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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생소한 회사가 투자 유치를 받으면서 ‘천문학적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라는 뉴스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특히나 최근처럼 투자 시장이 경색된 시기엔 ‘어떻게 이 시기에 그 정도 기업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나’ 궁금해지죠.
요즘 유독 특정 업종에서 기업가치를 높게 인정받는 곳이 적잖게 보이는데요. 바로 ‘화장품’입니다.

CJ가 기업가치 1조 인정한 ‘이 회사’
최근 한 기업의 투자유치 소식을 듣고 적잖게 놀랐습니다. 모르실 분들은 모를 법한 ‘에이피알’(APR)이란 회사입니다.
이 회사가 지난 14일 낸 유상증자 공시를 보면요.

특정인을 꼽아 투자를 받는 제3자배정 증자 방식입니다. 투자 규모는 10억원으로 크지 않고, 새롭게 발행되는 주식도 7268주로 전체 발행주식(726만8110주) 대비 0.1%에 불과합니다.
사실 이 유상증자는 규모보단 ‘투자 주체’가 중요합니다.

CJ그룹 핵심 계열사 CJ ENM입니다. CJ ENM은 콘텐츠 제작과 미디어 플랫폼 사업을 하는 회사로 잘 알려졌지만, 산하 커머스 부문으로 ‘CJ 온스타일’을 운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투자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건 바로 ‘기업가치’입니다. CJ ENM은 신주를 인수하면서 주당 발행가액을 13만7600원으로 잡았습니다. 이 주당 가격을 전체 발행주식에 곱해보면요.
· 7,275,378주 × 137,600원 = 1.001,092.012.800원
숫자가 엄청 길죠? 무려 1조원을 넘는 액수입니다. 아직 인지도가 아주 높지 않은 이 회사가 국내 커머스 대기업으로부터 1조원 상당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은 겁니다.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신생 화장품 업체들
최근 화장품 쪽에서 기업가치를 높게 받은 기업은 비단 에이피알 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8일 코스닥에 상장한 ‘마녀공장’이란 회사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회사 또한 일반인들 가운데 아는 분들이 많진 않은데, 배우 손예진을 모델로 기용하며 ‘손예진 화장품’으로 유명해진 업체입니다.

지난해 매출 1018억원, 영업이익 245억원을 기록했고요. 공모 당시 기업가치로 2621억원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8일 상장 당일 상한가를 기록하는 등 주가가 오르며 현재 시가총액이 6486억원에 이르렀죠.

화장품 제조사는 아니지만 ‘화해’란 이름의 플랫폼을 운영하는 버드뷰도 기업공개를 앞두고 있습니다. ‘대신밸런스제14호스팩’이란 이름의 기업인수목적회사를 통해 우회 상장을 준비 중이죠.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 396억원, 영업손실 187억원을 기록했습니다. 그럼에도 버드뷰와 스팩 간 합병 후 시가총액은 1480억원으로 책정됐죠. 당장 적자지만 미래 성장성을 갖췄음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최근 신생 화장품 회사들이 기업가치를 높게 인정받는 모습은 꽤 비일비재한데요. 투자 관점에서 이 회사들이 왜 높게 평가받는지 한 번쯤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장품의 높은 이익율, 비밀은 바로 ‘매출원가’
잘 나가는 화장품 회사들은 왜 유독 기업가치가 높은 걸까요? 최근 가장 핫한 에이피알을 재무제표 관점에서 풀어봅시다.
먼저 에이피알의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 실적을 보면요.

이익률이 아주 높진 않지만 매출 규모와 성장세가 돋보입니다. 2020년부터 3년간 연평균 매출성장률 34.5%를 기록했고,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145억원에서 392억원으로 2.7배나 늘었죠. 이제 세워진 지 10년도 채 안 된 회사가 낸 실적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이피알의 비용 구조를 살펴보면요.

매출원가율, 즉 매출원가를 매출액으로 나눈 비율이 3년 평균으로 27%에 불과합니다. 쉽게 말해 제품을 만드는 데 쓰이는 비용이 전체 매출 대비 단 4분의 1 수준이란 겁니다.
이번 글의 주제인 ‘화장품 회사들의 마진율이 높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의류나 화장품을 제조해 파는 회사들은 대체로 재료비나 생산비가 높지 않습니다. 한 번 성공만 잘 하면 높은 수익성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죠.
실제로 화장품 업계 원가율이 낮은지 확인해봅시다. 에이피알의 원가율을 앞서 언급한 마녀공장, 국내 화장품 업계 최상위 기업인 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과 함께 비교해보면요.

에이피알이 유독 낮긴 하나, 나머지 3사 또한 공통적으로 상당히 낮은 게 확인됩니다. 그나마 원가율이 높은 LG생활건강이 44.1%인데 바로 직전해인 2021년은 3사와 비슷한 37.6%로 더 낮았습니다.
화장품 비즈니스에서 ‘낮은 원가율’은 기업가치를 높게 인정받을 수 있는 핵심 요소입니다. 다만 무작정 원가가 싸다고 회사가 잘 크는 건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성공한 신생 회사들은 어떻게 성장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요?
기업가치 1조 만든 ‘D2C’와 ‘마케팅’의 힘
다시 에이피알입니다. 이 회사는 매출원가율이 낮은 대신 판매관리비율이 60%대에 달하는데요. 그 요인은 무엇일까요?
2022년 연결재무제표 중 판매관리비에서 액수가 높은 항목들을 중심으로 시각화해보니 '명확한 숫자'가 하나 드러납니다..

