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와 대한상공회의소 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가운데 대한상의가 외부 통계 인용 오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대대적인 조직쇄신에 착수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공개비판에 이어 경제부총리, 산업통상부 장관, 더불어민주당까지 잇따라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그간 재계를 대표해 정부와 소통해온 대한상의의 위상과 역할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9일 정치권과 재계에 따르면 최근 정부는 대한상의가 배포한 '고액자산가 해외유출' 관련 통계를 사실상 허위·왜곡정보로 규정하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 대한상의는 외부 컨설팅 업체의 자료를 인용해 상속세 부담으로 국내 부유층 2400명이 해외로 떠난다는 내용이 담긴 보도자료를 냈다가 논란이 일자 사과문을 발표했다. 충분한 검증 없이 통계를 인용해 혼선을 초래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정부의 대응 수위는 이례적으로 높다. 민주당은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를 가짜뉴스로 규정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산업부 차원의 감사 착수와 함께 작성·배포 경위를 조사하고 필요할 경우 행정조치까지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대한상의가 산업부 소관의 경제단체라는 점에서 사실상 관리·감독 대상 기관으로 다루겠다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재계에서는 이번 사안을 단순한 실수를 넘어 대한상의의 신뢰도와 대표성 문제로 보고 있다. 과거 정부와 재계 간 공식 소통창구는 전국경제인연합회였지만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정경유착 논란으로 신뢰와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됐고 정부 협의채널에서도 입지가 축소됐다. 이후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서 이 같은 공백을 대한상의가 메우면서 재계 대표단체의 무게추는 자연스럽게 대한상의로 이동했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최태원 회장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2021년 대한상의 회장에 취임한 후 최 회장은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사회적 가치, 지역 균형발전 등 정부의 정책 기조와 맞닿은 의제를 적극 제시하며 대한상의의 영향력을 확대해왔다. 대한상의가 정부의 정책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최 회장의 대외신뢰도가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흐름은 달라지고 있다. 이달 4일 청와대에서 열린 '청년 일자리와 지방투자 확대를 위한 기업 간담회'에서는 한국경제인협회(옛 전경련)가 기업 측 대표로 나섰다. 류진 한경협 회장이 5년간 약 270조원에 달하는 10대그룹의 지방투자와 고용확대 계획을 발표했고 대통령실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최 회장은 간담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경제단체 간 대표성 구도가 재조정되는 신호라는 해석도 나온다. 정부의 핵심 과제인 지방투자 확대, 청년고용 창출과 관련해 한경협이 전면에 나선 반면 대한상의는 통계 논란으로 정책신뢰도가 흔들린 상황이기 때문이다.
미국 출장 중 가짜뉴스 관련 사안을 보고받은 최 회장은 즉각 사무국을 강하게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은 "대한상의는 책임 있는 기관인 만큼 데이터를 면밀히 챙겼어야 했다"며 "향후 유사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달라"고 엄중히 지시했다. 이는 그간 최 회장이 쌓아온 정책 파트너로서의 신뢰도가 단 한 번의 통계 오류로 훼손된 데 대한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경제단체의 위상은 정부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참여 범위와 직결된다"며 "대한상의와 최 회장이 이번 일로 실추된 정책 파트너십을 얼마나 빨리 회복하느냐가 향후 재계 권력지형의 향방을 가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대한상의는 정부 감사와는 별개로 자체 조사를 실시해 이번 사안에 대한 책임소재를 명확히 규명하고 책임을 물을 방침이다.
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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