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의 인물과 식물]김조순과 단풍나무
‘왕실의 근친이나 신하가 강력한 권세를 잡고 온갖 정사를 마음대로 하는 정치’를 세도정치라 한다. 조선 후기에 정조의 총애를 받고 순조의 장인이 되었던 김조순은 세도정치의 대명사로 입에 오르내린다. 그런데 그의 문집 <풍고집>을 읽어보면, 그 흔한 충효 등 ‘지당한 말씀’보다 삶의 희로애락과 자연에 대한 사유, 친구들과의 우정이나 자식에 대한 사랑 등이 주로 담겨 있다. 정치와 이념의 색깔을 뺀 담박하고 솔직한 문예 취향의 단상이 대부분이다. 오랫동안 권력과 세도의 중심에 있던 인물로서는 의외의 속내다.
그는 나이 마흔 전후에 삼청동에 별서인 옥호정을 조성했다. 현재 청와대 인근 국무총리 공관 뒤편인데, 한양 한복판에 그만큼 넓은 부지의 별서도 드물다. 원래 기거하던 집은 지금의 안국역 근처였다. 옥호정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삼청동 계곡에 자리 잡아 당시에도 매우 호젓하고 특별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그는 홀로 풍광을 즐기거나 가까운 벗들과 연회나 시회를 열기도 했다.
옥호정은 ‘옥호정도’라는 채색화가 남아 있어 전체 모습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사대부 원림을 생생하고 세밀하게 묘사한 이 그림은 거의 드론을 띄워놓고 보는 21세기 조감도라고 할 만하다.
‘옥호정도’에는 후원에 단풍나무를 촘촘히 심고 단풍대를 조성한 것이 보인다. 김조순은 친구 서영보와 이만수 등과 함께 금강산과 묘향산의 단풍나무에 관한 우정 어린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서영보가 금강산에서 편지와 함께 부쳐온 단풍잎을 그는 벼루함에 10년 넘게 보관하면서, 가끔 꺼내 보며 친구들과의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단풍잎을 주고받으며 서영보와 이만수와의 우정을 돈독히 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단풍대를 조성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의 관계를 ‘신교(神交)’라 했으니, 그들의 우정이 얼마나 도타웠는지 알 수 있다. 공교롭게도 김조순의 호가 ‘단풍나무 언덕’을 뜻하는 풍고(楓皐)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순조실록>에 ‘성정이 어질고 후덕하며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은 인물’이라고 평한 것처럼 김조순은 자신이 직접 앞장서서 권세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순조는 그의 죽음에 대해 “물을 건너는데, 노를 잃은 듯하다”며 애통해했다.
그럼에도 그가 서막을 열었던 세도정치의 힘은 물귀신과도 같아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과연 그 끝은 어딜지 자못 궁금하다.
이선 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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