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그림’ 없고 닻은 부러졌다··· 트럼프의 허술한 출구전략

2차 세계대전 이후 패권국가 미국 대통령의 존재와 ‘말’은 세계 질서의 주춧돌 노릇을 했다. 그는 기축통화국의 원수로서 국제 결제망을 흔들 수 있었고, 세계 최강의 군대를 지구 어디로든 보낼 수 있었다. 미국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때로 핵무기나 항공모함보다 강한 억지력이었다. 미국의 제45·47대 대통령인 트럼프는 이 전통을 무너뜨렸다.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이 전개 중인 2026년 3월 말 현재, 트럼프는 동맹국들에게 거대한 리스크다. 나라 경제를 뒤흔들 만한 거액을 내놓으라거나 멋대로 일으킨 전쟁에 파병을 요구한다. 반면 러시아, 중국 등 권위주의 국가들에게 트럼프는 조소와 은밀한 응원의 대상이다.
트럼프는 지난 3월14일 한국 등 주요 동맹국들에게 ‘호르무즈 해협을 여는 데 필요하다’라며 군함 파견을 요청했다. 동맹국들의 ‘신중한 거절’은 트럼프의 신뢰도에 대한 평가였다. 트럼프는 개전(2월28일) 직후부터 ‘이미 이란은 끝났다’라고 반복적으로 큰소리를 쳐왔다. 그의 호언장담대로라면 이미 종전 축포를 쏘고도 남았을 시점에, 유가는 폭등하고 트럼프는 군함 파견을 요청한 것이다.
트럼프가 동맹국들의 ‘배은망덕’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일 공개적으로 불만을 터뜨리던 와중인 3월18일. 전쟁은 한 단계 더 격화된다. 이스라엘이 세계 최대급 가스전인 사우스 파르스(이란과 카타르 영토에 걸쳐 있는)의 이란 쪽 영역을 폭격했다. 이란도 이스라엘은 물론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 미국과 동맹 관계인 걸프 왕정 산유국들의 에너지 시설을 타격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로써 전쟁의 지리적 범위는 ‘이란 대 미국·이스라엘’에서 중동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양측의 공격 대상은 군사시설에서 에너지 인프라로 옮겨 갔다. 미국 및 세계경제를 인질로 잡으며 유가 폭등을 ‘승전 조건’으로 설정한 이란에겐 나쁜 상황 전개가 아니었을 수 있다. 트럼프에겐 악몽 같은 사태다. 중동 지역의 에너지 인프라 파괴는 국제 석유·가스 가격을 높여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부활시킬 터였다.
어떻게 호르무즈 해협을 열어 ‘승리했다’는 외양을 갖추는 동시에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할 것인가. 트럼프는 자신의 특기인 ‘겁박하기’를 채택했다. 3월21일 저녁, 트럼프는 공공연하게 이란 주민들의 생명을 인질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이란이 48시간 내로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풀지 않으면 발전소를 초토화하겠다.” 전력이 끊어지면 8000만 이란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인프라(조명, 이동수단, 상하수도, 병원, 통신 등)가 모두 마비되면서 ‘인도주의적 위기’ 단계로 치닫게 된다. 제네바 협약은 발전소 등 민간인의 생존과 직결된 시설에 대한 공격을 엄격히 제한한다.
또한 발전소까지 파괴당한 이란은 순하게 대응하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이란이 없으면 다른 걸프 국가들도 없다’라는 식으로 다른 산유국들의 유전은 물론 담수 시설까지 공격해서 물 공급 체계를 끊어버릴지도 몰랐다. 이란이 걸프 국가들과 동귀어진(同歸於盡)할 경우 발생할 글로벌 유가 폭등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에게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그에겐 위협을 철회하지 않으면서도 확전을 피할 ‘출구전략’이 필요했다.
