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신차 출고 당시 카탈로그에 적힌 제원표만 믿고 중고 전기차를 샀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정 거리를 주행한 이후 배터리 잔존 성능과 수명 유지력이 모델별로 천차만별인 데다 동일한 모델 안에서도 개체 간 성능 격차가 극단적으로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배터리 진단 전문기업 아빌루(AVILOO)가 전 세계 50만 건 이상의 실측 데이터를 분석해 발표한 '공인 중고 EV 배터리 리포트'는 제조사의 초기 스펙과 실제 운행 후 성능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차 상태에서는 1회 충전 주행거리나 배터리 용량 차이가 단순한 스펙의 우열로 여겨지지만 실제 도로를 5만km, 10만km, 15만km씩 달린 이후의 성능 유지력(SoH, State of Health)은 모델의 태생적 설계와 용량에 따라 완전히 갈렸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배터리 용량에서 비롯됐다. 40kWh 안팎의 상대적으로 작은 배터리를 탑재한 닛산 리프(ZE1)는 동일한 주행거리를 소화하기 위해 충·방전 사이클을 대용량 차량보다 2배 가까이 자주 거쳐야 했다.

반면 70kWh 이상의 대용량 배터리와 고도화된 수랭식 열관리 시스템을 적용한 모델들은 장거리 주행 후에도 견고한 방어력을 보였다. 현대차 아이오닉 5(72.6kWh)는 15만km 누적 주행 시점에서도 중앙값 SoH가 92.8%를 기록해 조사 대상 20개 모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수명 유지력을 입증했다.
아이오닉 5는 특히 5만km 누적 주행거리에서 99.15%, 10만km 98.42%를 기록해 경쟁 모델 대비 압도적인 성능 유지력을 보여줬다. 폭스바겐 ID.4(77kWh, 90.6%)와 테슬라 모델 Y(78.8kWh, 90.3%) 역시 90%대를 지켜내며 15만km를 달린 후에도 350~360km 수준의 실주행거리를 확보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모델 간 차이를 넘어 '동일 모델 내 개체 간 편차'가 꽤 크다는 사실이다. 일반 소비자의 경우 같은 모델이면 모든 차량이 동일한 성능을 낼 것으로 기대하지만 실제 중고차 시장에 나온 매물들의 상태는 전 차주의 사용 환경에 따라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아빌루의 실측 데이터에 따르면 주행거리가 15만km에 도달했을 때 같은 모델이라도 최상위 차량과 최하위 차량 간의 잔존수명 편차가 최대 13.5%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수명 유지력이 우수했던 아이오닉 5조차 15만km 시점에서는 개체 간 편차가 12%포인트 이상 나타났고 테슬라 모델 Y와 폭스바겐 ID.4도 11~12%포인트 안팎의 격차를 보였다.
SoH 10~13%포인트의 차이는 전기차 운행 환경에서 1회 충전 시 40~46km에 달하는 주행거리 격차를 유발한다. 동일한 연식과 주행거리를 가진 중고차를 샀음에도 어떤 차는 한 번 충전으로 여유 있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반면 어떤 차는 고속도로 충전소를 한 번 더 들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중고 전기차를 구매할 때는 제조사가 표시한 신차 제원이나 차량 클러스터에 표기되는 주행가능거리(DTE)만 믿어서는 안된다. 계기판 수치는 직전 주행 패턴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고 배터리관리시스템(BMS)의 자체 진단값 역시 제조사의 소프트웨어 보정 로직이 개입돼 실제 물리적 배터리 열화 상태를 가리는 경우가 많다.
중고차 거래시 성능기록부 외에 배터리 SoH, 셀 전압, 절연저항 등의 전기차 전용 진단 결과지를 반드시 요구하거나 확인해야 하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특히 차량 OBD 포트를 통해 배터리 셀 간 전압 편차, 전력 적산량, 충전 사이클 등을 다각도로 역산하는 독립적인 정밀 진단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배터리는 전기차 잔존가치의 절반 이상을 좌우하는 최고가 핵심 부품이다. 같은 모델이라도 주행 습관과 관리 상태, 주행거리 누적에 따른 성능 저하 수준이 다른 만큼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수백만 원에 달하는 금전적 손실을 떠안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