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 남자 사브르 간판 오상욱(대전광역시청)이 19일(현지시간) 인도 델리에서 열린 2026 아시아선수권대회 개인전 결승에서 중국의 뤄샤오퉁을 15-8로 제압하고 2년 만에 아시아선수권 개인전 정상을 탈환했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이 우승이 자신의 공인 장비 없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대표팀의 장비 창고가 있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이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촉발된 시위로 봉쇄되면서, 오상욱을 포함한 선수단 전체가 칼과 도복을 제때 챙기지 못한 채 대회에 나섰다. 빌린 장비로 우승까지 갔다는 이례적인 결과가 이번 대회 성적을 단순한 메달 이상의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이번 사태의 출발점은 경기장이 아니라 협회 사무실이었다. 대한펜싱협회 사무국과 국가대표 장비 창고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핸드볼경기장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6·3 지방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시민 단체와 시위대가 이 일대를 점거하면서 핸드볼경기장 출입이 전면 막혔다. 협회 행정 업무가 마비됐고, 그 여파는 곧바로 대회를 앞둔 선수단에게 번졌다. 국가대표 공인 펜싱 블레이드와 도복, 보호장구가 모두 이 창고에 보관돼 있었던 탓에 선수들은 자신의 장비를 반출하지 못한 채 출국 일정을 맞아야 했다.
오상욱은 2023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2관왕을 차지한 바 있고, 2024년 아시아선수권 개인전에서도 정상에 오른 경력이 있다. 다만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그간의 성적과 무관하게 가장 기본적인 준비조차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결국 오상욱을 비롯한 대표팀 선수들은 출국 직전 대전광역시청, 대구광역시청 등 소속팀에 연락해 훈련용으로 남겨둔 여분의 블레이드를 긴급 공수했고, 일부는 동료에게 장비를 빌리거나 사비를 들여 장비를 조달했다. 사브르는 칼끝의 미세한 감각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종목이어서, 손에 익지 않은 급조 장비를 들고 출전하는 것 자체가 경기 시작 전부터 짊어진 변수였다.
오상욱은 32강전에서 홈 이점을 가진 카란 싱(인도)을 15-11로 제압하며 대회를 시작했다. 16강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베크 아브다조프를 15-6으로 가볍게 돌려세웠고, 8강에서는 숙적으로 꼽히는 일본의 고쿠보 마오를 15-12로 꺾고 4강에 안착했다.

준결승 상대는 같은 대표팀 후배이자 전년도 대회 디펜딩 챔피언인 도경동(대구광역시청)이었다. 도경동 역시 협회 마비 사태로 소속팀에서 장비를 급조해 출전한 처지였지만 4강까지 진격하며 저력을 보였다. 두 선수의 맞대결에서는 오상욱이 도경동을 15-9로 제압했다. 타이틀 방어에는 실패했지만 도경동은 동메달을 획득하며 2년 연속 아시아선수권 시상대에 올랐다.
결승전에서 오상욱은 뤄샤오퉁을 상대로 15-8 완파를 기록하며 경기를 끝냈다. 빌린 칼이라는 변수가 무색하게, 날카로운 플레슈(막고 찌르기)와 적극적인 공격을 앞세운 결과였다. 이 우승으로 오상욱은 2024년 대회 이후 2년 만에 아시아선수권 개인전 타이틀을 되찾았다. 한편 여자 플뢰레 개인전에서는 모별이(인천 중구청)가 한국 선수 중 가장 높은 순위인 7위에 이름을 올렸다. 오상욱과 도경동은 22일 열리는 단체전에 출전해 추가 금메달에 도전할 예정이며, 9월로 예정된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타이틀 방어를 앞두고 이번 대회를 전초전 성격으로 치렀다는 점도 함께 짚을 부분이다.
장비 미반출이라는 변수는 통상 경기력 저하로 이어지는 요인이지만, 이번 결과는 그 통념을 뒤집었다. 오상욱이 결승까지 가는 동안 내준 점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점, 그리고 도경동 역시 같은 악조건 속에서 4강까지 진출했다는 점을 함께 보면, 이번 대회 한국 사브르의 성과는 개인의 기량이 장비 문제를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읽을 수 있다. 다만 이는 일회성 사례로 안심할 일은 아니다. 협회 사무실과 장비 창고가 외부 요인 하나로 통째로 마비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번에 처음으로 드러났고, 이는 다음 대회에서도 같은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9월 아시안게임 타이틀 방어를 앞둔 시점에서 이번 대회가 갖는 의미는 더 크다. 전초전에서 장비 문제와 무관하게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였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 신호지만, 더 큰 무대에서 똑같은 행정 마비가 반복된다면 선수 개인의 적응력에만 의존하기는 어렵다. 현장에서 최신원 대한펜싱협회장이 직접 인도를 찾아 선수단을 다독인 점은 행정 공백을 보완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장비 관리 체계의 안정성 문제는 이번 사태로 수면 위에 떠올랐다고 볼 수 있다.
오상욱과 도경동은 22일 단체전에 나서 이번 대회 추가 메달에 도전한다. 협회 사무실 봉쇄가 단체전 준비에도 영향을 줄지, 그리고 9월 아시안게임까지 이 장비 문제가 정리될 수 있을지는 아직 지켜볼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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