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몸으로 북한전차 뚜껑 열고 수류탄 집어넣던 부대 썰


전사를 빛낸 춘천 방어전

1950년 6월 25일 새벽,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38선 전역에는 북괴군이 기습적으로 남침해 왔다. 당시 필자가 사병으로 배속해 있던 부대는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 처음에 제6사단은 제2연대와 제7연대가 38선 동부 춘천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고, 우리 제19연대는 예비연대로서 사단본부가 있는 원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춘천 지역을 공략해 온 북괴군은 제2군단 제2사단으로, 그들의 예하 3개 연대는 38선 접경지대에 배치된 국군의 전초부대를 돌파하고, 25일 12시경에 춘천시 북방 교외에 도달했다. 그 동안에 북괴군 제2군단 산하의 제7사단은 소련제 탱크의 지원 아래 홍천을 향해 진격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 춘천 동북방 고지에 배치되어 있던 우리 제6사단 제7연대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우수한 장비를 갖춘 북괴군을 맞아 훌륭하고 용감한 방어전을 펴고 있었다. 전황이 위급함에 따라 우리 제19연대는 25일 오후 늦게 응원부대로 춘천에 출동하여 북괴군 제2사단 제6연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전사(戰史)에 의하면 당시 우리 제6사단 포병대의 활약을 크게 취급하고 있으며, 특히 당시 전투상황에 대해서 페렌바크는 이렇게 썼다. "국군 제6사단 7연대는 춘천 북방의 능선에 배치되고 콘크리트 참호와 진지에 틀어 박혀 있었다. … 북괴군의 공격은 춘천 북방의 산악지대에서 더 진출하지 못하였다. 잘 배치된 포격은 북괴군의 6연대를 분쇄했다. … 북괴군의 필사적인 공격과 참혹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북괴군 제2사단은 춘천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 단 하룻동안 싸운 북괴군 제2사단은 엉망이 되고 사상자가 40퍼센트에 이르렀다. 전투에 겁내지 않고 기갑부대도 없이 용감하게 적군과 싸운 한국군은 그들의 실력 이상으로 오래 견디어냈다. 한국군 제6사단은 춘천을 사수했고, 동서에서 심한 참패를 당해 지킬 수 없을 때에야 비로소 후퇴했다."

개전 당일 우리 제6사단의 용감한 방어전으로 괴뢰군 제2사단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다음날 26일 오전, 적은 다시 우리 방어지역으로 제2차 공격을 시도해왔다. 그러나 우리 제6사단 장병은 사단장 김종오 대령(뒤에 육군대장·작고) 이하 각 연대장 및 지휘관들의 민활한 작전계획 아래 계속 준엄한 지형과 유리한 방어지역을 고수하면서 적의 보병들에게 일대 타격을 가했다. 보잘것 없는 장비를 갖춘 우리 병사들은 용감한 전투정신으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서 적의 공세를 훌륭히 저지해냈다. 한편 적은 26일 오후 예비부대인 북괴군 제17연대를 투입, 제3차 공격을 가해 왔는데, 이때 그들은 열화 같은 포병의 지원을 받아 약간의 우회를 이용하여 일제히 개시되었다. 국군과 북괴군 사이에는 피나는 혈전이 전개되었고, 이 전투에서 북괴군 1개 대대가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다. 적은 저녁 무렵에야 우리가 장악하고 있던 진지를 차지했는데 이 전투에서 춘천 북방 교량에는 북괴군 1개 중대가 5열로 나란히 죽어 넘어져있을 만큼 혈전이었다.

전 북괴군 총좌이며 당시 제2사단 포병연대장이었던 임헌일 씨의 기록에 의하면, 이 춘천전투에서 그들의 포병 부사령관이었던 안광무 등 고급장교들이 전사했고, 북괴군의 군사사전이라 불리던 제2사단장 이청송에게 춘천 점령의 책임을 물어 38선 여단장으로 있던 최현과 교체를 할 만큼 북괴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본래 북괴군의 기간은 제1사단·제2사단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그들은 우수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우리 제6사단 장병의 철통 같은 방어전에 큰 실패를 맛보았을 만큼 우리 제6사단은 당시 전 전선을 통해 막강한 부대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홍천지구 특공작전

