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국내 장비 업체 간 경쟁이 기술경쟁력 대결을 넘어 법적 공방으로 치닫고 있다.
TC본더 분야에서 10년간 독주하며 1위 수성에 사활을 건 한미반도체와 무서운 기세로 추격 중인 한화세미텍이 정면충돌하면서 국내 반도체장비 업계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한미반도체 성벽에 균열낸 한화세미텍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구조로 칩과 칩 사이를 열과 압력으로 정밀하게 연결하는 공정이 필수인데, 이를 수행하는 장비가 TC본더다.
한 업계 관계자는 “칩을 더 많이 높게 쌓으면서도 두께는 얇게 유지해야하는 것이 HBM의 특성”이라며 “0.00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본딩 기술은 HBM의 수율과 직결되기 때문에 제조경쟁력의 핵심이 TC본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미반도체는 TC본더 시장의 퍼스트무버다. SK하이닉스와 10여년간 긴밀히 협력해오며 장비 최적화를 이뤄냈다. 시장조사 업체 테크인사이트에 따르면 한미반도체의 글로벌 TC본더 시장 점유율은 71.2%로 1위다. 지난해에는 미국 마이크론으로부터 우수 협력사로 인정받아 ‘톱서플라이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화세미텍은 TC본더 분야의 후발주자지만 한화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게임체인저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공격적인 연구개발(R&D)을 기반으로 SK하이닉스 공급망에 진입하며 한미반도체가 10여년간 다져온 굳건한 위상에 균열을 냈다.
SK하이닉스와 한화세미텍은 지난해 3월 TC본더 납품 계약을 체결했다. 한화세미텍이 HBM용 TC본더를 고객사에 공급한 첫 사례다. 이를 시작으로 신규 물량 계약을 연이어 맺으며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전년동기 대비 94.7% 증가한 1357억원에 달했다. 영업이익도 흑자전환했다.
같은 기간 한미반도체의 매출은 830억원, 영업이익은 276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44.5%, 영업이익은 61.6% 줄었다. SK하이닉스 물량을 한화세미텍과 나누면서 한미반도체의 실적이 예년보다 하락한 것으로 보인다.
인력유출·특허침해 줄소송···일정도 안갯속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의 갈등은 일감확보 경쟁을 넘어 감정 섞인 전면전으로 확대된 모양새다. 분쟁의 불씨는 인력유출이었다. 한미반도체는 2021년 TC본더 관련 부서 직원이 한화정밀기계(현 한화세미텍)로 이직한 후 기술유출을 우려해 부정경쟁행위금지 소송을 제기했다.
이 재판은 2024년 5월 한미반도체의 승소로 끝났다. 재판부는 이 직원이 한화정밀기계에 재직하면서 한미반도체 기술 정보를 사용·공개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양사의 악연은 더욱 격화됐다. 한미반도체는 2024년 12월 한화세미텍이 TC본더 특허기술을 도용해 제품을 설계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다만 이 재판은 한화세미텍 측의 자료 미제출 등으로 1년2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기일조차 잡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세미텍도 맞불을 놓았다. 한미반도체와의 법정싸움에서 더는 ‘피고’가 아닌 ‘원고’가 되겠다며 특허 소송을 냈다. 한화세미텍은 지난해 10월 한미반도체 TC본더에 탑재된 부품 중 일부가 자사의 특허권을 침해한다면서 이를 문제 삼았다.
한미반도체가 제기한 특허사건과 달리 한화세미텍이 원고인 소송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이 사건의 첫 변론기일은 올해 4월9일이다. 한화세미텍의 소송 대리인은 김앤장법률사무소, 한미반도체는 법무법인 세종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한화세미텍이 재판 개시 전부터 전략을 잘 짠 것으로 판단한다”며 “한미반도체가 소송한 사건에 대해서는 자료 미제출 등으로 기일이 잡히지 않도록 시간을 끌면서, 원고로 나선 건에는 법원의 지시나 제출 명령을 빠르게 따르며 불리한 재판은 피하고 소송을 제기한 공판부터 끝내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재판 결과가 가를 TC본더 패권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 간 재판 결과는 차세대 HBM4 장비 시장의 패권과 공급망 변화로 이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승·패소 여부에 따라 주력제품의 판매량을 법원이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미반도체가 이기면 SK하이닉스에 대한 한화세미텍의 물량이 줄어들면서 현재 70%대인 TC본더 글로벌 점유율이 80%대로 커질 수 있다. 또 SK하이닉스와의 동맹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면서 실적이 크게 개선되고 R&D 투자도 확대하며 경쟁사와의 기술격차를 더욱 벌릴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한화세미텍이 승소할 경우 SK하이닉스에 공급하는 물량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법원이 재판 결과에 따라 한미반도체 납품량을 제한할 공산이 있어서다. 10여년간 한미반도체가 이끌어온 시장을 한화세미텍이 일순간에 잠식하게 되는 것이다.
발주처인 SK하이닉스도 한미·한화 간 법정공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단순한 두 기업 간 다툼이 아니라 우리나라 반도체 생태계에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가 TC본더 공급망 이원화를 추진하는 시점에 벌어진 소송전은 발주처 입장에서도 상당한 부담”이라며 “법원 판결에 따라 특정 장비를 도입하지 못할 경우 HBM 양산 일정이 꼬여 국내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유호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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