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엄마]열아홉 제 발로 찾아간 탄광…이름 석자 못쓰던 광부엄마의 삶은 詩가 됐다

(3)문해학교 출신 74세에 등단한 전옥화(삼척 도계)씨
19세에 탄광 찾아가 20년간 선탄부 취업…사남매 키워
은퇴 후 ‘살만하다’ 생각들 즈음 사고로 남편잃고 우울증
문해학교에서 한글 배우며 극복…지난 삶 시로 써내려가
가난 극복한 선탄부의 삶 담백하게 담아낸 탄광문학 진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언제냐고 묻는 질문에 시인 전옥화 씨는 망설임 없이 ‘지금’이라고 답했다. 신세희기자

삼척에서 활동 중인 늦깎이 시인 전옥화(77)씨. 그는 20년 경력의 여성광부 ‘선탄부’ 였다.

탄광문학계의 대표적 여성 문인으로 꼽히는 전씨의 시는 ‘광부엄마’의 삶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는 생활고로 학교 근처에 가보지 못하고 글도 배우지 못한 채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탄광에서 선탄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선탄부들이 광산에서 남편을 잃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탄광으로 흘러 들어왔다면 그는 지독한 가난 탓에 스스로 탄광을 찾았다.

20년을 꼬박 탄광에서 일하며 사남매를 키워낸 전 씨. 일흔을 넘겨 배운 한글로 그는 광부엄마의 삶을 시로 써내려갔고, 일흔넷의 나이에 등단했다.
그의 시에는 모두가 가난했던 석탄의 시대, 엄마이자 아내, 광부의 삶이 담겨있다.

“내가 신은 장화 속에/땀방울인지 빗물인지 가득 고여/발 한번 옮길 때마다/철벅거리는 게 싫었지만/퇴근 시간이면 부서진/석탄 덩어리 몇 개 주어 담아/머리에 이고 아이들 품으로/돌아가는 게 엄마였기에 좋았다”(전옥화 作 ‘지독한 가난’)

■열아홉, 탄광에 들어가다=전옥화 씨를 선탄장으로 이끈 건 지독한 가난이었다. 탄광에서 남편을 잃고 광업소의 권유로 취직한 다른 선탄부들과 달리 전 씨는 제 발로 선탄장을 찾은 것이다. 선탄부는 탄광촌에서 여성이 구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일자리였다.

가난한 시골집 육남매의 둘째 딸로 태어난 전 씨. 시집가면 배 곯을 일은 없을 거라는 아버지의 말을 믿고 일찍 결혼했지만, 가난은 전 씨를 쫓아왔다. 결국 그는 첫째 딸을 낳고 석 달 후인 1965년, 삼척 도계 대방탄광을 찾아가 취직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9세였다.

전 씨는 “그 시절 탄광촌 여자들이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선탄장이 유일했다”며 “남편이 결혼 전에 석탄을 운반하는 탄차 조수였는데, 인맥을 있는 대로 동원해 겨우 선탄부 자리를 얻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탄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조차 없었던 1960년대. 전 씨는 갱 밖 난장에서 석탄에 섞인 돌을 골라냈다. 출산으로 망가진 몸이 채 회복되기도 전에 냉골 같은 바닥에 주저앉아 일했다. 둘째가 생겼을 때도 만삭까지 출근했다. 행여 일자리를 잃을까 아이가 100일이 지나기 무섭게 선탄장으로 돌아왔다. 유산의 아픔이 찾아왔을 때도 묵묵히 일터로 향했다. 지독한 가난 앞에 슬픔은 사치였다.

그는 “되돌아보면 마스크는커녕 변변한 작업복조차 없었던 시절이지만 당시에는 힘든지도 모르고 일했다”며 “학교를 못 다닌 것이 평생의 한이다 보니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모든 고단함이 씻겨 내려갔다”고 했다.