춘천을 사수했던 우리 제6사단은 26일 밤, <참패를 당해 더 지킬 수 없을 때>에야 비로소 작전상 부득이 홍천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소속한 제19연대는 춘천 전투에서 많은 전상자를 냈으므로, 홍천에서 재편성을 한 후 일부는 전방으로 다시 출동하고, 일부는 홍천국민학교에서 집결하여 홍천을 향해 진격하고 있는 북괴군 제7사단의 보병과 탱크대에 대하여 그 저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제19연대장 민병권 대령(예편 육군중장·현 국회의원)은 휘하의 장병들을 모아 놓고 훈시를 한 다음 조국의 존립과 민족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생명을 마칠 용사들을 직접 선발했다. 이때 전 연대장병 중 30여 명의 용사들이 지원했다. 그러나 그 중에 3대독자는 물론 당대독자도 그 기준에서 제외되고, 비교적 우수한 11명의 용사만을 선발했는데, 필자도 그 대원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우리 11명의 사병들은 먼저 무장을 해제하고, 당시 일군(日軍) 출신으로 실전경험이 많은 이태규 하사로부터 북괴군의 전차에 대한 장단점과 전차 파괴의 요령을 설명받았다. 우리 11명은 대전차 파괴무기로서 81밀리 박격포탄 1발과 수류탄 2발씩을 분배받았는데, 이로써 생명을 바쳐서라도 저 괴물 같은 소련제 적 전차의 전진을 막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민병권 대령으로부터 마지막 적정 상황과 간곡하고도 비장한 훈시를 들은 다음, 성공을 빈다는 뜻에서 축배주 한 잔씩을 받아 마시고 화랑담배 1갑씩을 지급받았다. 제6사단 제19연대의 영예는 물론 조국과 민족을 수호하기 위해 육탄으로 생명과 적 전차의 파괴를 교환키로 한 나와 다른 전우들의 심정은 실로 비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죽어야 할 목숨, 이 생명을 조국이 필요로 하는데 어찌 가만히 좌시만 할 수 있으랴 하는 것이 젊은 병사인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고, 또 전우들의 공통된 심리였다.

이날 우리 11명 육탄용사들은 6월 28일 미명 4시 정각을 기해 적의 주력 탱크부대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 특공대는 미리 그 전날인 27일 밤 10시, 연대장님의 격려와 전송을 받으며 드리쿼터 (*엮은이 주: 군용 3/4톤 트럭) 편으로 적지를 향해 출동하게 되었다. 우리의 목적지인 홍천 말고개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일부 아군 병력이 능선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지역 방어의 책임을 맡은 중대장이 나와 우리들의 소속과 사명을 물었다. 우리 11명은 연대장의 특명으로 대전차 폭파육탄특공대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곳 중대장은 우리의 비장한 사명에 감복한 듯이 다시 한 번 그곳 적정 상황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날 밤 12시경, 우리 특공대는 적지에 침투하여 수색 중 적이 도로변에 가설한 유선통신을 발견했다. 나는 우선 적의 통신망을 두절시킬 목적으로 이빨로 그 전선줄을 절단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부득이 돌을 집어 몇 번 내리쳤다. 그때 어디에서인지 적으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아 우리 특공대원 11명은 제각기 흩어져 7명은 행방을 알 수 없고, 겨우 4명만 남아 있었다. 우리 4명은 대원들이 버리고 간 81밀리 박격포탄을 수습하여 차도에 매설하고, 그 지점에서 약 100미터까지 후퇴했는데, 여기서 행방불명되었던 지(池), 양(梁) 2명의 일등병을 만났다. (* 엮은이 주: 여기서부터 본문에서 계속 언급되는 '양 일등병'은 양학모(梁學模) 씨로, 휴전 이후 일등상사로 전역하였습니다. 조달진과 양학모는 1977년 다시 만났는데 그 사실이 경향신문에 보도된 바 있습니다. <경향신문> 1977년 7월 2일자 6면 참조.) 여기서 모두 동 계급인 일등병 6명이 모여 왈가왈부했으나 좀처럼 어떤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이때 필자는 생각 끝에 분연히 일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육탄용사로 지원한 우리의 숭고한 정신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앞으로는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고 하면서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이 자리에서 우리 6명이 같이 죽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의 뒤를 따르라."

하면서 즉각 행동에 옮길 것을 촉구했다. 우리는 어둠속을 체지면서 적진 깊숙이 잠입, 전차를 찾아 해맸으나 쉽게 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어느덧 벌써 먼동이 트기 시작했으므로 할 수 없이 후퇴하기로 하고 아군 진지로 돌아왔다. 우리는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허행을 한탄했으나 지난밤 행방불명된 5명의 전우를 그곳에서 다시 만나 반가왔다. 그들은 이미 연대 CP까지 갔다가 다시 무장을 갖추고 온 모양이었다.

