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로병사의 열쇠를 쥔 ‘장내 세균’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은 효과 없어…김치·된장 등 발효식품이 유익균 성장 촉진
(시사저널=노진섭 의학전문기자)
다른 사람의 똥을 이식받은 13명의 암 환자가 있다. 면역항암제에 내성이 생겨 치료 효과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면역항암제 효과가 좋았던 사람의 대변을 이식받은 후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1명은 암 크기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5명은 암이 더 진행하지 않는 상태를 보였다. 치료제 내성 문제를 푼 열쇠는 대변 속 미생물이었다.
이를 세계 최초로 보고한 박숙련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이번에 발견한 면역항암제 유익균(프레보텔라 메르대 이뮤노액티스)과 사람의 면역세포인 T세포를 함께 배양한 결과 T세포에서 나오는 면역반응 물질(인터페론감마)이 유의미하게 증가했다. 종양 마우스 모델을 이용한 동물실험에서도 이 유익균과 면역항암제를 같이 적용했을 때 암 크기가 50% 이상 유의미하게 감소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사람 몸에 존재하는 미생물에 관한 연구는 세계적으로 활발하다. 러시아 미생물학자 일리야 메치니코프가 1907년 유산균과 장수의 연관성을 제시한 후 학계에서는 수많은 연구 결과가 쏟아졌다. 신체에 있는 미생물이 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반대로 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인간의 면역과 수명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한마디로 몸속 미생물은 인간 생로병사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질병은 장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말이 과학적으로 확인된 셈이다.
몸속 유익균과 유해균 균형이 관건
인간의 몸에는 세포 수보다 많은 미생물(세균·곰팡이·바이러스 등)이 산다. 수천 종의 미생물 약 100조 마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미생물총(마이크로바이옴)이라고 통칭한다. 이 가운데 약 80%는 대장과 소장에 몰려 있고 나머지는 피부·입·생식기 등에 흩어져 있다. 장에는 면역세포의 80%가 집중돼 있다.
양철수 한양대 분자생명과학과 교수는 "장은 단순히 음식을 소화·흡수·배설하는 통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거대한 면역체계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면 장은 뿌리와 같다.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잎·열매가 건강하고 풍성한 것처럼 우리 장이 건강해야 전체적인 건강도 유지할 수 있다. 그 장에 미생물이 몰려 있다. 인간 면역의 70%가 마이크로바이옴과 관련이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고 말했다.
대장에 가장 많은 미생물이 존재한다. 소장은 위장의 소화액 영향을 받아 세균이 적다. 대장 내부의 미생물은 대부분 박테리아다. 이 장내 세균은 크게 3가지(유익균·유해균·중간균)로 분류된다. 유익균(유산균 등)은 건강 유지에 도움을 주지만 유해균(병원성 대장균 등)은 병을 유발한다. 장내 세균의 60%를 차지하는 중간균(무독주 대장균 등)은 사람이 건강할 때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다가 유익균이 증가하면 유익균처럼 행동하고 유해균이 늘어나며 유해균을 돕는다. 나머지 40%는 유익균과 유해균이 각각 차지하는데 그 비율은 유아기에 형성된다.
인간은 태어날 때 엄마의 질과 피부와 접촉하면서 미생물을 받는다. 이후 자라면서 다양한 미생물을 흡수한다. 유아기에 흙장난을 하면서 자란 아이는 대체로 건강하지만, 너무 깨끗하게 자란 아이는 천식이나 아토피 같은 면역질환에 잘 걸린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모유를 먹는 아이와 분유를 먹는 아이의 마이크로바이옴 구성도 다르다. 이 시기에 장내 세균의 구성이 완성된다. 유익균이 많은 아이와 유해균이 많은 아이가 되는 것이다.
유해균을 모두 제거하면 더 건강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유해균이 있어야 면역이 형성되므로 유해균도 인간 생존에 필요하다. 이처럼 장내 세균은 일정한 비율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균형이 깨질 때 건강에 문제가 발생한다. 또 나이를 먹을수록 장내 세균 중 유익균은 감소한다. 박한수 광주과학기술원 의생명공학과 교수는 "노화와 항생제 노출 등으로 장내 유익균이 줄어든다. 그래서 프로바이오틱스와 같은 제품이 개발된 것"이라고 말했다.
유익균의 인공 배양이 풀어야 할 난제
프로바이오틱스는 유익균을 상품화한 것이다. 유익균을 외부에서 공급하면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개념으로 개발됐다. 프로바이오틱스가 유익균이지만, 외부에서 투여한다고 해서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의 효과가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다. 그 효과를 주장한 일부 연구는 질적 수준이 낮거나 제조사로부터 연구비를 받은 경우가 많아 신뢰하기도 어렵다.
사람이 심하게 오염된 음식을 먹으면 복통이 생기고 설사를 하지만 며칠 지나면 회복된다. 장내 세균이 균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외부에서 침입한 유해균의 증식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들어간 유익균도 마찬가지다. 한 번에 많은 양의 유익균을 먹으면 잠시 효과를 보이다가 장내 세균 균형은 본래 상태로 돌아간다. 외부에서 유입된 유익균은 장에서 증식하지 못하고 대부분 대변으로 배출된다. 그래서 장 질환 예방을 위해 프로바이오틱스를 처방하는 의사는 거의 없다.
