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맛 알았으면 안죽었을까? ‘더글로리 속 와인’에 감춰진 진실 [전형민의 와인프릭]
지난 주말,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드라마 <더 글로리>의 두 번째 시즌이 공개됐습니다. 시즌2에서는 치밀하게 준비해온 문동은의 복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는데요. 가해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광기 속에서 자멸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피해자를 제외하면 모두가 무감각했던 학교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킨 것만으로도 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수작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시즌2가 공개된 후 와인을 잘 모르는 지인들로부터 ‘손명오를 때린 술병은 어떤 술병이냐’는 물음부터, 전재준의 셀러에 비춰지는 와인들까지 드라마에 나왔던 술들에 대해 묻는 질문을 여럿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박연진과 전재준 등 가해자들이 이른바 ‘있는 집 자식들’인데다, 드라마에서 이따금 와인이 등장하다보니 궁금할 법도 한데요.
일부 ‘옥의 티’가 존재합니다만, 제작진은 극 중에 보여지는 와인 한 병도 허투루 준비하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등장했던 와인들이 어쩌면 와인 주인의 취향이나 성격을 암시하는 듯해서 나름 의미가 있어보였거든요. 오늘은 전국민이 입을 모아 ‘연진아’를 외치게 만든 드라마, 더 글로리 속 와인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내용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아직 드라마를 안보셨다면 주의해주세요)
다만 병 마개의 독특한 크라운 모양과 레이블에 적힌 ‘62’를 통해 유추해보면, 제작진은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병당 400만원이 넘는 62 건 살루트를 연상시키도록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골프장을 물려받을 정도로 금수저인 전재준이 마시는 술이니까 무조건 비싸고 화려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겠죠.
이 때문에 와인러버들은 우스갯소리로 ‘만약 명오가 와인에 취미가 있어서 자기 취향의 와인을 골라놨다면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가정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최고급 위스키가 담긴 무겁고 단단한 도자기병이 아니라 한두번 내리치면 부숴져버릴 평범한 유리 와인병을 골랐다면, 명오는 어쩌면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얘깁니다.
“폼마..디? 뭐야 씨.. 싸우..비, X발 읽지도 못하겠네. 뭐가 제일 비싼거야? 싼 거 먹으면 X나 억울한데.. X발 모르겠다. 그래, 모를 때는 안전빵이지”
은근슬쩍 술병들을 보여주며 지나가는 이 장면에서 ‘폼마디’라고 읽은 단어는 뽀마르(Pommard)라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마을 이름입니다. 부르고뉴 지역은 와인병 레이블에 마을이나 밭의 이름을 붙여서 와인의 원재료가 되는 포도의 퀄리티를 보증하는데요. 뽀마르는 최상급으로 불리는 그랑크뤼(Grand Cru)는 없지만, 그럼에도 꽤 상급으로 취급됩니다.
구체적으로 명오가 집었던 와인은 루이 자도(Louis Jadot)라는 유명 양조자가 부르고뉴 지방 뽀마르 마을의 한 밭에서 자란 피노누아 품종으로 빚은 루이 자도, 뽀마르 프리미에 크뤼, 끌로 드 라 꼬마렌(Louis Jadot, Pommard 1er Cru, Clos de la Comaraine)이라는 와인입니다. 국내 소비자가 10만원 내외로 구할 수 있는 녀석이죠.
명오가 뒤이어 발음한 ‘싸우비’는 소비뇽 블랑, 혹은 까베르네 소비뇽의 소비뇽(Sauvignon) 중 앞부분을 읽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뒤이어 나오는 클로즈업 화면에서는 어렴풋하게 칠레의 자존심, 알마비바(Almaviva)가 등장합니다. 칠레에서 자란 까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와인으로 국내 소비자가 30만원대의 와인이죠. 프랑스 보르도에서 특급 와인을 양조하는 ‘바론 필립 드 로췰드’의 노하우와 칠레의 대표 와인 양조 회사인 ‘콘차이토로’가 만나 천혜의 자연 조건인 칠레에서 빚어내 걸작으로 불립니다.