28일 아침 8시 반, 돌연 고지에서 포성이 진공하며 적군의 공격을 받아 피아간에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때 적(북괴군 제2군단 제7사단 병력으로 추측)은 10여 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유유히 밀어닥쳤고, 아군은 선전했으나 우리 진지는 이를 감당키 어려워 벌써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대원들에게,

"자, 우리에게 때는 왔다. 즉각 행동에 옮기자. 제일 선두의 전차는 내가 맡겠다."

하고 소리치면서 각 대원에게 1인 1대씩의 작전 임무를 분담시켰다. 선두에 선 나는 배수로를 통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 전차를 향해 잠복해 들어갔다. 이때 벌써 200미터 전방에는 괴물 같은 그 커다란 자태를 드러내고 큰 진동소리를 울리면서 적 전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뛰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전지(戰地)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이 떠도는 가운데 마치 고향땅에라도 간 듯이 어머님의 얼굴을 순간 떠올려 보았다. 또 마지막 연대장 민병권 대령이 훈시를 하던 인자한 모습과, 술 한 잔에 담배 한 개피씩 받아 피우며 정든 전우들과 작별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굳센 마음을 가질 것을 다짐하면서 전방의 적 전차를 응시해보았다. 그리고 어금니를 질끈 씹으면서 이 몸을 즐겨 조국의 전선에 던지기로 결심하니, 한결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었다.

적 전차는 200미터에서 150미터 앞으로 점차 다가오는데, 이때 돌연 폭음이 크게 울렸다. 아마도 아군 진지에서 대전차포를 쏘는 모양이었다. 아군의 포는 백발백중 틀림없이 명중하는 듯했으나 그 괴물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그냥 전진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적의 전차는 두 개의 기관포를 요란하게 쏘아대면서 30미터, 20미터 나의 시야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들고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행동의 순간이 왔다. 나는 수류탄과 81밀리 포탄을 안고 재빨리 적 전차 후미에 기어오르는데 성공했다. 마침 지형관계상(커브가 긴 지형이었다) 그 뒤의 적 전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한결 다행이었다. 나는 침착하면서도 민첩하게 전차의 뚜껑을 열고 포탄과 수류탄을 집어 넣고 절벽 아래로 급히 뒤어내렸다.

그 후 요란한 폭음이 울리는 듯했으나 그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 후 만세소리와 환호성이 귓가에 들리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의 몸은 낭떠러지 큰 고목에 간신히 걸려 있었고, 천지신명이 돌보았는지 별로 부상당한 곳도 없었다. 나는 힘을 내어 큰소리를 쳤다. 이때 전우들이 달려왔고 그들의 구원으로 절벽에서 내려와 현상을 바라보니, 적의 전차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나는 비로소 크게 한숨을 내쉬며, 그 아슬아슬했던 순간을 잠깐 회상해 보았다.

잠시 후 연대장(민병권 대령) 이하 각 참모들이 달려왔고, 종군기자들도 와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우리 특공대 11명은 선두의 전차를 비롯하여 9대의 적 전차를 완전히 대파 또는 노획했으며, 우리 대원 중의 부상자는 단 1명뿐 모두 무사했다. 이렇게 우리의 첫 임무는 사전의 작전계획 이상으로 대성공을 거두어, 우리의 전공이 당시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되었고, 전사에도 한 구석을 차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적의 선두전차가 폭파되자 아군의 사기는 충천되었고, 맹렬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의 기세를 꺽어 마침내 파죽지세로 몰려들던 적을 후퇴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연대장님을 비롯하여 우리 특공대 11명은 폭파된 적의 전차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했고, 노획한 전차는 끌고 올 수가 없는 까닭에 그 자리에서 모두 폭파시키고 연대 CP로 돌아왔다. CP에서 연대장님은 전지임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축하연을 간소하게 마련하여 우리 특공대의 노고를 위로했다. 전황에 대한 작전지휘보고가 끝난 뒤, 그 자리에서 특히 공로가 큰 3명의 대원에게 일등병에서 이등중사로 2계급을 특진시키는 한편, 그밖의 다른 대원들에게도 1계급씩 특진시켜 주었다.