건강을 위해 먹는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이 오히려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 외국에서는 매일 다량의 유산균을 먹은 후 패혈증이나 심장내막염 등으로 사망한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국내에서도 프로바이오틱스 제품 관련 이상 사례가 2009~17년 사이에 652건 보고됐다. 미국 하버드의대 연구팀은 미국의사협회저널(JAMA)에서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이 건강을 지켜준다는 것을 증명한 장기적인 임상 연구 결과는 없다. 살아있는 미생물이 효능이나 안전성에 대한 검증 없이 판매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을 제대로 만들려면 개인의 장내 세균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인공 배양이 어렵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김미경 국제암대학원대학교 암의생명과학과 교수는 "유익균이 건강에 도움이 되고, 질병 치료에 특정 균주가 효과를 높인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러나 어떤 균주를 사용할지, 어떤 형태로 투여할지, 균주를 하나 또는 여러 개 사용할지 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고 현재 연구가 진행 중이다.
따라서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으로 특정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장에는 산소가 없고 유익균은 산소가 필요 없는 세균이다. 이 유익균 대부분은 산소가 있는 체외에서 인공 배양되지 않는다. 대장암·췌장암·식도암 등 11개 암종과 관련이 있는 장내 유익균을 상품화하지 못하는 이유다. 시중에 나온 프로바이오틱스 건강기능식품의 효과에 대해서는 과학적 근거가 없고 가성비를 따져도 효율적이지 않다. 몇십만원짜리 프로바이오틱스 제품보다 몇천원짜리 채소나 과일을 먹는 편이 훨씬 우리 건강에 이롭다"고 강조했다.
"시래기 된장국은 최고의 유익균 식품"
유해균을 없앨 수도, 먹는 유익균 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으므로 개인의 장내 세균 균형을 깨뜨리지 않는 방법을 찾는 연구가 세계적으로 한창이다. 세계적인 의료센터인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은 2023년 마이크로바이옴과 건강의 관계를 발표하면서 "독성 물질·니코틴·알코올·항생제 등은 유익균이 싫어한다. 채소와 과일은 유익균이 좋아한다"고 소개한 바 있다.
이들 식품의 섬유소는 유익균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이다. 채소와 과일을 먹는 식습관은 유익균 성장을 촉진하고 유해균을 억제하는 방법이다. 박한수 교수는 "치료제와 특정 균주를 조합하니 치료에 더 효과적이라는 호주의 연구 결과가 있다. 그러나 섬유소가 적으면 효과가 없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은 유익균의 중요한 먹이인 섬유소"라고 소개했다.
이런 효과가 입증된 후 시중에는 섬유소로 만든 프리바이오틱스 제품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채소와 과일을 먹는 식습관과 프리바이오틱스 제품을 먹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 채소와 과일을 먹은 사람이 훨씬 건강하다는 것이 연구 결과로 확인된 바 있다. 채소와 과일에는 섬유소 외에 다른 영양소도 있어 프리바이오틱스 제품보다 건강 유지에 더 이롭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은 식사할 때 채소나 곡류 등을 통해 섬유소를 충분히 섭취한다. 게다가 채소와 과일은 프리바이오틱스 제품보다 훨씬 저렴하다. 프리바이오틱스 제품을 따로 먹을 이유가 없다.
불가리아나 일본 등의 세계적인 장수촌 사람들은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이나 프리바이오틱스 제품을 따로 먹지 않는다. 그럼에도 장수인의 장에는 유익균이 보통 사람보다 2~5배 많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장수촌을 연구했고 그들만의 공통된 식습관을 발견했다. 전통 발효식품을 오랜 기간 먹어온 것이다. 서양은 치즈나 요구르트, 동양은 된장이나 김치가 대표적인 발효식품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자주 먹는 김치는 유산균 덩어리다. 또 배추에는 섬유소도 풍부하다. 김치는 천연 프로바이오틱스이면서 천연 프리바이오틱스인 셈이다. 김치는 오래될수록 유산균이 사라지므로 묵은지보다 갓 담근 김치에 유산균이 풍부하다. 또 살균 처리를 했거나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첨가물을 넣은 마트 김치보다 집에서 담근 김치가 좋다.
또 된장은 누룩균이 풍부한 발효식품이다. 그래서 된장에는 끈적거림과 특유의 냄새가 있다. 된장에 시래기를 넣은 시래기 된장국은 그야말로 천연 신바이오틱스(유익균과 먹이를 혼합한 것)다. 양철수 교수는 "시래기 된장국은 한국인의 장내 마이크로바이옴 건강에 최고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시래기는 섬유소가 풍부해 유익균의 훌륭한 영양분이 된다. 김치나 된장 등을 열로 조리하면 유익균이 대부분 죽는다. 그래도 죽은 균과 그 균의 배설물은 장내 유익균의 훌륭한 먹이가 된다는 것이 연구로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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