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뭐 어련히 잘하시겠지요
(흔히 의문형으로 쓰여) 따로 걱정하지 아니해도 잘될 것이 명백하거나 뚜렷하다. 대상을 긍정적으로 칭찬하는 뜻으로 쓰나, 때로 반어적으로 쓰여 비아냥거리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 『표준국어대사전』
어련히 알아서 잘하리라는 말 속에는 기본적으로 청자를 향한 화자의 신뢰가 담겼다. 그 일을 어떻게 해야 옳은지 네가 아예 모른다거나 그런 것 같아 믿을 수 없다면 직접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해주겠지만, 그래도 네가 제법 그 일을 아는 것 같아서, 내가 굳이 관여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을 때 덧붙이는 표현이 바로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다.
그런데 사실 좀 놀랍다. 국어사전에도 나왔듯 ‘어련하다’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상대를 신뢰하고 두둔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는, 긍정적인 뉘앙스의 용어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어련하다’는 말을 주고받는 맥락들은 생각보다 훨씬 미묘하며, 따라서 청자로 하여금 영 유쾌하지 않은 반응을 불러올 때가 많다.
말투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무시할 게 못 되겠지만, 청자 입장에서는 어련하다는 말을 들으면 일단 일말의 의심부터 하고 본다. ‘믿는다’, ‘신뢰한다’ 등 좋은 표현들도 많은데 왜 굳이 ‘어련하시겠느냐’는 표현을 써 그 저의를 헷갈리게 만들까. 저 표현은 과연 나를 위한 신뢰일까, 아니면 노파심이나 비아냥일까. 신뢰 – 노파심 – 비아냥(불신), 과연 이 중 어디쯤 의도가 숨은 것일까.
동일한 ‘어련하다’는 표현을 썼지만 A와 B, 각각이 그 말속에 담은 심리는 분명 같지 않다. A의 속내는 신뢰와 노파심 사이 어딘가에 있다(만약 ‘비아냥’이 목적이었다면 B의 반응은 저렇게 온건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B의 속내는 A를 향한 신뢰의 표현도, 노파심의 표현도 아니다. 그보다는 비아냥(불신)에 더 가깝다. 그것도 항의, 반발적인 속성이 짙은.
특히, 안 그래도 B가 이미 충분히 공부/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면, 그리고 그것을 잘 알기에 누가 안 시켜도 자발적으로 공부/일을 열심히 하려는 마음을 먹었다면? A의 말을 들었을 때 B가 느끼는 ‘억울함’은 더 커질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B는 왜 ‘억울함’을 느낀 것일까? 왜 울컥하는 마음이 있어 ‘어련히 잘 알아서 할 것이라’는 말을 굳이 덧붙이고 싶어지는 걸까? 나는 그 이유로 ‘자율성’의 침해를 들고 싶다.
자기결정이론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SDT)은 심리학 분야에서 아주 유명한 이론 중 하나다. 이 이론을 통해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와 리차드 라이언(Richard Ryan)은 일약 스타 연구자의 반열에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하위 이론을 통해 더욱 온전한 이론적 틀을 갖추게 된 이래 교육, 예술, 스포츠, 자아실현, 여가, 행복 등 인간 삶의 정수라 불릴만한 중요 영역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이 이론이다.
관련 연구자, 관련 연구 또한 셀 수 없이 많으며 대중적으로도 유명세가 상당하다. 자기결정이론은 못 들어봤어도 ‘자율성’ ‘내적/외적 동기’ 등은 들어봤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자기결정이론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자기결정이론에서 상정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크게 세 가지다.
- 자율성(autonomy): 외부의 강요, 강압, 통제, 지배 등으로부터 벗어나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마음/행위를 조절하고 목표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
- 유능성(competence): 목표 추구 과정에서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고, 그 안에서 흥미와 효능감, 성취감 등을 경험하고자 하는 욕구
- 관계성(relatedness): 타인과 인간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욕구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자기결정이론에 따르면 동기는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된다. 부모/상급자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니까, 의무감이 들어서, 돈을 벌어야 하니까, 저 물건을 가져야 하니까, 죄책감을 덜 느껴야 하니까, 그 일이 왠지 중요한 것 같아서 등 이유를 외부로부터 찾고자 할 때, 심리학자들은 외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의 발현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 외부로부터 얻어지는 물질적/정신적 보상이 있기에 그 일을 하려 하는 상황일 때. 우리가 가기 싫어도 학교/직장에 가고 하기 싫어도 공부/일을 하는 이유는 대개 이 외적 동기에 해당한다. 문제는 아무리 외적 동기들을 덧대어 봤자 그것만으로 꾸준히 동기를 향상·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외부 통제 상황을 걷어내고 오롯이 자율성, 유능성의 욕구에 나를 내맡기면 외적 동기보다 훨씬 더 오래가고 강도도 센 내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가 만들어진다. 이 내적 동기가 충만한 상태라면 그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혹은 그 누가 어떤 개입을 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그 일을 잘하려 노력한다. 사실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의문이 들지만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자기결정이론에 따르면 그 상태에 도달했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기분은 바로 주관적 안녕감(subjective well-being), 즉 행복이다.
가치 있는 목표를 추구할 때 ‘자율성’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그게 있어야 동기도 생기고 만족감도 생기고 행복감도 생긴다. 최고 컨디션에서의 능력 발휘와 자아실현이 따라오게 됨은 물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면피성으로 ‘어련함’을 말하고 상대가 하는 일에 굳이 한 마디 더 붙이려는 행위는 자율성, 내적 동기, 행복을 추구하려는 이에게는 자칫 방해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심리학 연구들은 이 자율성이 침해되면 실제보다 능력 발휘가 덜 되고 구체적인 수행 성과가 현저히 떨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원래 그 일을 시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런데 ‘어련하겠지만’ 하고 상대의 한마디를 듣고 나면 왠지 그 일을 시키는 사람이 내가 아닌, 상대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원래는 나 좋으라고 그 일을 하려던 것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아닌, 상대 좋으라고 이 일을 하는 것 같아 영 할 맛이 나지를 않는다.
부아가 나고, 억울함을 느끼고, 허탈감을 느끼는 것. 심지어 ‘네, 네 어련히 알아서 잘할 겁니다’ 하며 은근히 상대를 향해 견제와 항의의 목소리를 내보이는 것. 이는 어쩌면 부디 내 자율성과 내적 동기를 침해하지 말아 달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좋은 의도로 말한 건데 도대체 반응이 왜 저래?’ 하고 마냥 서운함을 호소하기 전에 말이다.
돕는 것 =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
‘타이밍’에 따라 맞는 말이 될 수도 있고 틀린 말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그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상대에게 도움을 주려던 선한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착각한다. 무릇 돕는다는 행위는 적극적으로 조언하고, 말을 건네고, 지식을 알려주고, 금전적/물질적 지원을 해주고, 행동 전략을 코칭해주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설사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일단 ‘잘 해보려는 의지’, 즉 ‘자율성’을 가진 상대에게 그런 형태의 적극적 도움을 주려는 것은 상대가 가진 의지에 대한 침략 행위나 다름이 없다. 그런 이유로 조언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라면 신뢰라는 이름으로, 선의라는 포장으로 은근히 노파심을 내비치려는 의도성을 경계해야 한다.
때로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를 믿고, 그의 ‘자율성’을 믿어, 그저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것이 최고의 조언이자 도움이 될 때도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부디 내버려 두자. 분명 어련히 알아서 잘할 것이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