그러나 우리 몇 사람의 노력이 어찌 적의 조직적이면서도 막강한 공격력을 분쇄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침내 춘천과 홍천 지역을 방어하면서 선전분투하던 우리 제6사단 병력도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부득이 눈물의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경지구의 육탄 7용사

후퇴를 거듭하던 8월 초순경. 우리 제6사단 제19연대는 경북 문경에서 방어선을 치게 되었다. 점차 불리해지는 전황에 따라 아군의 희생자는 날이 갈수록 수없이 늘어났다. 어느날 연대장 민 대령은 나를 불러 새로운 작전임무를 맡겼다. 그는 말하기를, 아군의 희생을 막고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려면 또다시 홍천전투와 같은 특공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그 조직을 나에게 명령하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홍천의 전우 중에서 생존한 7명을 선발, 특공대를 재조직한 다음, 연대장 민 대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며칠 후 다시 연대장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연대 CP에 출두했다. 연대장은 나를 반가히 맞아, 문경 탄광지구에 주둔한 적의 전차대 폭파 임무를 나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우리 특공대원 7명은 곧 이를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우리의 폭파 장비로서는 1인당 4홉 병에 휘발유 1병과 성냥 1갑, 수류탄 2개뿐이었다.

우리 대원 일행은 해가 질 무렵에 적지를 향해 출발을 서둘렀다. 밤 11시경 우리는 야음을 틈타 전지 깊숙이 침투할 수 있었다. 때는 장마철이라 궂은 비를 맞으며 도보를 하자니 그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 탄광 갱도 노선을 따라 매복하여 전후 좌우의 적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숨은 전방 약 50미터 지점에 북괴군 보초 1명이 포플러나무에 기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순간 몹시 긴장이 되었다. 나는 대원 2명을 이끌고 보초병이 있는 20미터 지점까지 접근하여, 2명의 대원에게 엄호를 부탁하고 단신 포복으로 그에게 접근해 갔다. 가까이 접근해보니 마침 그 보초병은 졸고 있었다. 순간 나는 대검을 빼어 힘껏 그의 목을 잡고 정신없이 찔러댔다. 보초병은 쓰러지고 나는 따발총 1정과 일본군도 한 자루, 실탄 수십 발을 노획하여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대원 7명과 다시 작전계획을 구체적으로 의논한 다음, 우리는 무난히 제2선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적정을 살펴보니 적군 보초 1명이 갱도 노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이, 원 일병 두 사람을 인솔하여 3면 공격으로 접근, 먼저 이 일병이 보초에게 덤벼 목을 조르고 나는 대검으로 힘껏 찔렀다. 전선의 이동에 따라 수많은 전우들의 죽음을 목격해온 나로서는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생존할 수 없음을 체득하고 있었기에 적을 죽인다는 것은 아무런 죄의식이 뒤따르지 않았다. 그만큼 6전쟁은 나를 잔인한 군인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칼을 맞은 보초는 비명을 크게 질렀으므로 우리는 놀란 나머지 급히 원 위치로 돌아왔다. 그 때의 시간은 벌써 4시가 지나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나의 생각으로는 대원들은 돌려보내고 단신이라도 적진에 침투하여 임무를 완수할 각오였으나, 전우들의 간곡한 권유로 할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본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즉시 연대장께 노획무기를 바치고 우리의 행동상황을 보고했다. 책임 완수를 다하지 못해 꾸지람이라도 들을 줄 알았는데, 그는 오히려 기쁜 낯으로 우리의 전공을 찬양하면서 담배 한 갑씩을 나누어 주며 위로해주는 것이었다.

