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팬알기] ⑪베어스 역대 타격왕 타이틀 도전사에 관하여

『타격에서 OB가 우세하다는 것은 팀타율이 2할8푼3리로 삼성(2할6푼9리)을 능가하고 있는 것 외에도 타격 30걸 중 2위의 윤동균(0.342)을 비롯, 4위의 신경식(0.334), 8위의 김우열(0.310), 10위의 구천서(0.307), 24위의 양세종(0.269), 29위의 유지훤(0.257) 등 6명이 끼여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982년 10월 5일 조선일보>
위 기사는 KBO 출범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를 전망하면서 베어스의 타격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윤동균이 원년 타격 2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년 타격왕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MBC 청룡의 감독 겸 선수 백인천. 그해 0.412의 타율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불멸의 4할 타율을 달성했다. 윤동균은 0.342의 고타율을 작성하고도 일본프로야구 타격왕 출신의 KBO 입성으로 초대 타격왕에 오르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는 앞으로 베어스가 개인 타이틀 부문에서 타격왕을 배출하기까지 힘든 여정을 겪는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야구는 기록의 경기다. [베팬알기-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기록 이야기]는 지난주 최다안타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베어스 구단의 역대 타격왕과 타격왕 도전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원년 타격 2인자 윤동균을 아십니까
윤동균은 1982년 KBO 공식 개막전에서 6개 구단 선수단을 대표해 선서를 한 인물이다. 백인천(1943년 11월 27일생)은 MBC 감독 겸 선수로 등록된 상황. 순수 선수 중에서는 윤동균이 최연장자였기에 역사적인 선서를 하는 영광을 안았다. OB 팀 동료였던 김우열이 학창 시절 1년 선배였지만, 호적상으로 윤동균이 1949년 7월 2일생으로 김우열(1949년 9월 9일생)보다 앞섰다.
당시엔 서른 살이면 이미 은퇴를 하고도 남을 나이. 만 33세의 윤동균도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현역 연장에 도전했다(요즘으로 치면 만 43세쯤에 프로야구에 뛰어든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데 윤동균은 나이가 무색하게 원년부터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전기리그를 마친 상황에서 0.372의 타율로 MBC 이종도와 공동 2위에 오르더니 후기리그를 포함해 정규시즌 최종 타율 0.342로 단독 2위를 차지했다.

‘넘사벽(넘지 못할 4차원의 벽)’이 있었다. 전기리그에서 0.403을 기록한 백인천이 후기리그에서 더 힘을 내면서 시즌 타율 0.412로 마감했다.
백인천은 일본프로야구에서 타격왕(1975년 퍼시픽리그)을 차지한 해외파 출신. 윤동균의 타율 0.342는 원년에 순수 국내파 선수 중 최고였지만, 백인천과는 무려 7푼 차이가 났다. 스포츠에서는 1등만 기억되는 법. 그래서 KBO리그 출범 첫해 윤동균이 타격 2위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윤동균은 동대문상고(현 청원고) 시절엔 좌완투수로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고, 실업야구 시절엔 타자로 활약하며 1978년 대통령배실업리그에서 타격왕을 차지하는 등 각종 타격상을 휩쓸었다.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나가서도 1975년 아시아선수권대회와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한국야구 사상 최초 세계대회 우승)에서 타격왕에 오르며 명성을 떨쳤다.
윤동균으로서는 불운이라면 불운. 그 이후 타격왕의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백인천만 아니었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KBO 초대 타격왕이 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OB 시절 타격왕 전무…좀처럼 닿지 않는 인연
전문의 기사처럼 OB는 원년에 타격 10위 안에 4명(2위 윤동균, 4위 신경식, 8위 김우열, 10위 구천서)을 배출했다.
투수 박철순이 3관왕(다승, 평균자책점, 승률)과 MVP를 수상하고,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기에 남부러울 게 없는 OB였다. 타격 부문에서 윤동균이 타율 2위로 밀려나면서 개인 타이틀홀더를 내놓지 못했지만 머지 않아 타격왕도 배출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다른 부문은 몰라도 타격왕만큼은 베어스와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다. OB 베어스 시대에 타격왕은 단 1명도 없었다. 타격 2위를 한 선수도 1982년 윤동균 이후 1985년 박종훈밖에 없었다.