진위 확인되지 않는 트럼프의 ‘협상’
48시간 시한을 불과 10시간 남짓 앞둔 3월23일 오전 7시5분(미국 뉴욕 시각), 트럼프는 돌연 자신의 SNS에 ‘이란과 평화 협상 중’이라는 내용의 게시물을 올렸다. “지난 이틀 동안 중동에서의 적대 행위를 완전하고 전면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매우 훌륭하고 생산적인 대화를 이어왔다.” 이와 함께 트럼프는 미군에게 이란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공격을 5일간(3월27일 금요일까지) 유예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기자들에겐 “우리는 매우, 매우 강도 높은 협의를 진행해왔”으며 심지어 “중요한 사안들에서 상당한 합의를 도출했다”라고 말했다.
이 소식은 즉각 유가 인하 및 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트럼프의 신뢰도에 대한 의구심에는 다시 불이 붙었다.
트럼프가 협상 관련 게시물을 업로드하기 15분 전(3월23일 오전 6시50분쯤)에 주식과 원유 선물(先物)시장에서 유가 하락에 베팅하는 수억 달러 규모의 거래가 갑작스럽게 이뤄지면서 ‘국가 기밀정보 유출’ 논란이 벌어졌다. 다음 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온라인 구독 플랫폼 서브스택(Substack)에 “선물시장에서의 반역(treason)”이라는 제목으로 게시물을 올렸다. 그의 요지는, 시장을 움직일 만한 뉴스가 전혀 없던 시점의 “비정상적인 단발성 거래량 폭증(sharp and isolated jump in volume)”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가설은 내부정보 유출이라는 것이다. “트럼프 주변 인물이 대통령이 곧 내놓을 발언을 미리 알고 있었고, 그 내부정보를 이용해 막대한 단기 이익을 챙겼다는 것.” 안보 관련 내부정보로 사익을 취하는 행위는 ‘반역’에 해당될 수 있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이란과 협상이 진행되었고 주요 사안에서 합의점을 도출했다’는 트럼프의 발언 자체도 3월26일 오후 현재까지 진위가 확인되지 않는다. 협상 당사자인 이란 지도부들이 ‘그런 일은 없었다’라고 공개적이고 강력하게 거듭 부인하고 있다. 전시 지도부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 의장은 “트럼프가 금융 및 석유 시장을 진정시킬 의도로 만든 가짜뉴스”라며 “미국과 이스라엘이 자초한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3월24일)에 따르면, 트럼프는 기자회견에서 협상 상대가 신임 최고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는 아니지만 “가장 존경받고 있는 사람, 지도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란의 유력 지도자들이 협상에 응한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기자들이 의구심을 표시하자 트럼프는 “(미국 공습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는 바람에) 정부 인사들 사이의 내부 통신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다소 납득되지 않는 답변을 내놓았다. 트럼프는 최근 ‘전직 미국 대통령이 이란 공습을 상찬했다’는 요지로 말했는데, 정작 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 모두는 트럼프를 만나기는커녕 통화한 적도 없다고 언론에 확인한 바 있다.
다만 로이터 등 외신은 트럼프 행정부가 중재국(파키스탄, 이집트, 터키 등)을 통해 15개 항목의 종전·휴전안을 이란 측에 보냈다고 보도했다. 이란에 대한 요구사항은 ‘호르무즈 해협 개방’ ‘핵 프로그램 포기’ ‘미사일 사거리 및 수량 제한’ ‘친이란 무장 조직(대리 세력) 지원 중단’ 등으로 알려졌다. 그 대신 미국은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고 민수용 핵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당근’을 약속했다고 한다. 이에 〈월스트리트저널〉(3월25일)은 “이 방안은 2월28일 전쟁이 시작되기 전 미국이 이란에 제기했던 방안과 큰 틀에서 유사하다”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전쟁을 왜 도발한 것인가.
AP 통신(3월25일)에 따르면, 이란은 트럼프의 종전안을 전면 거부하며 ‘전쟁 피해 배상’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이란의 주권 행사 보증’ 등 5개 항목을 역제안했다. 호르무즈 해협에 대해서는, 비적대국이 미국·이스라엘과 관련 없는 원유를 운송하는 경우에만 항행을 허용하는 ‘선별 봉쇄’ 방식을 유엔 등 국제기구에 통보한 상태다. 한편 사이드 쿠제치 주한 이란 대사는 3월26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비적대 국가”이지만 미국 및 이스라엘과 관련된 화물을 싣고 있는 선박은 해협 통과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컨대 페르시아만의 미국 투자 유전으로부터 석유·가스를 적재한 한국 선박은 호르무즈 항행이 불가능하다는 취지다.