광고선전비가 무려 45.8%나 됩니다. 2022년 기준 1156억원이나 쓰였죠. 광고선전비는 기업이 불특정다수에게 광고선전을 목적으로 쓰는 비용입니다.
에이피알의 광고선전비 지출이 큰 이유는 유명인을 통한 마케팅에 돈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사 화장품 브랜드인 ‘메디큐브’와 뷰티 디바이스 ‘에이지알’ 광고에 방송인 유재석과 배우 김희선을 등장시켰고요. 또다른 사업인 의류에선 ‘널디’의 모델로 가수 태연을 기용했습니다. 이를 통해 에이피알은 매출원가에 버금가는 돈을 광고선전비로 쓰고 있죠.
그렇다고 이 회사가 무작정 광고에만 의존한 건 아닙니다. 에이피알의 비용 계정 가운데 ‘판매수수료’와 ‘지급수수료’도 높은데, 여기에 그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 판매수수료 : 자사 상품을 파는 통로(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인플루언서 등)에 내는 수수료
· 지급수수료 : 결제 과정에서 금융기관에 내는 수수료
에이피알의 재무제표에서 이 두 비용이 높은 건 이 회사의 판매 방식, 즉 ‘D2C’에서 기인합니다. D2C는 ‘Direct to Consumer’의 약자로,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직접 물건을 파는 방식입니다. 중간 유통마진이 줄어드니 유통비용을 줄일 수 있죠.

물론 최초 고객을 끌어들이고 유지하며 리텐션을 만드는 게 쉽진 않았을 겁니다. 에이피알은 그런 면에서 경쟁력을 갖췄고, 그게 바로 이 회사의 기업가치를 1조원 넘게 만든 핵심 역량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이런 전략은 2023년 들어 더 빛을 발하는 모습입니다.

매출 1222억원, 영업이익 232억원으로 영업이익률이 19%나 됩니다. 전년 대비론 매출이 무려 60%나 성장하며 실적이 완연히 성장 궤도로 접어든 게 확인됩니다.
에이피알은 고객 인지도가 높아진 만큼 중장기적으론 전체 비용에서 광고선전비 비중을 더 줄일 수 있다는 추정도 가능합니다. 또 이 회사의 새로운 먹거리인 뷰티 디바이스 쪽 성장성도 지켜 봐야겠죠.
LG생건·아모레, '내상' 회복하기도 바쁜데...
에이피알을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최근 두각을 보이는 화장품 회사들이 저마다 각자의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전통 화장품 강자들을 조금씩 위협하는 모습을 보이죠.
실제로 국내 화장품 업계 1~2위를 다투는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은 2021년 대비 2022년 실적이 부진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2021년 대비 2022년 매출이 15% 떨어졌고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각각 37.6%, 28.5% 급감합니다. LG생활건강 뷰티 부문은 매출 감소폭이 1.6%로 적었지만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무려 64.7%, 70.0%씩 떨어졌죠.
이들의 실적 하락은 상당부분 중국 판매량 감소 때문입니다. 중국 정부의 강력한 코로나19 정책도 있었지만, 실상은 면세점을 통한 따이공(중국 보따리상) 매출이 급감한 게 더 컸습니다.
그리고 그 타격은 LG생활건강 쪽이 더 컸던 게 사실입니다. 중국 매출이 한참 잘 나오던 2020년 4분기 대비 매출이 거의 반 토막 났습니다.

하나증권 박은정 연구원은 지난 1분기 실적 리포트에서 “중국에서의 경쟁 열위, 면세 채널의 수익성 우선 기조 등으로 화장품 부문의 매출은 4분기에나 비로소 성장 전환할 것으로 판단한다”라고 말합니다.
LG생활건강 대비 면세점 따이공 매출 비중이 낮긴 하나, 아모레퍼시픽도 사정이 안 좋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분기 마케팅비와 인건비, 감가상각비를 줄이며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기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두 회사 모두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중국인들의 한국 화장품 소비 확대를 기다려야 할 상황입니다. 이런 우려는 주가에 고스란히 반영됐죠.

양사 모두 주가가 고점 대비 3분의 1토막이 난 게 확인됩니다. 실적 상승세가 꺾였다는 게 확인될 때 투자자들이 얼마나 냉정하게 빠져나가는지가 나타나는 대목입니다.
화장품 시장 '춘추전국시대' 접어드나
국내 화장품 시장이 변화하는 모습을 기업가치와 재무제표 관점으로 이야기해봤습니다.
<세 줄 결론>1. 국내 신생 화장품 업체들이 고평가받고 있습니다. 마녀공장이 성공적으로 상장했고, 역시 상장을 준비 중인 에이피알은 기업가치 1조원을 넘은 것으로 평가받죠.2. 이들 업체는 업력이 얼마 안 됐음에도 높은 실적과 성장성을 보입니다. 그 배경엔 낮은 원가율과 함께 회사별 독특한 경쟁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3. 신생업체들의 성장은 최근 전통 화장품 회사들의 부진과 맞물려 눈길이 갑니다. 혹여 중장기적으로 국내 화장품 시장의 판이 뒤집힐지도 주목해야겠습니다.
최근 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이 해외에서 새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다만 신시장 개척엔 당연히 시간이 걸릴 텐데, 그 와중에 신생 화장품 업체들의 공세도 막아야 할 상황입니다.
결론적으로 최근 국내 화장품 산업은 ‘춘추전국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기존 업체들이 자금력을 바탕으로 ‘파이’를 지켜낼지, 신생업체가 몸집을 더 키우며 기존 업체들에 도전장을 내밀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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