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더] 4전 5기 日 총리 된 ‘비둘기파’ 이시바 | ‘성장보단 분배’ 이시바노믹스 시동… 아시아판 나토 현실성 의문
“일본과 미국의 동맹 관계를 미국과 영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내 임무다. (중략) 아시아에 나토 같은 집단적 자위 체제가 존재하지 않고 상호 방위의 의무가 없어 전쟁이 발발하기 쉬운 상황이다.”
얼마 전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성향 싱크탱크 허드슨 연구소가 발행하는 신문에 실린 이시바 시게루(石破茂·67) 신임 일본 총리의 기고문 중 일부다. 그는 10월 1일 중의원(하원) 임시 회의와 참의원(상원) 본회의 투표를 거쳐 일본의 제102대 총리로 선출됐다.
이시바 총리는 기고문에서 “중국 등을 억제하기 위해 아시아판 나토를 창설하고 이 틀 안에서 미국의 핵무기를 공동 운용하는 핵 공유나 핵 반입도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일본 총리를 뽑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기 얼마 전에 쓴 글이지만 향후 일본 외교·안보 정책의 큰 줄기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이시바 총리는 앞서 9월 27일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의 임기 만료 및 재선 불출마로 치러진 자민당 신임 총재 선거 결선 투표에서 유효 투표 총 409표 가운데 215표를 획득해 당선됐다. 1차 투표에선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상(181표)에게 밀리며 2위에 그쳤다. 3위는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136표)이었다. 하지만, 1차 투표에서 과반을 차지한 후보가 없어, 1·2위만 놓고 치러진 자민당 의원 위주의 결선 투표에서 극적인 역전 승리를 만들었다.
NHK 등 일본의 주요 매체들은 “강경 우파 성향의 다카이치가 총재에 오르는 데 대한 당내 불안과 우려가 팽배해 이시바가 역전 승리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기시다 당시 총리는 투표 직전에 “다카이치는 나와 정책 방향이 다르다”며 “당원이 지지하는 인물에게 투표하겠다”고 발언해 막판에 사실상 이시바의 당선을 도왔다.
이시바 총리는 16년간에 걸친 ‘4전 5기’ 도전 끝에 일본 집권 자민당 총재에 오른 집념의 정치인이다. 과거 네 차례 총재 선거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자민당 내부에서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아 온 탓에 의원들의 지지 기반은 약한 편이다. 1993년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당시 불신임안에 찬성하고 탈당했다가 1997년 재입당하면서 자민당 내에서 ‘배신자’ 낙인이 찍혔다. 또 2009년 당시 아소 다로 총리에게 퇴진을 요구했던 것을 계기로 그와 정적이 됐다.
아베 신조 전 총리와도 오랫동안 대립각을 세웠다. 아베 정권 시절이던 2007년 자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패하자 ‘아베 퇴진’을 들고 나서기도 했다. 아베를 둘러싼 후원회인 ‘벚꽃을 보는 모임’이 후원금 스캔들에 휩싸일 때 ‘철저한 조사’를 요구한 것도 그였다.하지만 일본 국민 사이에서 이시바 총리는 ‘할 말은 하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국민 지지율이 높다. 좌우명 ‘와시토리후군(鷲鳥不群·독수리처럼 강한 새는 무리를 짓지 않는다)’도 그의 정치 행보와 닮았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거부… 역사 인식 온건
1957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돗토리현 지사가 된 부친 이시바 지로를 따라 유년시절을 돗토리현에서 보냈다. 게이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79년 미쓰이은행(현재 미쓰이스미토모은행)에 들어갔다. 1981년 부친 사망 이후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권유로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했고, 1986년 자민당 소속으로 당시 최연소인 29세의 나이에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인 2002년 방위청(현재 방위성) 장관으로 처음 내각에 들어가 안보 분야 등에서 전문성을 키웠다. 이후농림수산·지방창생담당상 등을 역임하며 풍부한 각료 경험을 쌓았다.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하지 않고,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를 지적하는 등 역사 인식은 비교적 온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7년 언론 인터뷰에서 이시바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이 납득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고 했고 2019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사태 때는 “우리나라(일본)가 패전 후 전쟁 책임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우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2011년 자민당 영토특위(영토에 관한 특명위원회) 위원장 재임 당시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명칭)의 날’ 제정을 추진했다.
이시바 총리는 자타 공인 철도와 ‘카레’ 마니아다. 도쿄와 지역구를 오갈 때 비행기 대신 침대 열차를 즐겨 이용한다. 대학 시절에는 4년 내내 카레를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집에도 전투기 모형 등을 전시하는 ‘밀리터리 덕후’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미·일지위협정의 개정과 아시아판 나토 창설 등 방위력 강화에 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등 주변국은 물론, 미국과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아시아판 나토 정책의 경우 미· 중 대립에 말려 드는 것을 싫어하는 나라가 동남아시아 등 많아 얼마나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이시바 총리는 또 미국과 미국령 괌에 자위대 훈련 기지를 마련해 양국의 평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일지위협정은 체결로부터 64년간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다. 무리하게 개정을 추진하면 미·일 관계 악화의 불씨가 될 위험도 있다.
“금리 올릴 환경 아냐” 발언에 엔화 급락
아베 전 총리의 오랜 정적답게 경제정책은 ‘아베노믹스’와 결이 많이 다를 것으로 보인다. 아베노믹스가 ‘세 개의 화살’로 대담한 통화정책, 기동적 재정 정책, 거시적 구조 개혁을 핵심으로 뒀다면, 이시바노믹스는 △금리 인상 기조를 통한 물가 안정 △임금 인상으로 디플레이션 탈피 △노동 개혁으로 비정규직 해소 등을 축으로 삼고 있다. 이시바 총리는 이와 관련해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경제에서 확실히 벗어나도록 돕고,자산 운용 입국 정책을 계승 발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에 부담이 되지만 연금 소득자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공급망 복원·유지 측면에서 일본 기업의 리쇼어링(해외 진출 기업의 국내 유턴)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하지만 그의 경제 운용 기조가 곧바로 현실화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시바 총리는 취임 후 처음으로 10월 2일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우에다 가즈오 총재와 만난 뒤 취재진에게 “개인적으로 추가 금리 인상을 할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엔화 급락세로 이어졌다.
이시바노믹스의 성공을 자신하기 쉽지 않은 상황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임 기시다 총리도 2021년 자민당 총재 선거 과정에서 ‘분배 없이 성장은 없다’며 금융 소득 과세 재검토 등을 주장했지만, 취임 이후에는 분배 중심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당내 세력이 크지 않은 데다 내각 지지율이 낮은 것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10월 1일 출범한 이시바 내각 지지율은 51%에 그쳤다. 보수 성향 일본 최대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이 10월 1~2일 18세 이상 유권자 109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이시바 내각의 지지율은 9월 13~15일 진행된 조사에서 집계된 전임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가 이끌던 내각 지지율(25%)보다는 높다. 하지만 역대 정부의 출범 직후 지지율과 비교하면 낮다. 2009년 9월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지지율이 75%였고 2020년 9월 스가 요시히데 내각 지지율은 74%였다. 기시다 정권 출범 당시 내각 지지율은 56%로 이시바 내각보다 5%포인트 높았다. 이시바 총리는 10월 9일 중의원을 조기 해산하고 10월 27일에 총선거를 치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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