이런 정보들을 종합하면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 측에 종전 메시지 및 대면 협상을 제안한 것 자체는 사실인 듯하다. 3월 말에 고위급 회담이 이뤄지거나 트럼프의 일방적 휴전 선언 가능성을 시사하는 보도도 나온다. 그러나 양측이 이미 긴밀하게 협의해서 합의 사항까지 도출했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현재(3월29일)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이란 부근으로 이동하는 지상군 병력
한편 이스라엘의 온라인 뉴스 사이트 Ynet(3월24일)은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소식통은 미국이 4월9일을 전쟁 종료 시점으로 설정했다고 전했다. 트럼프는 종전 직후인 이스라엘 독립기념일(4월21일)에 예루살렘을 방문해 ‘이스라엘 상’을 받을 수도 있다.” 트럼프의 전쟁 목표는 자기 개인이 ‘승자’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부실한 전쟁 준비와 허술한 출구전략을 보면, 트럼프에게 ‘큰 그림’은 없는 듯하다.

폴 크루그먼은 서브스택에 올린 게시물에 이렇게 썼다. “트럼프는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트럼프는 ‘곧 평화를 위한 합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외치는 동시에 특수부대 등 8000여 명에 달하는 지상군 병력을 이란 부근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그중 2500여 명의 미 해병대가 3월28일(현지 시각) 중동에 도착했다. 나머지는 4월 중순쯤 가세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동에 주둔한 미군 병력은 5만 명에 달한다. 추가 파견 병력이 배치되면 약 6만 명 수준으로 늘어날 것이다. 트럼프의 협상 드라이브가 지상군 병력 투입을 위한 시간 벌기라는 의심이 나오는 이유다. 피트 헤그세스 전쟁부 장관은 기자들에게 “우리는 폭탄으로 협상한다”라고 말했다.
미국 의회의 강경파나 ‘트럼프 이너서클’에서는 미 지상군이 하르그섬(이란 원유 수출의 90%를 담당하는 석유 수출 터미널)을 점령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선동해왔다. 그들은 심지어 하르그섬에서 벌일 작전을 2차 대전 당시 이오지마 전투에 빗대고 있다. 미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약 6800명이 전사했다. 지난 3월22일 미국 공화당 매파인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친트럼프 방송인 〈폭스뉴스〉 좌담에 나가 “해병대 투입으로 이란 석유 자원의 핵심인 하르그섬을 점령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진행자는 “일단 섬에 들어가면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공격, 보급 차단 등으로 끔찍한 소모전이 될 수 있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그레이엄은 “방구석 훈수꾼(armchair quarterback) 같은 소리 하시네”라고 비웃으며, “우리는 이오지마도 해냈다. 이번에도 할 수 있다(We did Iwo Jima. We can do this)”라고 반박했다. 다음 날, 폭스뉴스의 전 간판 앵커로 지금은 개인 방송을 하고 있는 메긴 켈리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욕설까지 보태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그레이엄을 거세게 비난했다. “자식도 없는 인간이, 자기 아들딸을 전장에 보낼 일도 없으니 저딴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겠지.”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3월27일(현지 시각)에도, 휴전을 도출하기 위해 이란 지도부와 ‘간접 협상’이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예맨의 친이란 세력인 후티 반군은 3월28일, 이번 전쟁에 공식 참전을 선언하며 이스라엘로 미사일을 발사했다. 후티 반군은 중동 산유국들의 원유가 유럽으로 향하는 길목(바브엘만데브 해협→홍해→수에즈운하)의 항행까지 방해할 가능성이 있다. 이미 가자지구 전쟁 당시 후티는 홍해 경유 선박들을 위협하며 국제 해운을 교란한 바 있다. 후티 군 대변인 야히야 사리에는 “이 공격은 침략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후티가 바브엘만데브 해협 봉쇄에 나선다면 글로벌 시장은 추가적인 리스크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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