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위해 힘차게 울다가 중도에 막혀버렸다” 춘원 이광수
1950년 10월 25일 58세

식민지 시기 언론인이자 소설가 춘원 이광수(1892~1950)는 1991년에야 정확한 사망일이 밝혀졌다. 이광수는 6·25전쟁 직후 인민군에 의해 납북돼 1950년 10월 25일 평안남도 강계군 만포면 고개동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묘소를 평양시 삼석구역 원산리로 이장했다.
이 같은 사실은 미국에 거주하는 이광수의 3남 이영근씨가 1991년 7월 20일부터 열흘간 평양을 방문하고 성묘한 후 알려졌다.

이영근씨는 춘원의 묘소가 양지바른 산 중턱에 다른 무덤 6기와 함께 대리석 상석과 비석이 갖춰져 있었고, 잔디로 잘 다듬어져 있는 상태였다고 전했다. 춘원은 인민군에 이끌려 미군 공습을 피해 동굴이 많은 만포 고개리까지 끌려가던 중 지병인 폐결핵에 피로가 겹쳐 사망했다.
당시 평양의 춘원 묘는 1970년쯤 만포에서 이장했다고 이영근씨는 전했다. (1991년 8월 3일 자 23면) 당시 북한 측 안내자는 “친일은 했지만 상해 시대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모신 것”이라고 설명했다.(2000년 5월 11일 자 18면)
이광수는 “우리 문학사에 내장된 매우 불행한 행복”(장석주)이며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김현)이다. 이광수는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근대 문학 첫 장편소설 ‘무정’을 썼다. 반면 일제 말기 스스로 창씨개명을 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일제의 병사로 전쟁터에 나갈 것을 독려한 친일파로 1949년 반민특위에 붙잡혔다.

그러나 당대를 살았던 이들은 이광수를 단순히 ‘친일파’로 낙인찍을 수는 없다고 증언한다.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는 2005년 계간 ‘철학과 현실’ 가을호에서 “춘원 이광수를 친일 문인 운운하여 그를 매도하는 신문 기사를 대할 때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춘원을 나무랄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면서 “(오히려) 춘원은 나를 충직한 황국신민으로부터 한국 사람으로 만들어줬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유신 정권과 전두환 정권 때 각각 해직된 비판적 지식인이다. 그는 평생 스승으로 섬긴 함석헌의 글을 인용했다.
“육당, 춘원이 무엇인가?… 이 나라가 기울어지려 할 때, 이 민중이 고난에 빠지려 할 때, 그 불평을 잘 울라고 하늘이 세웠던 이들 아닌가? 그들은 참 잘 울었다. 그 소년 잡지, 그 역사, 그 단군론, 그 백두산 참관, 그 백팔번뇌, 그 무정, 그 개척자, 그 단종애사, 이순신, 원효, 이차돈, 그것이 다 이 민족을 위해 울고 이 나라를 위해 슬프게 힘 있게 우렁차게 운 것 아닌가?”
춘원보다 열 살 아래인 함석헌은 “그들을 위해 분해하고 아끼고 의아해하는 것은 그렇게 울던 그들이 내처 힘 있게 울지 않고 중도에 그 소리가 그만 막혀버렸기 때문”이라고 안타까워했다.(2005년 9월 6일 자 A23면)

2014년 92세였던 김우전 전 광복회장은 “내가 일본 교토(京都)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광수가 와서 학병(學兵)을 권하는 연설을 했어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 연설을 들으면서 나는 이광수를 친일(親日)이니,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소. 오히려 그분에게 민족의식을 느낄 수 있었어요”라고 했다.
그는 “나는 광복회 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고문인데, 친일파 문제 전반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요”라면서도 “춘원은 학병 종용을 한 게 친일의 큰 죄목인데, 내가 직접 그 연설을 들었기에 그렇지만 않다고 말하는 거요”라고 했다. (2014년 10월 20일 A28면)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일제 시대를 살아본 사람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의 친일파 개념은 판이한 것 같다”면서 “나는 우리 역사에서 어느 때라도 춘원 이광수에게 가장 타당한 자리매김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2018년 4월 7일 자 B2면)
이광수에 대한 ‘자리 매김’은 아직 타당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한국문인협회는 2016년 8월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를 기리는 문학상 제정을 발표했다가 “시대착오적 친일 미화를 중단하라”는 항의가 빗발쳐 결정을 철회했다.

미 육군 정보 당국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조만식·김성수·양주삼·윤치호와 함께 이광수에 대한 평가를 남겼다.
“춘원 이광수=교육을 잘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 작가이자 언론인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다. 조선문인협회 회장이며, 소년회 활동에 적극적이다. 1930년대 붙잡혀 투옥된 바 있으며, 일제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 석방된 후 일제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며, 이로 인해 이전까지 쌓아 왔던 영향력을 잃게 됐다.”(2008년 8월 9일 자 A2면)
말년에 친일 행위를 했기에 이전에 쓴 글을 모두 버려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이광수는 1910년 고향 평북 정주의 민족 학교인 오산학교 교사로 있을 때 교가를 지었다. 오산학교가 배출한 많은 인재가 이 교가를 부르며 우리 사회에 크게 기여했다.
“네 손이 솔갑고 힘도 크구나/ 불길도 만지고 돌도 주물러/ 새로운 누리를 짓고 말련다/ 네가 참 다섯 메의 아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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