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만들다 자폭한 EU, 결국 미국의 AI 식민지로 전락하나?

[ 최수정의 유럽외교전]

[요약]

브뤼셀 효과의 한계와 사전 규제의 부작용:
유럽은 자신들의 규제가 세계 표준이 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AI법'을 제정했으나, 자국 산업의 기반 없이 기술 자체를 옭아맨 도덕적 결벽주의 규제는 결국 역내 스타트업의 자생력과 혁신 모멘텀을 마비시키는 장벽이 되었다.

패권 없는 규제의 실패와 16개월 유예: 미국의 자율적 사후 규제와 달리 시장의 성장을 가로막은 유럽의 사전 예방적 접근은 처참한 산업적 후퇴를 낳았고, 이 치명적인 위기를 감지한 EU 집행위원회는 결국 2026년 5월 7일 AI법의 본격 적용을 16개월 연기하며 관료주의의 헛발질을 자인했다.

기술 헤게모니 상실과 소버린 AI의 당위성: 거대언어모델(LLM) 시장이 미·중 빅테크에 독점된 상황에서 독자적인 AI 주권을 구축하지 못하면 국가의 공공 기능과 정체성마저 종속되므로, 자국 산업을 보호할 ‘소버린 AI’ 방어선 구축과 중간지대 국가 간의 전략적 연대가 시급하다.

브뤼셀 효과의 환상과 'AI법' 괴물

독일에는 AI 시대를 선도할 독일 '토종' 범용 AI 대표주자가 없다. 이것은 유독 독일 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 전체의 문제로 지적될 정도다. 그만큼 AI 산업 시대에 유럽의 기술 혁신 속도는 눈에 띄게 둔화되고 있다. 그 원인의 중심에는 바로 유럽연합(EU)가 만들어낸 법률 괴물, 'AI법(AI Act)'이 있다.

이 AI법은 2021년 EU 집행위원회에서 초안이 만들어져 2024년 3월 공식 법안으로 채택되었다. 당시 법안의 취지를 간단히 살펴보면 "AI법을 통해 유럽은 신뢰, 투명성, 책임성이 강조된 유럽의 혁신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 과연 그럴까?

구글 제미나이 생성 이미지.

유럽의 디지털 산업과 관련된 중요한 법안은 크게 '개인정보보호법(GDPR)'과 'AI법'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이 2018년 본격적으로 실시된 후, EU시장에 진출하는 모든 디지털 기업들은 이 법안을 엄격히 지키도록 강제되었다.

인구 4억 5천만 명을 가진 최대 단일 소비 시장이 요구하는 이 프라이버시 규정은 글로벌 시장에서도 표준으로 통용돼, 일명 '브뤼셀 효과(Brussels Effect)'를 낳았다. '브뤼셀 효과'란 EU가 제정한 법률과 규제가 강력한 시장 영향력으로 글로벌 기업들에 강제되면서, 결과적으로 전 세계의 표준이 되는 현상을 말한다. 유럽이 규제를 만들면 전 세계가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자신감을 드러낸 표현이었다.

이런 자신감에 근거하여, 다가올 AI 시대에 기술과 정보를 다루는 방식을 선제적으로 규범화하고자 시도한 법이 바로 'AI법'이다. 지난 2024년 발효되어 2025~2026년 단계적인 적용 과정에 와 있다. 이 규범 또한 글로벌 표준으로 채택하게 만들어 '테크(Tech) 패권'의 규범만큼은 EU가 선도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도덕적 결벽주의'가 초래한 '자해적 규제'

그러나 개인정보보호법(GDPR)이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을 다루고 있다면, 'AI법'은 테크 패권의 핵심인 '기술' 자체에 대한 규제를 담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법은 본래의 목적인 신뢰와 투명성, 그리고 책임 있는 기술 혁신에 기여하기보다 유럽 내 AI 스타트업의 자생을 막는 핵심 장벽이 되고 있다.

AI법은 범용 AI를 개발할 경우 유럽 저작권법을 철저히 준수해야 하며, 학습 데이터의 상세한 요약본을 공개하도록 강제한다. 따라서 미국의 빅테크들과 달리 자금이 부족한 유럽 스타트업들에게 '저작권료 지급'이라는 넘기 어려운 장벽을 만들었다.

AI 성능의 90%가 데이터 학습량에 따른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AI 산업 자체의 태동을 막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학습 데이터를 공개하도록 하는 것은 스타트업의 핵심 기술이자 영업 비밀을 노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유럽 스타트업들은 이 법안의 초기 단계부터 강력한 비판을 제기해 왔다.

유럽의 대표적인 범용 AI 기업으로는 프랑스의 '미스트랄(Mistral)'과 독일의 '알레프 알파(Aleph Alpha)'가 있다. 이들은 AI법 도입 초기부터 연합하여, 자신들이 주력하는 범용 AI 모델이 AI법 내의 '고위험(High-Risk)' 등급에서 제외되도록 로비를 벌였다. 결국 규제와 의무 사항을 대폭 면제받는 혜택을 받아냈다.

그러나 다른 후발 주자들은 AI법이 요구하는 기술 장벽을 그대로 감내해야 했다. 때문에 AI법이 역내 스타트업을 양성할 환경을 조성해 주는 법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차라리 소비자인 시민의 안전과 기본권에만 과도하게 초점이 맞춰진 규범에 가깝다.

미래 기술에 대한 선제적 규제를 기본 틀로 하는 이 법이 EU 시장의 미래를 어디로 이끌지를 생각해보면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미국이 AI 기업들에 대해 취하고 있는 규제 방식과 비교할 때, 더더욱 그 산업적 혁신 모멘텀을 보장하지 못하는 규범이라는 생각으로 기울어진다.