그 후 우리 19연대 특공대는 수차에 걸쳐 적진에 침투하여 잠복임무를 계속하면서 적의 전차대 폭격을 할 기회를 노렸다. 이로부터 3일 후 아침 일찍 마침 아침식사가 보급되어, 대원 7명은 소금반찬에 주먹밥 1개씩을 쥐고 먹고 있을 때였다. 우리 대원이 잠복한 진지 남쪽으로 향한 길목의 산허리를 굽이치고 있는 길이 20미터나 되는 교량 앞에 적의 선두전차가 나타난 것이다.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는 먹던 주먹밥을 던지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급히 우리가 교량 앞에 가설한 대전차폭파지뢰의 스위치를 힘껏 둘렀다. 그때 천지를 전동하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하늘로 피어 올랐으나 적 전차는 잠시 후 뒷걸음을 치면서 다시 포신을 아군 진지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당황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칠세라 대원 중 4명에게 엄호 사격을 부탁하고 나는 이, 양 일병 두 사람을 인솔하고 쏜살같이 적 전차에 뛰어올랐다. 나는 전차 위의 뚜껑을 열기 위해 그 무쇠덩어리를 마구 두들겼다. 그러나 눈치를 챈 적의 전차병은 포신을 전후 좌우로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참으로 난처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도로변에는 큰 포플러나무가 서 있어 포신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나무에 닿으면 좌회전, 또 우회전, 이렇게 발광적으로 마구 휘둘렀다. 나는 적 전차가 급회전하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나가떨어지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회전을 거듭하는 포신에 매달려 같이 돌기 시작했다. 참으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이하가도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이때 이, 양 일병 두 사람은 휘발유병에 불을 붙여 발판챙에 투척했으나 무쇠덩어리 전차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나는 기회를 곡예사와도 같이 수류탄의 핀을 뽑아 포구에 집어넣고 재빨리 뛰어내렸다. 그 순간 폭음이 울리면서 포신이 멈추는 것이 아닌가! 다시 뛰어올라 전차 위 뚜껑을 열려 했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전차 앞부분 두꺼운 유리문을 발견하고 칼빈총으로 무수히 난사하였다. 그 순간 전차 창문에 흰 수건이 건들건들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상한 육감이 들면서 혹시 항복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하고 잠시 총질을 멈췄다. 그러나 뒷부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세 사람은 숨을 죽이고 전차 꼭대기를 주시했다. 무기라고는 내가 휴대한 칼빈총 한 자루뿐이어서, 탄창을 바꿔 끼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총구를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잠시 후 뚜껑이 열리면서 총 끝에 흰 손수건을 매어 위로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이때 이 일병이 전차 위에 뛰어올라 적이 내민 따발총을 낚아챘다. 나는 순간 다급한 목소리로,

"빨리 손들고 나왓!"

하고 적병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한 놈이 손을 들고 기어 나왔다. 어깨 위의 계급장을 보니 그는 인민군 소위였다. 양 일병이 옆에서 그의 권총을 빼앗고 몸을 수색했다. 우리는 북괴군의 소위의 무장을 해제시킨 다음, 내가,

"전차 안에 모두 몇 놈이야!"

하고 그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모두 6명입니다."

하고 힘없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그를 전차 밑으로 걷어차 버렸다. 이로써 이, 양 일병도 권총과 따발총으로 무장했으므로 한결 마음 든든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전차 위를 향해,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전차의 모든 무기는 밖으로 던져라. 그렇지 않으면 폭사시키겠다."

고 소리쳤다. 잠시 후 권총 6정이 위로 올라왔다. 나는 전차 위에 붙어 서서 무기를 발길로 굴러 찼다.

"이젠 한 놈씩 손 들고 나왓!"

내가 소리치자 놈들은 한 놈씩 전차 위로 기어 올라왔다. 몸 수색을 차례로 다 마치자, 7명의 적의 포로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저 살려달라고 애원이었다. 참으로 통쾌한 순간이었다.

때마침 유엔군의 전투기가 상공에 나타나 전차 위로 저공비행을 했다. 우리는 철모를 벗어들고 만세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혹시나 오폭을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으나, 우리가 아군임을 확인했는지 세 번이나 저공으로 순회를 하다가 곧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 참으로 다행스런 순간이었다. 나는 이, 양 일병 두 사람에게 적병을 잘 감시할 것을 이르고, 탱크 안을 수색할 목적으로 반신 가량 들어갔는데, 누구인가 나의 철모를 두드리면서 나오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머리를 들고 위로 올려다보니, 언제 왔는지 아군의 모 연대장이 아닌가. 나는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는 우리를 향해 물었다.

"너희들의 소속은?"

"우린 19연대 육탄 특공대원입니다."

"알았다. 수고가 많았다. 그러나 이 전차는 우리 연대 수색대원 이외에는 터치할 수 없으니, 그냥들 돌아가라!"

그는 우리 대원들에게 강압적으로 명령한 다음, 우리가 생포한 적군 포로 7명과 전차, 그리고 노획품을 모두 빼앗는 것이었다. 참으로 분하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든 전공과 노획물을 빼앗긴 우리 대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귀대, 이 사실을 급히 연대장께 보고했다. 이때 연대장 민 대령은,

"정말,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걱정말라!"

