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전사자 최다 배출한 이순신 가문, "특권이 아닌 긍지를 계승하라"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현충사는 민족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매년 수많은 사람과 학생이 이곳을 방문하고 참배한다. 그런데 이 현충사에는 눈 여겨 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가기 쉬운 건물이 하나 있다.
현충사 정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기둥과 지붕만 있어 마치 기차역의 플랫폼을 연상시키는 길쭉한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이순신 장군과 그의 후손 4명이 받은 5개의 정려(旌閭·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나 효자, 열녀에게 국가에서 내리는 현판)를 죽 걸어 놓은 곳이다. 이른바 ‘4충신 1효자’ 정려로, 충무공과 그의 조카인 강민공 이완, 4대손인 충숙공 이홍무, 5대손 충민공 이봉상 등 네 분의 충신과 한 분의 효자인 7대손 이제빈을 기리는 편액이 걸려있다. 이 다섯 명 중 이제빈을 제외한 4명이 모두 전사자다.
순국한 충무공과 그의 후손
이완은 이순신의 형 희신의 넷째 아들이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 옆에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무과에 급제하고 의주병사로까지 승진했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한 이래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당시 명나라와 후금(후일 청나라)은 만주에서 국운을 건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1621년 후금이 심양을 함락하고 요동을 제패하자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패잔병을 수습해서 조선으로 망명했다. 이로 인해 압록강변에는 조선군과 모문룡군, 후금군이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이 형성됐다. 이 상황에서 조선은 명나라와 후금, 누구의 편도 적극적으로 들지 않으며 양측의 불만을 샀다. 의주 군민들도 불만이 많았다. 몇 년간 비상경계 태세만 유지되고 후금, 명나라군의 횡포를 참아내며 그들의 갖은 요구사항을 들어주느라 피로만 쌓여갔다.
1624년(인조 2년) 조선 정부는 이 어려운 지역의 책임자인 의주 부윤으로 이완을 파견했다. 이완은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할 때까지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이완에 대해 병사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었다는 비판이 있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더구나 이완은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1627년 1월 한 번의 실수로 강민공의 의주 수성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조선의 관측망을 피한 후금의 특공대가 의주성의 수문을 통해 성 안으로 잠입한 것이다. 성문은 열렸고 의주성은 허무하게 함락됐다. 이완은 이 날 전사했다.
이홍무, 이봉상은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전사했다. 이인좌가 주도한 반군은 청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다 안성에서 패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인좌의 첫 번째 목표였던 청주성을 지키던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바로 이순신의 5대손인 이봉상이었다. 반란 당일 이봉상은 총애하던 기생과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기생이 반군의 비밀요원이었다. 기생과 또 한 명의 내통자인 비장(裨將)이 몰래 문을 열어주어 반군이 난입했고 이봉상은 반군에 생포됐다. 이인좌는 이봉상을 회유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봉상은 “너는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고 꾸짖으며 살해됐다. 이봉상의 삼촌이며 이순신의 4대손인 이홍무도 청주에 있다가 반군에게 잡혔다. 그는 감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살해됐다.
-정조실록 권25, 정조 12년 3월 2일 (일부 발췌)
충무공의 세 아들도 전사
이순신 장군가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에 대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이순신 장군의 집안은 역대로 전사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 중 하나라는 점이다.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충무공의 후손은 현충사 정려에 이름이 올라있는 이들 외에도 3명이 더 있다. 바로 충무공의 아들들이다. 그는 슬하에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 셋이 전쟁에서 죽었다.
첫 번째는 이순신 장군의 셋째 아들 이면이다. 1597년, 왜군이 온양 읍내로 침입해 분탕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아산의 이순신 집안을 노리고 쳐들어 왔다는 소문도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어찌됐건 이순신 장군의 두 아들은 장군과 함께 전장에 있었고 집에는 장군의 셋째 아들 이면만이 남아 있었다. 이면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청년들을 모아 읍내로 달려가 왜군과 싸우다가 3명을 죽이고 전사했다. 이때 그의 나이 21세였다. 난중일기에는 아들을 잃은 이순신 장군의 충격과 슬픔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적어도 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이순신 장군도 평범한 아버지였다. 이면이 죽은 그 이듬해인 1598년, 아버지인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순국했다.
