 반려견과 산책하는 가족, 커피를 마시며 후지산 풍경을 감상하는 여행객이 더 많아 보였다. 서킷이 특정 이벤트가 열리는 공간이 아니라 일상적인 관광지로 기능하고 있다는 의미다.
토요타가 이런 공간을 만드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동차 산업이 전동화와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차량 자체만으로는 소비자와의 접점을 유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대신 브랜드와 문화를 경험하게 하는 공간이 중요해지고 있다. 자동차를 사지 않아도 토요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왼쪽부터 토요다 아키오 토요타그룹 회장과 그의 장남 토요다 다이스케 우븐 바이 토요타 부사장.이런 전략의 배경에는 토요다 아키오 토요타자동차 회장의 철학이 자리한다. '모리조(Morizo)'라는 이름으로 직접 레이스에 출전하는 아키오 회장은 오랫동안 "좋은 차는 좋은 길에서 만들어진다"는 신념을 강조해왔다. 모터스포츠를 단순한 마케팅 수단이 아니라 연구개발과 인재 육성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 후지스피드웨이는 지금도 토요타의 기술 실험장 역할을 하고 있다. 후지 24시간 레이스에서는 수소 엔진과 탄소중립 연료, 차세대 안전 기술 등이 실제 경주 환경에서 검증된다. 레이스 결과보다 기술 개발 과정에 더 큰 의미를 두는 이유다.


이 점에서 후지 모터스포츠 포레스트는 독일 뉘르부르크링이나 영국 실버스톤과도 차이가 있다. 뉘르부르크링이 서킷 중심의 관광지라면, 후지는 지역 전체를 자동차 문화도시로 만드는 프로젝트에 가깝다. 호텔과 박물관, 레스토랑, 체험 시설, 연구개발 거점까지 하나로 묶어 운영한다.
또 다른 차별점은 특정 브랜드를 넘어 일본 자동차 산업 전체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후지 모터스포츠 뮤지엄에는 토요타뿐 아니라 혼다, 닛산, 마쓰다 등 다양한 제조사의 역사적 차량이 전시돼 있다. 자동차를 기업의 상품이 아니라 국가 산업 문화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국내에도 인제스피디움이나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처럼 서킷과 관광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자동차 제조사가 직접 나서 지역 전체를 자동차 문화 생태계로 개발하는 사례는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 후지 모터스포츠 포레스트가 업계의 관심을 받는 이유다.

토요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2027년에는 후지산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천연 온천과 사우나, 호텔, 추가 상업시설을 개장할 예정이다. 부지 규모는 약 1만6600㎡, 연면적은 약 8800㎡에 달한다. 서킷에서 울려 퍼지는 엔진 소리를 들은 뒤 후지산을 바라보며 온천에 몸을 담그고,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경험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토요타가 만들고 있는 것은 단순한 자동차 관광지가 아니다.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문화 생태계이자 미래 모빌리티 시대에도 자동차의 즐거움을 이어가기 위한 새로운 실험이다. 후지산 아래 펼쳐진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지금 일본 자동차 문화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후지(일본)=지피코리아 김기홍 기자 gpkorea@gpkorea.com, 사진=슈퍼타이큐 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