1985년 박종훈은 허리 부상 후유증으로 낙마한 케이스다. 그해 시즌 중반까지 4할대의 고공 타율을 유지하며 타격 1위를 달렸으나 7월 24일 MBC 투수 오영일의 투구에 허리를 맞은 뒤로 극심한 허리 통증에서 시달렸다. 그때부터 타격도 내리막길이었다. 그해 삼성 장효조(0.370)에게 1위 자리를 넘겨주고 0.342의 타율로 2위로 마감하고 말았다.
허리 통증은 고질이 됐다. 그 이후 풀타임을 소화할 수 없었고, 그의 야구인생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신인왕을 차지한 1983년부터 3년 연속 3할대 타율을 올리던 그는 그 이후 한 번도 3할 타율에 진입하지 못했다. 결국 1989년 프로 7년 만에 은퇴를 선택해야만 했다.
OB라는 팀명을 사용한 1998년까지 타격왕은커녕 더 이상 타격 2위도 나타나지 않았다. 타격왕은 그야말로 남의 일이었다. 1993년 최다안타왕 김형석도 그해 타율(0.306) 부문 4위였고, 1995년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한 김상호는 타율이 0.272였다. 1998년 홈런왕과 타점왕에 오른 우즈도 타율 0.304로 9위였다.

◆2000년 1리 차 눈물 김동주, 2003년 구단 최초 타격왕 등극
2위 징크스는 두산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2000년 김동주가 가장 아쉬웠다. 그해 타율 0.339(469타수 159안타)를 기록했는데 현대 박종호가 0.340(441타수 150안타)으로 타격왕에 올랐기 때문이다. 단 1리 차이였다. 박종호는 스위치히터로서 최초이자 유일한 타격왕으로 지금까지 이름을 남겨놓고 있다.
그해엔 타격 3위 브리또(SK·0.338), 4위 송지만(한화·0.338), 5위 데이비스(한화·0.334)까지 촘촘한 경쟁을 펼쳤다. 1위와 5위가 불과 6리 차이에 불과했다.
2001년 두산 유니폼을 입고 있던 심재학도 0.344의 생애 최고 타율을 기록했지만 LG 줄무의 유니폼을 입은 양준혁(0.355)에 밀려 그해 2인자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다 마침내 2003년 베어스의 타격왕 숙원이 풀렸다. 2000년 1리 차이로 눈물을 삼켰던 김동주가 주인공이었다.
김동주는 그해 타율 0.342(401타수 137안타)를 기록하면서 전 동료이자 동기였던 현대 심정수(0.335)를 7리 차이로 따돌리고 정상에 올랐다. 베어스 구단 창단 이후 23시즌 만에 첫 타격왕을 배출하는 순간이었다. 두산 안경현도 타격왕 경쟁을 벌이면서 3위(0.333)로 마감했던 시즌이었다.


◆2008년 김현수-홍성흔 1~2위 석권
2008년에는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의 주역 두산 김현수(현 LG)가 0.357의 높은 타율로 타격왕을 차지했다. 2003년의 김동주에 이어 베어스 구단 역사상 두 번째 타격왕. 아울러 지금까지 구단 역사상 마지막 타격왕으로 남아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해 타격 2위는 한솥밥을 먹던 팀 선배 홍성흔이었다는 사실이다. 0.331로 2위에 올랐다.
같은 팀에서 한 시즌 타격 1~2위가 나온 것은 구단 역사상 최초였다. KBO 역사에서는 3호. 종전 두 차례는 모두 삼성이 작성했다. 1987년 장효조(0.387)-이만수(0.344), 1993년 양준혁(0.341)-강기웅(0.325)이 역사를 쓴 바 있다.

한편 홍성흔은 롯데로 이적한 뒤에도 2009년과 2010년 2위에 그쳐 타격왕의 한을 풀지 못했다.
2009년엔 0.371의 고타율을 찍었지만 시즌 최종전 맞대결 경기에서 타석에나서지 않은 LG 박용택(0.372)에 1리 차이로 밀렸다. 홍성흔은 2010년에도 0.350의 고타율을 기록했지만 그해 타격 7관왕에 오른 팀 동료 이대호(타율 0.364)에게 왕관을 양보해야만 했다.
홍성흔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2년 연속 타격 2위를 찍은 선수도 없다.
그런데 홍성흔은 사상 최초로 팀을 바꿔가며 2년 연속 타격 2위를 하더니 한 발 더 나아가 사상 최초로 3년 연속 타격 2위라는 진기록(?)을 썼다. KBO 타격왕 경쟁 역사에서 가장 불운한 선수가 되고 말았다.