하면서 우리 대원 일행을 대동하고 사단장 김종오 장군께 이를 보고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우리가 사단 CP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전공을 가로챈 그 모 연대장은 이미 노획한 무기 일부와 포로 7명을 데리고 와서 자기 연대 수색대의 전공인 양 그 사실을 보고하는 중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었다. 분에 못 이긴 우리 연대장님 이하 특공대원 일행은 그동안의 경과와 진상을 흥분해서 자세히 보고를 하고 그 전공을 다투었다.

서로 자기가 옳다는 주장에 어리둥절한 사단장은 그 자리에 배석했던 사단 작전참모 모 중령에게, 전투 상황을 망원경으로 관찰했느지의 여부를 물었다. 관찰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인민군 전차 위에 뛰어올라 포신에 매달려 싸운 용사가 누구인가 하고 질문했다. 우리 특공대원 3명은,

"그들이 바로 저희들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태를 정확히 판단한 사단장은,

"그렇다면 모든 전공은 제19연대 특공대원들에게 돌리는 것이 옳다."

고 말하고, 우리 연대장님 이하 우리 대원 3명과도 일일이 굳은 악수를 하면서 우리의 용감한 감투정신을 치하한 다음, 연대장을 향해서,

"이들 특공대원들을 모두 2계급 특진을 상신하라."

고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시 사단장 김종오 장군의 그 조용하면서도 명석했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며, 이미 지금은 고인이 된 그의 모습이 때때로 그리워지는 것은 이때 내가 받았던 감명 때문이리라.

우리는 다시 연대장·사단참모와 함께 아슬아슬했던 격전의 현장을 둘러보았는데, 그때 따로 행동하던 우리 특공대원 3명이 나타나 만세를 부르면서 달려왔다. 우리는 모두 무사했음을 확인하면서 서로 얼싸안고 그동안 복받쳤던 울음을 터뜨렸다. 위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 역시 큰 전공을 세운 것이었다. 그들은 뒤따르던 후미 전차를 공격했는데, 인민군들은 모두 도망치고 전차 3대를 노획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도망치던 적군으로부터 사격을 받고 용감했던 조문종(趙文鐘) 일병이 전사하고 말았다는 비보를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우리 특공대원 6명은 전우를 잃은 슬픔에 울음을 터뜨리며 통곡해 마지 않았다. 나는 대원들을 인솔하여 전사한 조문종 일병의 시체를 양지 바른 곳에 묻은 뒤, 그의 무덤 위에 철모를 얹어 놓고 명복을 빌었다. 그가 살았다면 우리의 승리는 더욱 완전했을 것을 아쉬워하면서 우리는 그의 무덤 앞에 더욱 용감한 특공대원이 될 것을 맹세했다.

당시 우리는 전차 4대를 노획한 전공 기념으로 격전현장을 찾아왔던 종군기자 민숙빈(閔淑彬) 씨가 사진과 함께 "불사신의 육탄 7용사"라는 제목 아래 톱 기사로 신문에 크게 보도해주었고, 또 대한화보에서도 사진과 함께 크게 취급해주었던 것이다.

며칠 후 생존한 우리 특공대원 6명과 전차한 조 일병에게 각각 2계급 특진이 추서되었다. 그래서 당시 나와 함께 입대했던 군대 동료들은 아직도 일등병의 계급장을 달았으나 나는 2차에 걸쳐 4계급이 특진되는 바람에 중사(당시 이등상사)가 되어 부대의 명물이 되었다.

이 무렵 적의 전차대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고, 또 유엔군으로부터 대전차 파괴용 신무기가 지급되어, 초기의 별다른 장비가 없어서 조직된 우리 특공대는 자연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이 문경 전투 역시 후퇴를 거듭하던 우리 국군 전체에 사기를 앙양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 역시 우리 전사의 한 구석을 점하게 된 빛나는 전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포로, 그리고 탈출