이 외에도 짧게 등장하지만 전재준이 혼자 홀짝이던 프랜치 콜라주(Franchie Collage)나 그레이스 하비스트 토로 로즈(Grace‘s Harvest Toro, Rose)도 있습니다.
만약 제가 재준이처럼 돈이 많았다면,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와인’이라고 불리는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DRC) 같은 부르고뉴의 그랑크뤼 피노누아들이나, 보르도 5대 샤또의 와인, 돔 페리뇽(Dom Perignon)이나 크룩(Krug) 같은 고급 빈티지 샴페인을 가득 쌓아놓고 마실텐데요.
심지어 드라마에 나왔던 두 와인은 가장 고전이라는 프랑스 부르고뉴산(産)과 신대륙 천혜의 조건을 갖춘 떠오르는 가성비의 강자 칠레산으로 극과 극을 달립니다. 재준이의 와인 취향이 한 곳에 국한돼있지 않고 구대륙과 신대륙에 대한 편견도 없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와인이 기호품이다보니 마시면 마실수록 자신의 취향이란 게 생기는 법인데요. 재준이의 와인 취향은 부를 원천으로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지닌 것으로 보입입니다. 여기에 작가의 의도가 반영됐다고 보고 상상력을 조금 더 보태본다면, 진짜 찐금수저인 재준이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온갖 귀하다는 와인들을 물 마시듯 경험해본 후 결론은 누구와 함께하던지 편하게 홀짝일 수 있는 적당한 수준의 와인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된 재준이가, 상대방이 가장 편해야할 접객실이자 피팅룸에 그런 적당히 소탈한(?) 녀석들을 구비해놓았다는 설정이 아닐지…
운전기사가 자신에게 우산을 잠시 들어달라고 하는 대목에서 이미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하도영은, 와인을 꺼내서 내미는 비서에게 그 와인을 ‘가져가 마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 파악을 못하는 운전기사가 ‘저는 이런 걸 마셔본 적도 마실 줄도 모릅니다’라며 도로 하도영에게 내미죠. 여기서 하도영이 귀찮고 답답한듯이 내뱉는 대사가 재밌습니다.
“신 대표가 보낸 거면 백(만원) 이하는 아닐 겁니다. 들어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만 원짜리 와인을 한 병 사요. 치즈도 좀 사고. 그 만 원짜리 와인을 먼저 마시고, 그걸 마셔요. 그럼 마실 줄 알게 될 겁니다.”
맞는 말이지만, 요샛말로 묘하게 킹 받는 말투와 표정까지 하도영이 왜 나이스한 개X끼라고 불리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와인쟁이인 저는 이 대사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고가의 와인을 마시고 잘 느끼는 방법으로 이보다 더 간단명료하고 탁월한 방법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는 이걸 비교시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후각과 미각은 쉽게 지치기 때문에 강렬하고 직관적인 와인을 먼저 맛보면, 섬세한 매력이 있는 와인들의 진면목을 보기 힘들다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학원이나 공부 과정에서도 주로 쓰이고요. 전문가들은 같은 와인이더라도 연도별로 차이를 느끼기 위해 여러 빈티지를 주욱 늘어놓고 맛보는 버티컬 테이스팅(Vertical Tasting)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와인을 잘 모르는 친구들과 와인을 마실 때 와인의 맛과 향, 매력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이 방법을 변형해 사용하곤 합니다. 예컨대 첫번째는 상큼한 스파클링, 두번째는 피노누아나 산지오베제 등 아로마틱하고 여리여리한 와인, 세번째 병은 까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처럼 진하고 직관적인 품종을 준비하는 식이죠. 마무리로 달콤하고 깔끔한 소테른까지 추가한다면, 함께한 이들의 기억엔 와인을 곁들인 완벽한 한 끼로 남을 겁니다.
김은숙 작가는 ‘학폭의 가해자와 피해자 중 내가 어느 쪽이 됐으면 좋겠느냐’는 딸과의 대화에서 드라마의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듯 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물론 방관자까지, 그 어느 쪽도 영광(Glory)은 없다고요. 대다수 우리가 무감각했던 사회의 한 부분이 이번 기회를 통해 정화되기를 소망해봅니다. 또 다른 동은이가 생기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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