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엑스레이] [88] 삶이 레몬을 줄 때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2025. 9. 16.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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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을 샀다. 레몬을 살 일은 잘 없다. 요리에 쓰는 일이 거의 없어서다. 이걸 산 이유는 물을 더 마시기 위해서다. 당뇨로 콜라를 끊기로 했다. 물맛은 콜라 맛을 이길 수가 없었다. 레몬을 넣으면 경쟁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건강에 좋다. 물병에 넣으면 집이 성수동 카페처럼 보이는 장점도 있다. 허영에도 좋다.

몇 달 전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다 감탄했다. 박보검 얼굴도 그렇지만 영어 제목이 기가 막혔다.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삶이 귤을 줄 때).’ 영어 관용구 ’When Life Gives You Lemons(삶이 레몬을 줄 때)‘ 제주도라는 배경에 맞게 바꾼 것이다. 이 관용구는 ‘삶이 당신에게 고난을 줄 때’라는 의미다.

물에 넣을 레몬을 자르다 이 제목이 한국에서는 오해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몬은 상큼함의 대명사다. 삶이 레몬을 주면 선물이다. 영어로 레몬은 고난의 대명사다. 시어서 그냥 먹을 수 없는 탓이다. 결함 많은 중고차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 차를 환불받는 소비자 보호법도 ‘레몬법’이다. 한국어로는 ‘탱자법’일 것이다.

단어는 물을 건너면 의미가 묘하게 달라진다. 자유라는 단어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 ‘Freedom’을 번역하려 쓴 한자어다. 이게 조선 개화기 때 그대로 들어왔다. 나는 이 단어를 사랑한다. 요즘은 잘 쓰질 못한다. 미국인에게 ‘Freedom’은 좌우를 떠난 근본 가치다. 지긋지긋한 총기를 단박에 금지하지 못하는 것은 자유 때문이다. 반대가 있어도 동성혼을 밀어붙이는 것도 자유 덕분이다. 한국에서 자유는 한쪽이 지나치게 남용하며 독점하는 단어가 됐다.

명동에 갔다가 이 단어가 있는 피켓들을 보고 슬퍼졌다. 나는 언제쯤 자유라는 단어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의식적 자유를 얻게 될까. 어쨌든 레몬은 졌다. 콜라에 레몬을 넣으면 더 맛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탓이다. 삶이 레몬을 줬는데 당 수치는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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