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9관왕’ 안세영, 왕즈이 42분 완파…프랑스오픈 3번째 정상

프랑스 세숑세비녜의 마지막 밤, 안세영은 결승 코트에서 믿음 하나만 들고 나왔다. 전날 ‘천적’으로 불리던 천위페이를 87분 접전 끝에 눌렀으니 체력은 비었을 법했다. 하지만 안세영은 그런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세계 2위 왕즈위를 상대로 42분 만에 2-0(21-13, 21-7) 완승. 올해만 아홉 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왜 세계 1위인가”를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설명했다.

경기 흐름은 깔끔했다. 1게임 9-9에서부터 톤이 달라졌다. 그 전까진 서로가 서로의 리듬을 시험하는 시간이었다면, 동점 이후는 안세영의 시간이었다. 네트를 스치는 짧은 볼로 왕즈위를 앞으로 끌어내고, 뒤로 길게 밀며 숨을 빼놓더니, 반 걸음 늦게 오는 타이밍에 대각 스매시를 꽂았다. 점수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막판엔 5점을 연달아 쓸어 담으며 첫 게임을 안정적으로 정리했다. 2게임은 더 단순했다. 시작하자마자 5-0, 이어 7-3에서 6연속 득점. 왕즈이가 따라붙을 틈 자체가 사라졌다. 결승전이라기보다 교과서 같은 ‘리드 관리’였다.

이 완승의 배경엔 하루 전 준결승이 있다. 안세영은 천위페이를 상대로 23-21, 18-21, 21-16. 밀리고 당기고, 다시 밀리는 흐름 속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빛났다. 경기 중반까지 이어진 길고 치열한 랠리에서 일단 버티고, 상대의 샷이 살짝 들리는 순간 반 박자 빠르게 카운터를 꽂는 특유의 전술이 적중했다. 무엇보다 3게임 14-15에서 5연속 득점으로 흐름을 끊어 잡은 장면은 ‘승부를 아는’ 1위의 감각을 보여줬다. 그 고비를 넘겼기에 결승은 오히려 가벼웠다.

왕즈이와의 상성 이야기는 이미 익숙하다. 통산 전적 15승 4패, 올 시즌엔 맞붙을 때마다 승리했다. 그중 상당수가 결승이었다는 점이 더 의미 있다. 대회 마지막 날, 가장 많은 관중 앞에서, 가장 큰 압박을 안고도 같은 해법이 반복해서 통한다는 건 결국 ‘완성도’ 문제다. 왕즈이는 직선 스피드와 코너 정확도가 좋은 선수지만, 안세영은 그 라인을 얇게 깎아 먹는다. 한 걸음 미리 서서 각을 줄이고, 받아낸 공을 다시 네트 앞으로 ‘툭’ 떨궈 주면 랠리의 주인이 바뀐다. 상대가 무리하면 범실, 참으면 뒤가 빈다. 이 간단한 도식이 한 시즌 내내 계속됐다.

숫자로도 설명할 수 있다. 올해 안세영은 국제대회 13번 나가 9번 우승했다. 슈퍼 1000 세 대회(말레이시아오픈·전영오픈·인도네시아오픈), 슈퍼 750 다섯 대회(인도오픈·일본오픈·중국오픈·덴마크오픈·프랑스오픈), 슈퍼 300 오를레앙 마스터스까지. ‘큰 대회에 강하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큰 대회에서 강했다’는 말이 더 맞다. 게다가 프랑스오픈은 2019년, 2024년에 이어 통산 세 번째 우승. 유럽 원정에서 2주 연속(덴마크→프랑스) 정상에 올랐으니 흐름도 완벽하다.

전술 측면에서 보면, 이번 프랑스오픈의 키워드는 세 가지였다. 첫째, 리턴 첫 접점의 질. 안세영은 상대 서브를 짧게 낮추거나 길게 찢으며 초구부터 주도권을 잡았다. 둘째, 랠리 길이 조절. 길게 가야 할 땐 질식 수비로 숨을 끊고, 짧게 끝낼 땐 하프 스매시로 템포를 끊었다. 셋째, 득점 루트의 균형. 네트 앞 헤어핀, 코트 깊은 곳을 찌르는 클리어, 그리고 그 사이를 찌르는 대각/직선 스매시가 고르게 섞였다. 그래서 상대가 어느 한 루트에 대비할 시간 자체가 없었다.

