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10>] 후순위채 콜옵션 리스크 또다시 부각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전이됐다. 국제 금융 시장이 유동성 고갈과 자금 경색으로 신음하던 2009년 비교적 안전하게 여겨졌던 국내 은행 시스템을 뒤흔든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2009년 2월 11일 국내 굴지의 A 은행이 외화 후순위채 4억달러(약 5300억원)의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은행도 일반 기업과 마찬가지로 ‘자기 돈(자본)’과 ‘남의 돈(부채)’을 끌어다가 장사를 한다. 은행이 파산하면 부채를 먼저 채권자에게 갚고, 남는 돈이 있으면 자본을 댄 주주에게 상환한다. 하지만 금융 자본주의가 고도화하면서 은행들이 재주를 부리게 된다. ‘내 돈’과 ‘남의 돈’의 중간 지대에 있는 ‘이도 저도 아닌 돈’, 즉 신종자본증권(하이브리드증권)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표적인 신종자본증권으로는 후순위채와 우선주가 있다. 후순위채는 선순위채보다 후순위라는 의미고, 우선주는 보통주에 비해 순위가 우선한다는 의미다. 물론 후순위채와 우선주는 변제와 배당 순위에 따라 그 등급을 보다 세분화할 수 있다.
은행과 보험에 대한 국제적 규제 기준인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과 지급여력비율은 알고 보면 일종의 레버리지(leverage) 비율이다. 레버리지란 자기 자본을 지렛대로 해서 타인 자본(부채)을 이용하는 재무관리 방법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BIS 자기자본비율이 8%라는 것은 위험가중자산이 100이고 자기 자본이 8이라는 의미이므로, 결국 자기 자본의 12.5배까지 타인 자본을 통한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이때 지렛대가 되는 자기 자본에는 전통적인 보통주, 우선주 이외에 후순위채(신종자본증권・하이브리드증권)가 포함된다.
A 은행 사건에서 문제가 된 돈은 후순위채, 즉 다른 채무에 비해 변제 순위가 밀리는 채무였다. 후순위채의 콜옵션(call option)이란 후순위채를 ‘살 수 있는(call) 권리(선택권·option)’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후순위채에 부가된 콜옵션이란 후순위채 발행인(채무자)이 자신의 후순위채(채무)를 되살 수 있는 권리, 즉 ‘채무의 조기 상환권’을 의미한다. 이처럼 금융 전문가들은 쉬운 말을 두고 어려운 말을 만들어 쓰기를 좋아한다.
2009년 콜옵션 사태
2009년 2월 11일 국내 A 은행이 외화 후순위채 4억달러의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한 결정, 즉 채무의 조기 상환을 거부한 것은 어려운 시장 상황과 경제 여건을 고려한 나름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A 은행의 후순위채 발행 금리는 5.75%였고 콜옵션을 포기하고 스텝업(step up·가산금리)을 적용하더라도 이자 부담이 5.81%에 불과한 반면, 후순위채를 조기 상환하고 재발행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두 배가 넘는 조달 비용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국제 금융 시장의 조달 금리는 이미 10%대를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국제 금융 시장에서는 후순위채의 콜옵션 행사 기한이 도래하면 발행인이 콜옵션을 행사하는 것, 즉 채무를 조기 상환하는 것이 시장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콜옵션 행사는 하나의 불문율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계약서의 문구만 보면 콜옵션은 후순위채 발행인의 권리처럼 보이지만, 시장 관행에 따르면 콜옵션은 발행인의 의무에 해당하는 것이다.
당시 외국계 투자은행은 “조기 매입을 해 줄 것을 기대하던 투자자들이 A 은행의 이 같은 결정에 화가 많이 났다. 통념을 깸으로써 신뢰를 잃어버렸다. 향후 자본 확충을 위해 A 은행이 다시 외화 후순위채 발행에 나설 경우 투자자들이 외면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한국계 은행들의 외화 후순위채와 일반 외화 채권 발행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한국물 전체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 있다”고 논평한 바 있다.
A 은행이 외화 후순위채 콜옵션을 이행하지 않기로 하면서 A 은행뿐 아니라 국내 외화 채권 발행자들에게 후폭풍이 몰려들었다. 향후 국제 금융 시장에서 한국물의 신용 스프레드 상승은 물론 투자 기피 현상이 나타날까 우려됐고,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이 국내 은행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결국 A 은행이 포기했던 콜옵션을 이행하고, 후순위채를 신속하게 상환함으로써 급박한 사태가 일단락됐다.
이보다 몇 개월 전인 2008년 12월 독일의 도이치뱅크(Deutsche Bank)가 이자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10억유로(약 1조3800억원)의 후순위채에 대한 콜옵션을 포기, 즉 조기 상환을 거부함으로써 크레디트라인(자금 차입 경로)이 끊어지고 유럽의 후순위채 시장에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다. 물론 도이치뱅크도 포기했던 콜옵션을 행사하고 후순위채를 조기상환함으로써 문제를 수습했지만 이후 한동안은 높아진 조달 금리에 고통받아야 했다. 되돌아보건대 A 은행 사건은 조금만 더 국제 금융 동향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로이터, 블룸버그 등에 실린 도이치뱅크 사례를 살펴보았더라면 충분히 회피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2022년 콜옵션 데자뷔
2022년 11월 2일 B 생명은 5억달러(약 6600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후순위채)에 대한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발표를 했다. 그 이유는 “변동성이 커진 국내외 매크로 환경과 갑작스러운 기준금리 변화 등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었다. B 생명은 외화 후순위채 시장의 조달 금리가 터무니 없이 높아졌으니, 기존 저금리 대출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조기상환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네 차례 연속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밟음으로써 글로벌 금리 상승 기조가 장기화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당총서기 3연임 결정 이후 ‘차이나 런(글로벌 자본의 중국 이탈)’이 발생하면서 세계 채권 시장에서 아시아물 수요는 급격히 줄고 있다. 더욱이 레고랜드 사태로 국내 채권 시장이 대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B 생명이 외화 후순위채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한국물의 대외신인도가 하락하고 채권 금리가 상승(채권 가격 하락)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 사건의 여파인지 C 증권의 외화채 발행 일정이 연기됐고, D 은행과 E 은행의 캥거루본드(호주달러채권) 발행을 위한 투자자 모집이 여의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위원회는 이례적으로 보고 자료를 내고 “B 생명 조기 상환권 미행사에 따른 영향과 조기상환을 위한 자금 상황 및 해외 채권 차환 발행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금융위원회는 물론 기재부와 금융감독원은 B 생명 조기상환권 행사 계획을 인지, 지속적으로 소통해왔다”며 “채권 발행 당사자 간 약정대로 조건을 협의하고 조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제주 대정향교에 가면 의문당(疑問堂)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어린 학동들에게 ‘항상 의문을 품고 살라’는 의미에서 직접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유효한 지혜로운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현자를 기리는 마음에서 우리도 한번 이 시점에서 의문을 가져보도록 하자. 2009년과 유사한 사건이 2022년에 발생했다면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망각과 태만의 결과일까. 아니면 금융위원회의 논평대로 합리적인 선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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