“가난 속에 살다 보니/꽃다운 내 청춘 모두 도둑 맞았네/여자의 아름다운 내 청춘/어디 가서 찾으리/눈물은 강이 되고, 한숨은 바람 되어/구시월 낙엽이 지면/낙엽이나 안고 춤이나 추리”(전옥화 作 ‘인생살이’)

선탄부 시인 전옥화씨가 그 시절 작업환경에 대해 설명하던 도중 코과 입을 가리고 있다. "되돌아보면 마스크는커녕 변변한 작업복조차 없었던 시절이지만 당시에는 힘든지도 모르고 일했다”고 했다. 신세희기자

■일흔, 연필을 잡다=전옥화 씨는 대방탄광에서 금화광업소로, 다시 삼마광업소로 일터를 옮기며 사남매를 키워냈다. 선탄부 은퇴 후에도 남편과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이들을 모두 키우고 가난에서 벗어난 환갑이 넘어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운명은 얄궂었다. 2013년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고단할테니 한숨 푹 자라’는 말을 남긴 채.

전씨는 “이제야 남편과 남들처럼 단풍놀이도 다닐 수 있게 됐는데, 허망하게 남편을 보내니 더 이상 삶의 이유가 없었다”며 “탄광을 오가며 어렵게 살았던 수십 년 동안에도 지치지 않았던 몸과 마음이 일순간에 무너져내렸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남편을 잃고 우울증에 빠진 전옥화 씨. 그를 우울의 수렁에서 건져 올린 건 ‘성인 문해학교’였다. 일흔이 돼서야 난생 처음 잡아본 연필.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책상에 앉아 한글을 익히는데 몰두했다. 당시 문해학교 교사였던 박군자 시인에게 시를 배우기 시작한 전 씨. 지나간 세월은 모두 시어가 됐다.

그는 “어린 시절, 친구들처럼 학교에 보내달라며 참 많이도 울었다”며 “항상 마음 한편에 배우지 못한 서러움이 있었는데, 시를 쓰고 있자면 지난 시절을 위로받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또래 친구들 책보 메고 학교에 갈 때/꽁보리밥 보래갯떡 삼베 보자기 싸서/새끼 꾸어 만든 주루막에 넣어지고/소 몰고 산으로 갔네/학교가는 친구들이 눈 앞에 아롱거려/땅바닥에 주저 앉아 흐느껴 울던 어린 시절”(전옥화 作 ‘어린시절’)

탄광문학계의 몇 안 되는 여성 문인인 시인 전옥화(77)씨. 열아홉의 나이로 선탄장에 들어간 전 씨는 20년을 꼬박 선탄부로 일하며 사남매를 키워냈다. 일흔을 넘겨 배운 한글로 그는 시를 써내려갔고, 일흔넷의 나이로 등단했다. 신세희기자

■일흔넷, 늦깎이 시인이 되다=2018년 전 씨는 첫 시집 ‘바람같이 지나간 세월’을 펴냈다. 문해학습자가 시집을 출간한 건 강원지역 최초였다. 2021년에는 대산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정식 등단했다. 그가 시를 쓴다는 소식을 믿지 못하던 자식들도 엄마의 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전씨는 “지금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고단한 시절이었지만 그 세월이 켜켜이 쌓여 시가 됐다”며 “제 이름 석자 못 쓰던 내가 자식들을 모두 키워내고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건 결국 탄광 덕분이었다”고 웃어보였다.

어느덧 손자들의 나이가 탄광에 들어서던 전 씨의 나이를 넘어섰다. 열아홉의 고운 손은 검게 부르튼지 오래였지만, 전 씨에게는 훈장 같은 세월이었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언제냐고 묻는 강원일보 취재진의 질문에 전 씨는 망설임 없이 ‘지금’이라고 답했다.

그는 “큰딸이 등단을 축하한다며 꽃다발을 한아름 안겨주는데 지난 세월이 아득하더라”며 “긴 세월, 이제야 자려고 누우면 걱정이 없는 걸 보니 지금이 가장 좋은 세월인 듯하다”고 답했다.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 시를 쓰고 싶다. 힘들게 살아온 과거보다 이제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좋은 것들을 보면서 시를 가장 먼저 생각하며 살고 싶다”는 전 시인의 말 처럼 광부엄마의 지난 삶은 시가 됐다.

김오미기자 omme@kwnews.co.kr최기영기자 answer07@kwnews.co.kr김태훈기자 thkim30@kwnews.co.kr최두원기자 onedoo@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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