체력과 멘탈은 말할 것도 없다. 8강에서 가오팡제를 상대로 1게임을 내주고도 2·3게임을 가져온 경기는 상징적이었다. 상대가 경기 도중 코트에 드러누울 정도로 지쳤을 때도, 안세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수비로 버텨 흐름을 가져오고, 상대가 낸 긴 한숨 위에 점수를 쌓는다. ‘질식 수비’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프랑스 관중들 앞에서 또 한 번 증명했다.

이번 우승으로 역사의 문도 조금 더 열렸다. 슈퍼 750 단일 시즌 5회 우승이라는 진기록은 월드투어 체제 출범 이후 처음 나왔다. 덴마크오픈을 잡으며 이미 슈퍼 750 전 대회를 한 번씩 우승한 최초의 단식 선수 타이틀을 얻었고, 곧바로 프랑스오픈까지 연달아 품에 안았다. 상금도 의미 있는 이정표를 넘겼다. 올 시즌 누적 상금이 10억 원을 넘어섰다는 소식은, 성적과 시장 가치가 함께 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남은 건 두 대회. 11월 호주오픈, 12월 월드투어 파이널. 하나만 더 들어도 스스로 가지고 있는 여자 단식 단일 시즌 최다 우승 기록(9회)을 바로 경신하고, 둘 다 들어올리면 남자부의 전설 모모타 겐토가 2019년에 세운 한 시즌 11회 우승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기록이 전부는 아니지만, 지금의 페이스라면 충분히 노려볼 만하다. 무엇보다 컨디션 관리, 첫 볼 집중, 결승 당일의 과감함이라는 세 축이 올해 내내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안세영의 경기를 보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쉬워 보인다.” 사실 그만큼 어려운 말도 없다. 상대 샷의 회전과 각, 높이를 미리 읽고 한 박자 앞에 서기 위해서는 수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한다. 오늘 42분의 완승은 그 보이지 않는 반복의 산물이다. 코트 바깥에선 한 번의 포효와 한 장의 트로피 사진으로 끝나지만, 코트 안에서는 리시브 각도 몇 도, 스텝 반 발, 라켓 면 1cm가 모든 걸 갈라놓는다. 안세영은 그 1cm를 매일 조금씩 벌려 온 선수다.

그리고 이 우승은 개인의 기쁨을 넘어 한국 배드민턴의 동력으로 번진다. 같은 프랑스오픈에서 김원호–서승재가 남자복식 결승에 오르고(이후 우승 도전), 여자복식 진영도 계속해서 새로운 조합과 전술을 시험하고 있다. 에이스가 맨 앞에서 길을 내고, 다른 종목이 그 길을 넓힌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면 내년 시즌의 그림은 더 단단해진다.

마지막으로, 왕즈이를 상대로 한 일방적 승부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정답을 찾은 상대에게는, 또 다른 문제를 내라.” 안세영은 상대가 준비해 온 답안을 경기 중간에 무력화한다. 템포를 바꾸고, 코스를 뒤틀고, 길이를 조절한다. 결승에서 9-9 이후 급격히 벌어진 차이는 바로 그 순간의 문제 출제였다. 왕즈이는 속도를 올렸지만, 안세영은 속도를 바꾸었다. 그래서 21-7이라는 스코어가 현실이 됐다.

아홉 번째 트로피를 들고도 안세영은 크게 요란하지 않았다. 짧게 포효하고, 스태프와 포옹하고,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담백함이 이 선수의 힘이다. 화려한 말 대신 다음 대회 준비로 들어가는 루틴, 그 루틴이 다시 한 번 새 역사를 데려올지, 우리는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면 된다. 지금의 흐름이라면, 또 한 번 “쉬워 보이는” 우승이 나와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어려운 일을, 이 선수는 해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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