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500일의 썸머>, 사랑을 대하는 두 남녀의 온도차

연애를 시작할 때 미리 이별을 예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우리의 사랑은 영원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죠. 하지만 따스했던 그 사람의 눈빛에서 온기가 사라질 때쯤 불현듯 느끼게 됩니다. 사랑은 이미 끝났고, 아프지만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실연의 상처는 이전까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곤 합니다. 온갖 후회와 괴로움 속에 자신을 밀어넣고 스스로를 망가뜨리기도 하고,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거란 두려움에 숱한 밤을 눈물로 지새웁니다.

물론 그렇다고 실패로 끝나버린 사랑이 애초의 의미마저 퇴색되는 건 아닐 겁니다. 혹독했던 이별의 아픔도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 된다는 걸 우리는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죽을 만큼 아파할 일도, 죽이고싶을 만큼 누군가를 미워할 일도 없어요. 세월을 약 삼아, 슬픔을 벗 삼아 덤덤하게 넘기는 법도 배워야 할 나이가 됐으니까요.

실연을 겪기 전엔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똑같이 사랑을 하고 있어도 남자와 여자가 느끼는 감정에는 미묘한 온도 차가 존재하죠. 서로에게 흠뻑 빠져있을 땐 대수롭지 않았던 그 작은 차이가, 뜻밖에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불행한건 이 놀라운 자각이 늘 이별 뒤에야 찾아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뭘 어쩌겠어요? 이미 마음이 떠난 여자 앞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콧물 삼켜가며 애처롭게 묻지나 않으면 다행이죠.

영화 <500일의 썸머> 스크린샷

마크 웹 감독의 2009년 영화 <500일의 썸머>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사랑은 운명처럼 다가온다고 믿는 순정남 톰과 사랑에 운명 따윈 없다고 쿨내 팍팍 풍기는 여자 썸머가 써나간 500일 동안의 연애담인데요. 여름처럼 뜨겁고 강렬했지만, 그래서 더 지치게 만든 짧은 사랑이 아련한 공감을 이끌어냈죠. 실제로 영화팬들 사이에선 톰과 썸머가 둘 중 누구의 잘못으로 헤어졌는가를 놓고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사랑이란 게 운명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어렵다는 방증일 겁니다. 그냥 둘이 서로 좋아 죽고 못 살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사랑인데, 막상 시작해보면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니까요.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그의 현재뿐 아니라 내가 모르는 그의 과거와 나와 함께할 그의 미래까지 모두 감당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영화 <500일의 썸머> 스크린샷

사랑이 떠나가면

건축가가 되는 게 꿈이지만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에 머물러 있는 톰. 어느 날 썸머라는 이름의 비서가 새로 입사했습니다. 그리고 직감했죠. 그녀는 마침내 자신 앞에 모습을 나타낸 운명적인 사랑, 그 자체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는 순진무구해 보이는 외모만큼이나 사랑에 대한 어떤 환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진실로 내가 만나야 될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지금 톰에게 썸머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쁘장한 외모에 깊고 그윽한 눈, 웃을 때마다 꽃향기가 피어나는 것 같은 썸머. 그녀와 함께 있으면 톰은 슈퍼맨이 된 양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비록 생계의 굴레에 묶여 있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면 언제든 봉인해둔 꿈을 다시 펼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썸머는 톰과 좀 달랐습니다. 아니, 많이 달랐죠.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을 겪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그녀는 남녀 간의 사랑 따윈 믿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운명적인 사랑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얘기입니다. 썸머에게 톰은 그냥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죠. 사랑을 순간의 유희쯤으로 아는 여자, 그게 썸머였습니다.


톰의 바람과 달리 정작 피할 수 없는 운명은 두 사람에게 다가온 이별이었습니다. 애써 녹음해준 CD에 수록된 노래조차 기억 못하는 여자에게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요? 노래 제목과 가사를 빌려 전하는 내 진심과 고백을 듣지 못하는 여자와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썸머의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겠죠. 현실감 없이 운명 따위나 믿는 철부지, 사랑한
다면 결혼까지 생각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풋내기에게 조금씩 질려갔을 겁니다. 늘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 썸머와는 잘못된 운명이란 생각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미칠 노릇입니다. 그토록 결혼을 부정하고 자유를 외치던 그녀가 금세 다른 남자의 여자가, 그것도 아내가 되다니 말입니다. 그것도 네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운명 같은 사랑을 드디어 만났노라 자랑까지 곁들여서.

영화 <500일의 썸머> 스크린샷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배신감에 온몸을 뒤치며 고통스러워하는 톰. 급기야 회사마저 그만두고 방황에 방황을 거듭합니다. 그리고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주죠. 썸머와 만나고 헤어진 지 500일째 되는 날, 톰은 면접을 보러간 회사에서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납니다. 그래요, 우연. 이제 톰은 기적이나 운명, 필연 따위를 믿지 않게 됐지만 그래도 단 하나 거부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우연이라고 생각했죠. 한여름 세찬 소나기를 견뎌낸 그에게 청명한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이름마저 어텀(Autumn)인 새로운 사랑이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연이 강물처럼 오래오래 흘러가는 건 아닙니다. 설레었던 순간은 잠시뿐, 깎아놓은 사과처럼 사랑은 점점 변해갑니다. 그러니 변하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해야 맞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걱정마세요. 아시다시피 인간은 망각이란 최고의 해결사를 머릿속에 상비약처럼 품고 사는 동물 아니겠어요? 언젠가는 그가 일찌감치 나를 떠났음에 안도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 테니까요. 반드시.​

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 2009

감독 마크 웹

배우 조셉 고든 레빗, 주이 디샤넬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산(山),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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