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영화 <노 머시:90분>은 '오직 데이터로만' 혐의의 유무를 판단하는 AI 사법 시스템이 적용된 미래 사회를 그려냈습니다. 영화 설정상 시점은 2029년.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닙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90분 안에 자신의 무죄를 AI 판사에게 입증하지 못하면 사형이 집행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의 주인공. AI 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통신 기록과 위치 정보 등 객관적인 데이터를 끌어모으는 장면들이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하루에도 수백 개씩 쏟아지는 법원 판결문 기사에 매번 달리는 댓글이 있습니다. 표현하는 방법은 각각 다르지만 'AI 판사가 빨리 도입되야 한다'는 취지의 댓글은 통상 '댓글 공감순'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합니다.
법원의 판결과 실제 시민들이 느끼는 판결의 공정성 사이 괴리감이 크다는 지적이 이어지는 가운데, 실제 AI 판사 도입은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재판지원 AI 시스템'을 시범 운영하고 있는 대법원 소속 법원행정처
◆ 재판 지원 나선 AI
최근 대법원 소속 사법행정기구인 법원행정처는 사법부 자체 AI 플랫폼을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재판지원 AI 시스템'을 시범 오픈했습니다. 모두 4단계로 추진되는 사업에서 7개월간 개발을 거쳐 시범 운영에 들어간 겁니다.
이번 시스템은 4단계 중 1단계인 '법률 정보 지능형 검색 및 리서치' 시스템으로, 일반 생성형 AI처럼 법률 지식이나 특정 사건의 법적 쟁점에 대해 질의하면, 유사도가 높은 판례와 관련 법령, 문헌 등을 종합적으로 활용해 요약 정리된 답변을 내놓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특히, 화면 한쪽에 답변에 참고한 자료 리스트가 나열돼 각 자료의 요약 설명을 볼 수 있고, 원문보기 버튼을 클릭해 링크를 타고 곧장 원문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존 전산에 입력된 대법원 판례와 2013년 이후 판결문 전체가 자료로 활용되며 그 밖에 각종 법령과 대법원 규칙, 결정례, 유권해석, 실무제요, 주석서 등도 사용됩니다. 이에 더해 앞으로 선고되는 판결문도 내부 시스템 등록 즉시 끌어와 활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가 궁금한 걸 여러 오픈 AI 시스템에 물어보듯, 판사들도 이렇게 생성형 AI와 대화를 통해 법률 정보를 검색하고 재판에 활용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법원은 이번에 시범 운영에 들어간 1단계 시스템에 대한 답변 정확도를 개선하고 체계를 고도화하는 한편, 접수한 각종 사건 기록을 분석해 정리하는 2단계 사업도 이르면 연내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2단계는 AI가 소장이나 준비서면, 답변서 같은 기록을 분석해 요지나 쟁점을 정리해주는 기능을 갖출 걸로 예상됩니다.
더 나아가 3, 4단계 사업이 완성되면 법관이 작성한 판결문 초안의 논리적 오류나 비문 여부를 점검하고, 그 밖에 송달 주소를 찾는 데 도움까지 줄 수 있을 걸로 기대됩니다.
다시 말해, 소장 접수부터 판결문 완성까지 재판의 전 과정에 AI 기술을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AI 도입으로 이미 변화가 시작된 법원
◆ 이미 시작된 변화
AI의 빠른 발전은 우리나라 사법부에 큰 변화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대법원은 올해 1월 사법부의 인공지능 정책을 전담할 보직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보직의 이름은 '사법인공지능심의관'입니다. 법원행정처는 사법정보화실 산하에 사법인공지능심의관을 신설하고 정보화기획심의관과 분장사무를 조정하게 됐습니다.
사법 AI 정책 수립에 관한 사법정보화실장 보좌 역할을 맡은 사법인공지능심의관은 AI·빅데이터 등 지능정보기술에 관한 검토, 재판과 사법행정제도 관련 개선사항 AI 시스템 개발 등의 업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앞서 지난해 4월에는 재판 업무에 AI 기술을 도입할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법원행정처장 자문기구로 사법부 인공지능위원회가 출범됐습니다. 그리고 이 인공지능위원회는 지난해 말 '인간 중심 AI를 통한 사법정의 구현'을 목표로 2030년까지 단계별 사법부 AI 로드맵을 내놨습니다.
올해까지 사법부 내 AI 기반을 구축하고 2028년까지 재판 데이터 표준화와 품질 고도화 등을 통해 AI를 구현하고 확산시키며, 2030년까지 고도화해 AI 활용을 안착시킨다는 방침입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영화 전면에 등장하는 AI 판사는 수사관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소 과한 설정 속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성능을 보입니다. 아직은 '인간'이 더 낫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 속 'AI 판사'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사법부에 등장하게 될까요? 이미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려진 모양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