이순신 장군의 서자인 이훈과 이신도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측실 해주 오 씨의 소생인 이 두 아들에 대해선, 신분제적 편견 때문인지 기록이 별로 없고 사망 장소와 시기에 대한 의견도 조금씩 엇갈린다. 그러나 이 두 사람 모두 무과에 급제해 종군했고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신은 이괄의 난 때 유명한 안현 전투에 참전했다. 1624년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그러나 같은 날 정부군을 지휘하는 도원수 장만도 여러 도에서 징발한 군대를 끌고 서울로 진입, 양군은 안현에서 결전을 벌인다. 이 전투에서 이괄이 패배함으로써 이괄의 난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신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전투 현장에서 전사해 무덤도 만들지 못했다는 기록으로 보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신의 형제인 이훈은 강민공 이완을 따라 의주에 가서 복무하다가 의주성이 함락되는 날 이완과 함께 전사했다. (그러나 정조실록에는 이괄의 난 때 전사한 게 이훈, 의주성에서 전사한 게 이신이라고 나온다.)
특권이 아닌 긍지와 자부심의 계승
오늘날 부와 권력의 세습은 한국 사회의 중요한 이슈 중 하나다.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 정가와 기업, 전문직, 사회의 각종 직업에서 아들이 부친의 가업을 물려받는 비중이 의외로 높다. 우리 사회는 세습의 비중이 의외로 낮으면서도 비판의 목소리는 더 높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전통적인 신분제와 직업차별의 영향으로 가업계승의식과 전통의 뿌리가 깊지 않다. 그러다 보니 가업계승의 장점에 대한 인식도는 낮고 비판의식이 높다. 둘째, 가업계승 의식이 약하고 신분상승의 욕구는 높다 보니 몇몇 지위, 즉 사회적 선망도가 높은 지위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이와 관련된 부분의 세습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과 불만을 표출하게 된다.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특권에 앞서 명가(名家)의 후손이라는 데 대한 긍지와 자부심의 계승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가업계승의 긍정적 효과가 용납되기 위해서는 가업계승이 특권의 계승이 돼서는 안 된다. 가업의 계승은 능력과 자격, 긍지와 자부심의 계승이라는 인식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엄한 기준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이런 부분에 대한 인식과 노력이 오랫동안 부족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이순신 장군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이 집안의 이야기는 거의 모든 사람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모든 전문 직종에서 가업의 계승은 그것만이 지니는 독특한 장점이 있다. 한때 전 세계적으로 오너경영의 폐단이 지적되면서 전문경영인에 의한 경영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문경영인 제도의 폐단, 즉 단기 실적 지상주의, 장기적 비전 결여 등의 문제점들이 지적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오너경영이 힘을 얻게 됐다. 그러면 오너경영이 더 바람직한 것일까? 전문경영이 좋으냐, 오너경영이 좋으냐는 질문은 이분법적인 우문일 수 있다. 기업의 특성, 여건에 따라 적절한 선택을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오너 경영이 빛을 보기 위해선 충무공 가문이 보여주었던 강한 책임감과 긍지가 먼저 전수돼야 한다.
이순신 장군의 후손들은 이순신 장군만한 능력과 업적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명장의 후손이라는 강한 자부심과 긍지가 있었다. 그랬기에 실수를 하고 전투에서 패하는 순간을 맞이해도 그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죽음을 피하지도 않았다. 갓 스물을 넘긴 충무공의 셋째 아들 이면이 전투를 피하지 않고 마을 주민을 지키기 위해 달려 나갔던 이유는, 자신은 장군의 아들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사 원문 보기
필자 임용한
인터비즈 황지혜 정리
inter-biz@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