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재야’ 장기표 암 투병 중 별세…“팬덤 정치 횡행 나라 망하는 게 아닐까 우려”
“죽음은 두렵지 않다. 항암도 안 한다…정치로 모두가 행복한 세상 만들지 못해”
“집권욕 사로잡힌 여야 적대적 공생관계가 나라와 민생 거덜내”
‘영원한 재야’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이 22일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유족 등에 따르면 장 원장은 이날 오전 1시 35분경 입원 중이던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담낭암 투병 중이던 고인은 발견 당시 4기였으며 입원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장 원장은 지난 7월 17일 페이스북에 친구·지지자에게 쓴 편지를 올리며 담낭암 말기 진단 사실을 공개한 뒤 병원에 입원했다.
1945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마산공고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 후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접하면서 학생운동과 노동 운동에 투신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와는 한동안 도봉구 쌍문동 같은 동네에 살며 노동운동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민청학련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민중당 사건 등으로 9년간 수감 생활을 했고 12년간 수배 생활을 했다.
숱한 수감·도망 생활에도 그는 김영삼 정부가 민주화 운동 관련자 보상법에 따라 민주화 보상금을 지급했지만 보상금을 일절 수령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는 “누구나 자기 영역에서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데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보상금을 받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2019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국민 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 안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장 원장은 지난 7월 페이스북에 올린 편지에서 투병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는 “당혹스럽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한 만큼 했으며, 또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했다. 이어 “자연의 순환질서 곧 자연의 이법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해온 사람이기에 자연의 이법에 따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했다.
장 원장은 “과도한 양극화, 위화감과 패배 의식, 높은 물가와 과다한 부채, 온갖 사건 사고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지만 ‘앞으로 더 살기 어려운 나라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해 온다”며 “이를 극복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정치는 ‘무지의 광란’이라 불러 마땅할 팬덤 정치가 횡행해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고 했다. 그는 “물극즉반(物極則反·극에 도달하면 원위치로 돌아온다)의 세상 이치처럼 이를 극복할 대반전이 일어나길 기대할 뿐”이라고 했다.
지난달 언론 인터뷰에서도 장 원장은 “죽음은 두렵지 않다. 항암도 안 한다”고 했다. 다만 “정치로 모두가 행복한 세상 만들지 못하고 가는 것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장 원장은 지난 4·10 총선 이후 석달을 밤새워 ‘위기의 한국-추락이냐 도약이냐’를 집필했다. 그는 책에서 “비전도 전략도 없이 오직 집권욕에만 사로잡힌 여야가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뤄 나라와 민생을 거덜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도덕성과 인간성을 회복하지 않고는 이 나라에 미래는 없다고 했다.
재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1989년 민중당 창당에 앞장서면서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해 개혁신당, 한국사회민주당, 녹색사민당, 새정치연대 등을 창당했다. 하지만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15·16대 총선, 2002년 재보궐 선거, 이어 17·19·21대까지 총 7차례 선거에서 모두 떨어졌다. 21대 총선에서는 보수정당(미래통합당) 후보로까지 옮겨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세 차례의 대통령 선거도 출마를 선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평생 노동·시민운동에 헌신해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린 그는 결국 제도권 정계로는 진출하지 못해 ‘영원한 재야’라는 별명을 얻었다.
최근에는 ‘신문명정책연구원’을 만들어 저술과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 등에 집중했다.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로도 활동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무하 씨와 딸 2명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차려질 예정이다. 조문은 오후 2시부터다.
정충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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