그후 나는 양 중사와 함께 제19연대 제3대대 수색중대 선임하사로 전속되었다. 전세가 아군에게 불리하자 우리 부대는 경북 의성 안계리로 후퇴하여 다시 방어전을 펴게 되었다. 우리는 대대장의 특명으로 어둠을 이용, 1개 분대를 인솔하여 적정을 살피기 위해 출발했다. 부대 주둔지에서 약 4킬로 지점 어느 촌락에 이르렀을 때는 밤 10시경이었다. 우리가 10여 미터나 되는 고령(高嶺)을 넘어서자 약 30미터 전방에서 돌연 '누구냐?'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넌 누구냐? 암호?' 하고 내가 재빨리 되물었다. 그제야 한참만에 '백두산' 하고 응답하는 것이었다. 적군의 보초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저 '수고!' 하고는 그냥 건너온 다리를 도로 지나 뛰지도 않고 분대원들과 함께 후퇴했다. 그곳에서 약 1킬로 지점에 울타리가 있는 어느 빈 집을 발견하고 우선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피로에 지친 우리 대원들은 너무 피로했던 탓으로 마치에 눕자 그냥 코를 고는 것이었다. 나와 양 중사는 책임을 맡고 있는 탓으로 잠을 자지 않고 상황을 판단하며 조금 전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한바탕 웃었다. 그때 갑자기 보초가 뒷담을 넘겨 보다 '악!' 소리를 쳤다. 뒷집에는 괴뢰군 1개 소대 병력이 자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놈이 소리친 것이었다. 총소리에 우리 분대원들은 급히 산개했다. 우리는 논길을 따라 아군 진지를 향해 급히 걸음을 서둘렀다. 벌써 먼동이 희끄므름하게 트고 있었는데, 얼마를 갔을까 큰 농가 한 채가 보였다. 그러나 약 50미터 가까이 갔을 때 그 집에서 사릿문 밖으로 인민군 수 명이 물과 쓰레기를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곳 역시 적진이었다. 우리는 잠시 숨었다가 1킬로 지점까지 가서 차도가 있는 지름길로 가기 위해 뚝 위로 올라갔다. 순간 우리는 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민군 장교 1명과 그들 사병 2명과 마주쳤다. 순간 나도 모르게 방아쇠를 잡아 당겼고, 양 중사는 수류탄을 뽑아 던졌다. 세 놈을 모두 즉사시킨 우리는 따발총 2정을 노획, 소로를 따라 약 2킬로까지 급히 달렸다. 우리는 큰 나무들이 우거진 산기슭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바로 인민군 야전병원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달리 우회로가 없었으므로 도로 위로 올라 조마조마하면서 유유히 그 앞을 무사히 통과했다. 여기서 다시 약 200미터 지점 산길에서 다시 인민군 장교 1명, 사병 2명과 마주쳤다. 나는 재빨리 권총을 뽑아 당긴 다음, 약 300미터 지점까지 도망쳐서 우거진 아카시아 숲을 헤치고 절벽을 뛰어내렸다. 나와 양 중사는 몸을 물속에 담근 채 총과 머리만 내어 놓고 아카시아 숲에 숨어 있었다. 얼마 후 인민군 추격소대는 미친 듯이 우리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낙오된 신병이 적에게 생포되어,

"고병(古兵)님, 나오시오! 목숨만은 살려 준답니다!"

하고 몇 차례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총구를 턱에 대고 자살하려 했으나 옆에 있던 양 중사가,

"야! 기회는 또 있다. 우리는 불사신이야!"

하고 웃었다. 그 순간 우리가 숨은 냇가에 총탄이 날라왔고, 이어서,

"어서 빨리 손들고 나왓!"

하고 소령하는 것이 아닌가. 이로부터 우리 두 사람은 적에게 포로가 되어 무장해제를 당하고 몇 시간 후 인민군 대대장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소속과 군대경력을 물었다. 나는 입대한 지 25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포로된 우리 대원 중에서 특공대의 사실을 폭로할까 두려웠으나 무사했다. 일주일 후 우리는 강행군 끝에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내가 수감된 8호 감방에는 콩나물 시루처럼 약 33여 명이나 되어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무릎을 세우고 지내는 형편이었다. 우리에겐 콩 1홉, 밀 1홉씩 지급되었는데, 그 굶주림과 학대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굶주림을 못 이긴 끝에 33명 중 31명이 팬티를 찢어 혈서로 인민군에 지원하겠다고 청원했으나 나와 양 중사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엔 깨끗이 죽자는 생각에서 혈서를 쓰지 않았다. 약 2시간 후 혈서를 쓴 31명의 호출이 있었고, 우리 두 사람은 비로소 넓어진 감방 안에 두 다리를 쭉 뻡을 수 있어 오히려 다행이었다. 1시간 후 웬일인지 호출해 나간 31명은 모두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모두 엉덩이에 피가 맺혔거나 입술이 터지는 등 무수히 구타당한 흔적이 역연했다.