실제 프랑스의 미스트랄이나 독일의 알레프 알파는 미국의 AI 빅테크들과의 범용 거대언어모델(LLM) 경쟁에서 승산이 없음을 인정하고 자국 기업 및 정부를 대상으로 한 '소버린 AI(Sovereign AI)' 플랫폼 구축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결국 범용 AI 검색엔진 시장에서 유럽은 미국 빅테크 기업들에게 사용료를 지불하는 '디지털 소비처'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패권 없는 규제의 한계

EU의 AI법은 위험 기반 분류를 통한 ‘사전 예방적 규제’를 기본적인 접근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는 반면, 미국은 시장 자율성과 기존 법을 활용한 ‘사후 규제’의 접근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중국은 국가 안보, 사회주의 가치 유지 및 체제 수호를 목적으로 기술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방식을 취한다.

미국과 EU의 AI 산업 접근법을 비교할 때, EU는 AI를 위험 수준(허용 불가, 고위험, 제한적, 최소 위험)에 따라 분류하고 사전 검증, 위험 평가, 투명성 의무 등의 규제를 매우 세세하게 부과하고 있다. 혁신보다 기본권과 안전 보호를 우선적으로 채택한 결과이다.

미중간 AI전쟁이 뜨겁게 펼쳐지고 있다. 출처: medium.com

그런데 여기서 EU가 자처한 테크 패권에 대한 '자해적 조치'가 극명히 드러난다. EU는 자국 AI 산업의 발아 자체를 막아버리는 우를 범하면서, 시민사회를 보호하겠다는 '도덕적 결벽주의'를 내세운 것이다.

미국의 사후 규제주의가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범용 AI 시장을 석권하게 될 경우, 미국 빅테크들이 EU의 AI법을 글로벌 표준으로 채택할 리 만무하다. 기술 패권이 없는 상태에서 규제는 결국 세계 표준이 아니라, 그 소비 시장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로컬 룰’로 끝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EU의 AI법이 EU 시장을 넘어 역외 시장에서 거래되는 EU 시민의 정보에 대해 일일이 불법성을 적발하고 벌금을 물리기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히려 EU 시장에 진출하는 빅테크들이 EU의 요구에 맞춘 저사양 AI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아예 서비스 출시를 연기하는 등 유럽 시장 자체를 고립시킬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러한 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올해(2026년) 5월 7일 EU 집행위원회는 AI법의 본격적인 적용을 16개월 연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산업 경쟁력 자체만 보고 평가한다면, EU의 AI법은 디지털 산업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관료들의 치명적인 '헛발질'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게임오버 직전...생존을 위한 ‘소버린 AI’ 연대

구글 딥마인드의 공동 창업자인 무스타파 슐레이만이 그의 저서 《AI 경제학(The Coming Wave)》에서 언급한 내용 중, EU를 비롯한 전 세계 국가들이 가장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대목은 'AI 기술이 가져올 지식의 평준화와 국가 통제력 상실의 위기'에 대한 부분이다.

기술이 국가의 공공 기능을 무력화시킬 때, 독자적인 AI 주권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빅테크와 그 빅테크를 보유한 국가의 '디지털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유럽 시민들의 데이터 또한 결국 미국 빅테크의 알고리즘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고, 유럽은 그들의 단순 소비처가 될 것이다.

종국적으로는 EU의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마저 빠르게 소멸하여 미국화될 것이다. 유럽이 지금 미국에게 당하고 있는 '안보 인질극'이 '디지털 기술 인질극'으로 번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사실상 게임오버 상황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아닌 국가들이 지금이라도 AI 산업 육성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국가의 존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범용 AI 서비스가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천문학적인 투자를 통해 이미 경쟁이 불가능한 상태라 할지라도, 모든 국가가 가진 자국만의 독특한 공공서비스와 로컬 산업을 지키기 위한 '소버린 AI(Sovereign AI)' 방어를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AI는 이제 모든 산업의 게임체인저로 인식되고 있다. 출처: dw.de

EU의 AI법이 던진 디지털 산업의 '선제적 위기 규제' 방식의 문제점을 반면교사 삼아, 로컬 AI 산업의 보호와 육성을 위해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또한 미국과 중국이라는 AI 빅테크의 거대한 파도에 대응하기 위해 유사한 처지에 놓인 국가들 간의 '중간지대적 협력 관계' 구축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독자 방어가 어려우면 연합을 형성하여 대항해야 하는 것이다.

일론 머스크(Elon Musk)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AI가 인간의 지적 노동을 완전히 초과하는 시점을 계산하면서, 앞으로 2년에서 5년(2028~2030년 이전)의 시간이 개인과 국가의 생존을 가를 '골든타임'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미국 및 EU 등도 2030년을 마지노선으로 보고 있다. 그 사이 산업의 지형과 국가의 통제 방식은 모두 달라질 것이다. 앞으로 국가가 어떻게 존재할지를 고민할 때, 유엔에 공식 등록된 193개의 국가 중 자국민의 생존과 안전을 실질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주권국가가 몇이나 남을지 알 수 없다. '디지털 식민지'의 시대가 멀지 않았다.


※ 최수정 칼럼니스트는 독일 함부르크대학 법학박사과정에서 해양안보법과 사이버안보법을 전공하고 있다. 한국 해양수산개발원에서 11년간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했다. 해양환경, 국제수산규범, 독도영토분쟁을 포함한 유엔해양법에 관한 연구를 해왔다. 나토(NATO) 사이버센터 방문연구자, 나토 해양안보센터 패널리스트, 나토 국방대학원 리서치 펠로우 과정을 모두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