◆다시 시작된 베어스의 타격 2위 징크스
두산의 타격 2인자 징크스가 2003년 김동주와 2008년 김현수를 기점으로 해소되는가 했으나 달갑지 않게 2010년대 들어 재현되기 시작했다.
2017년 두산 소속의 박건우는 0.366의 놀라운 타율을 기록했지만 타격왕에 오르는 데 실패했다. 그해 KIA를 우승으로 이끈 김선빈이 0.370이라는 더 높은 타율을 작성했기 때문이었다.
박건우는 2009년 홍성흔(0.371)에 이어 KBO 역대 타격 2위 선수 중 두 번째 높은 타율을 기록한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2018년에는 양의지가 그랬다. 0.358의 고타율을 올렸지만 LG 유니폼을 입은 김현수(0.362)에 4리 차이로 2위에 그쳤다. 포수가 이 같은 타율을 기록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0.358은 KBO 역대 포수 시즌 타율 1위에 해당한다. 2009년 롯데 홍성흔(0.371)은 당시 포수가 아니라 주로 지명타자로 활약했다. 역대 2위는 1987년 삼성 이만수의 0.344다.

2019년에는 두산 외국인타자로 영입된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가 타격 2위라는 아픈 징크스를 이어갔다. 공교롭게도 그해 타격 1위는 NC로 이적한 양의지(0.354)였다. 양의지는 2018년 두산에서 맺혔던 타격왕의 한을 NC에서 풀었지만, 두산은 3년 연속 타격 2위를 배출(?)하는 비운을 맛봤다.
페르난데스는 그해 197안타, 2020년 199안타를 때리면서 외국인선수 최초로 최다안타 2연패 성공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베어스 역대 타격왕은 2명…타격 2위는 8명
다시 정리하자면 베어스 구단 역사상 소속 선수가 타격왕을 차지한 것은 2003년 김동주와 2008년 김현수 단 2번뿐이다.
드넓은 잠실구장을 사용하는 핸디캡을 딛고 홈런왕을 3명(1995년 김상호, 1998년 타이론 우즈, 2018년 김재환) 내놓은 것과 비교하면 타격왕과 유난히 인연이 약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개인 타이틀 중 지금까지 수상자를 단 1명도 배출하지 못한 장타율 부문도 있지만 말이다(장타율 이야기는 추후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대신 타격 2인자는 무려 8명(1982년 윤동균, 1985년 박종훈, 2000년 김동주, 2001년 심재학, 2008년 홍성흔, 2017년 박건우, 2018년 양의지, 2019년 페르난데스)이나 된다.
한편 타격왕과 상관없이 역대 베어스 소속 타자 중 단일시즌 최고 타율을 올린 선수는 2017년의 박건우(0.366)다. 이 부문 베어스 역대 2위는 2018년 양의지의 0.358이다.
베어스 소속으로 시즌 타율 0.340 이상 기록한 것은 이들을 포함해 역대 총 13차례 나왔다.

프로야구 선수가 개인 타이틀을 따내는 것은 개인의 능력과 기록이 우선적으로 작용하지만, 운이라는 요소도 많이 개입된다. 기록이 아무리 높아도 타격왕에 오르지 못하기도 하고, 다소 낮아도 타격왕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자가 누구냐에 따라 순위도 달라진다.
홍성흔처럼 3년 연속 타율 2위에 그친 것도 불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롯데로 이적한 2009년엔 KBO 역대 타격 2위 선수 중 가장 높은 타율 0.371을 기록했다. 어쩌면 이 또한 좀처럼 깨지기 힘든 기록일 수 있다.
한편 KBO 역대 타격왕 중 최저 타율은 1989년 빙그레 고원부(재일교포)가 작성한 0.327이다. 2위는 1986년 장효조의 0.329다.
1980년대는 ‘투고타저’의 흐름이 지속되던 시절. 1989년 리그 평균타율은 0.257, 1986년 리그 평균타율은 0.251이었다. 참고로 2024년은 극심한 ‘타고투저’ 시즌으로 리그 평균타율이 0.277이다.
어쩌면 타격왕은 하늘이 점지해 주는지 모른다. 인생이 그렇듯 줄을 잘 서는 것도 복이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