어느덧 음력 8월 14일, 창살 밖으로 유난히 밝은 달빛이 비쳐들자 나는 고향의 부모형제의 모습이 생각났고, 맛있는 음식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런데 밤 11시가 되었을까. 돌연 호각소리가 요란히 울리고 감시병을 전원 집합시키는 모양이었다. 그러부터 20분 후 요란한 총성이 들리고, 하나 둘 셋하는 힘겨운 소리와 함께 창틈으로 휘발유의 냄새가 풍겼다.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급히 잠든 양 중사의 옆구리를 찔렀다. 잠시 후 불길은 형무소 감방마다 번지기 시작했다. 먼저 불이 붙은 1호 감방에서는 포로들의 아우성소리가 들리고, 삽시간에 형무소 안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우리 감방에서도 모두 잠이 깨었으나 대부분 그저 멍하니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이 때 나는 외쳤다.

"우리가 살 길은 이 감방 외벽을 부수는 길밖에는 없다. 자, 빨리 서두릅시다."

그러나 감방 안엔 도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 끝에 나는 철제 오물통을 엎지른 다음 이것으로 마구 벽을 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쳤을까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내 몸 하나 빠져나갈 구멍이 되자 나는 얼굴과 몸을 긁히면서 겨우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살펴보니 그곳은 어떤 창고인 듯 싶었다. 이리저리 헤맨 끝에 곡괭이 한 자루를 발견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인지 이것으로 감방벽을 부수고 33명 전원이 이 생지옥을 탈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양 중사와 똑같은 연대의 배갑동 하사와 함께 도주, 먼동이 틀 무렵에야 어느 산시긁에 이르렀다. 신발도 없이 맨발인 채 입은 것이라고는 팬티 하나뿐이었고, 야기(夜氣)를 느끼면서 우리는 심한 추위와 굶주림을 느꼈다. 이때 어디서인가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우리 세 사람은 산중의 부락을 향해 가다가 좀 떨어진 외딴집 앞에 걸음을 멈췄다. 우리가 주인을 찾자 한 노인이 창문을 반쯤 열고 우리를 내다봤다. 우리는 사실 국군인데, 청주형무소에서 탈출하여 도망 중이며 배가 고마퍼 그러나 밥 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주인은 여기는 인민군들이 매 시간 순찰을 도니 살고 싶으면 빨리 도망가라는 말을 할 뿐 실로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우리의 몰골이란 빡빡머리에 옷도 벗고 신도 신지 않았고,. 더욱이 수염은 길고 세수를 한 지도 오래 되었으므로 꼭 무슨 괴물같이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몇 집을 다녀봤으나 그들 역시 같은 답변이었다. 결국 짚신 한 켤레 얻지 못하고 주린 배를 움켜쥔 채 다시 산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비록 괴뢰 치하에서 시달린 동포들의 공포심을 전연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들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지나친 냉대에는 참으로 분개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격대생활, 그리고 미 동성훈장

우리는 산중에서 탈출한 몇 사람의 동료를 만나 반가왔으나 그들의 처지 또한 피장파장이라 후일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분산행동을 하여 남하키로 하고 작별했다. 우리가 산을 넘어 얼마만큼 갔을까. 산기슭에 30여 호의 농가가 있었다. 지칠대로 지친 우리는 그 중 동구 앞의 한 집을 찾았다. 우리가 대문 앞에서 주인을 찾은즉 마침 부엌에서 나오던 한 젊은 아낙네가 우리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다시 뛰어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큰 소리로 주인을 찾았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며 한 노인이 나타났다. 우리는 서슴지 않고 문 앞으로 다가서면서 우리의 처지를 솔직히 말하고 밥을 청했다. 그 노인은 한동안 생각하던 끝에 손짓으로 우리를 방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반갑고 한편 미안해서 맨발에 의복도 없어 곤란하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그러자 노인은 아래채 광을 가리키면서 '그렇다면 이리로 오시오' 하며 우리를 인도했다. 잠시 후 밥상이 나왔다. 몇 달만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더운 밥과 산나물 반찬을 보자 우리는 미친 듯이 삽시간에 먹어 치웠다. 밥상을 물린 후 갑자기 포식한 탓인지 졸음이 쏟아져 오고 좀체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구세주와 같은 노인의 말인즉 자기 아들이 국군에 입대했다는 것, 그 젊은 아낙네는 자기 자부(子婦)라는 것, 마침 오늘이 추석인지라 무척 자식을 생각하던 중 우리를 만났다는 것, 그러면서 때때로 이곳엔 괴로 내무서원이 순찰한다는 말을 하면서 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