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종을 앞둔 아버지는 병실 밖에서 기다리던 형제들을 두고 오직 막내인 나만을 손짓으로 가만히 불러내셨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희미하게 웅얼거리시던 아버지는 장롱 깊은 곳에 둔 작은 쇠상자를 찾아보라며 눈을 감으셨다.
장례를 마친 뒤 형들과 함께 시골집 안방을 찾은 나는 아버지의 손때 묻은 낡은 쇠상자를 드디어 꺼내게 되었다.

녹슨 열쇠로 상자를 열자 수십 년 전부터 아버지가 세심하게 모아둔 빛바랜 통장들과 통신 영수증들이 쏟아져 나왔다.
큰형과 둘째 형은 유산이라도 숨겨둔 줄 알고 기대감에 차서 옆으로 바짝 다가와 서류들을 황급히 헤집어 보았다.
하지만 통장의 잔고는 수십 원에 불과했고 그저 매달 일정하게 어디론가 송금된 오래된 기록만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낡은 서류 봉투 안에는 나의 어린 시절 입양 절차가 적힌 보육원 서류와 빛바랜 편지가 들어 있었다.
큰형제들이 낳은 자식이었던 나를 형편이 어려워 차마 거두지 못하자 아버지가 자신의 막내로 거두어 키우셨던 것이다.
매달 입금된 돈은 바로 어린 나를 낳고 일찍 세상을 떠난 형제들의 이름으로 들어간 작은 양육 지원금이었다.

형들은 상자 속 편지를 읽으며 아버지가 평생 말없이 짊어지셨던 가슴 아픈 비밀과 배려에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내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에 상처받을까 봐 임종 직전까지 차마 형제들에게조차 말을 꺼내지 못하셨다.
상자 맨 밑바닥에는 나를 진짜 막내아들로 키우며 느꼈던 감사함이 정갈한 글씨체로 적힌 편지가 살포시 놓여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남기신 마지막 편지를 가슴에 꼭 품은 채 묵묵히 서 계시던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형들은 내 손을 따뜻하게 잡으며 아버지가 남기신 뜻대로 우리는 변함없는 진짜 형제라며 어깨를 가만히 다독여주었다.
마당 구석에 쌓인 아버지의 낡은 유품들을 정리하던 시골집 마루에는 차가운 바람 대신 포근한 햇살만이 가득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