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둥·포말까지 기가 막히네”…아찔하게 재현한 이 해상세계, 세계가 홀렸다 [퇴근 후 방구석 공방]
이승환 기자(presslee@mk.co.kr) 2024. 10. 5. 23:06
[퇴근 후 방구석 공방- 71화 ‘이원희 작가’]
짙은 바닷속을 가르는 어뢰. 급선회를 시도해보지만 피격된 U보트는 결국 격침되어 침몰합니다. 스크루가 뿜어내는 포말, 치솟는 거대한 물기둥, 그리고 매캐한 냄새까지 느껴질 듯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 이 모든 장면이 섬세한 손끝에서 생생히 재현됩니다.
지난 10년간, 바다와 배를 주제로 스케일 모형의 정교함과 역사적 서사를 작품 하나하나에 담아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기에 충분했던, 단순한 모형을 넘어선 깊은 몰입감을 경험하게 하는 해상 디오라마의 대가, ‘이원희 작가’를 만나봅니다.
장사상륙작전 잊혀진 영웅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미끼 작전이었던 ‘장사상륙작전’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임에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디오라마 작품으로 만들게 되었어요. 단 2주간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772명의 어린 학도병을 태운 문산호가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날 1950년 9월 14일, 장사리 해변 상륙 작전을 하게 됩니다.“
“폭풍우에 장사리 해변 70m 앞에서 문산호가 좌초되고 무작정 상륙을 시도 북괴의 총탄에 맞서 상륙을 시도한 학도병들의 희생 끝에 겨우 상륙에 성공하게 되고 북괴의 신경이 장사리로 끌려 인천 방어에 소홀하게 된 순간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됩니다.”
“장사상륙작전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극비 작전으로 작전 문서가 부재했고, 정규군이 아니라서 기록이 없었다고 해요.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했고 생존 대원들의 기억으로 전해지다가 97년 해군이 장사리 해변에 잠들어있던 문산호 잔해와 유해를 수습하게 되면서 알려지게 됩니다.”
“나라를 위해 장사리 해변에서 교복을 입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학도병들의 숭고한 죽음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작품으로 만들게 됐어요.”
함선의 매력에 푹 빠지다
“모형취미를 14년 10월에 시작했으니 정확히 10년 됐네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처음엔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만들었었거든요. 손 가는 데로 막 만드니 당연히 형편없었어요.”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서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많아져 이것저것 취미생활을 해보려고 했는데 맞는걸 찾는게 쉽지 않았어요. 그러다 어린 시절 봤던 스케일모형 잡지가 문득 떠올라 모형을 바로 시작했죠. 처음부터 그냥 배를 만들었어요.”
“당시 바다 배경의 디오라마도 별로 없었고 LED를 심고 폭발 표현하는 건 당시 모형계에서 금기시될 정도로 쉽지 않았거든요. 저는 기본도 정보도 없었기에 그냥 그런 것들을 시도했었어요. 당연히 잘 될 리가 없었고요. ‘부모 잘 만난 돈 많은 초딩인가’ ‘코미디 작품이다’ ‘왜 돈을 갖다 버리냐’며 비아냥대는 댓글도 달렸었죠.”
“함선 같은 경우는 다른 스케일모형보다도 더 디테일 하거든요. 본체가 워낙 거대하잖아요. 그걸 줄이고 줄이니 디테일을 표현하려면 끝도 없죠. 그런게 매력으로 다가 왔던것 같아요. 사실 디테일 표현에 그렇게 자신있는 편은 아니에요. 디테일은 저보다 훨씬 잘하시는 분들이 많고요.”
역동적인 해상 디오라마의 탄생
“배만 만들어 전시하다 보니 좀 심심해서 바다 배경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각 함선들의 스토리를 하나씩 알게 되면서 이야기를 담은 디오라마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에게 보여줄 스토리가 생기니 작품 하나하나가 살아나더라고요.”
“이후 정적인 장면보다 항해 장면이나 폭파 장면을 연출하면서 동적인 느낌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디오라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까지 꾸준히 작업하고 있어요. 영화의 한 장면 이라던지 역사적 사료도 찾아보고 유튜브 밀리터리 스토리 채널들도 보면서 에피소드 중 할 만하고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요.”
“2차 대전 배경은 전투 장면 자료사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위키나 미국 역사 사이트들을 보면 어디서 전투가 벌어졌고 어느 부분을 피격당했고 어느 정도 손상을 입었고 그런 것들을 대충 확인을 해보고 작업을 하게 되죠. 처음에는 이런 정보 없이 제작했다가 지적을 받기도 했었어요.”
“한번은 페이스북 작품을 올려놨는데 어느 외국인이 고증을 지적하더라고요. 배가 피격당한 부분이 반대편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하나 지적하더라고요. ‘1번 포탑이 아니라 3번 포탑이 터졌는데 잘못된 작품이다.’ 이런 식의 피드백이 계속되는 거죠.”
“처음에는 그런 지적들이 크게 부담이 없었는데 언젠가부터 제 작업들이 알려지고 외국 모형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도 받게 되면서 너무 신경 쓰이더라고요. ‘쟤 엉터리다!’ 이런 소리 듣기 싫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자료준비에 더 신경을 쓰고 있어요.”
디오라마 제작의 3요소
“처음 시작할 때 모형 키트의 유무를 체크하고 있으면 스토리를 잡고 구도를 구상합니다. 구도가 나와야 작품 크기가 나오거든요. 보관이나 이동이 가능한 크기인지를 체크하고 그 배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찾아 체크 해놓죠.”
“반대로 표현하고 싶은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 키트가 없으면 비슷한 배를 찾아 개조 하거나 3d 프린팅으로 제작하기도 해요. 스토리, 키트의 유무, 구조 3요소가 최우선 고려사항인 것 같네요.”
실패가 쌓이면 데이터가 된다
“물을 표현하는데 있어 ‘레진’의 효과는 획기적이었어요. 처음에는 다른 재료를 사용했었는데 늘 물표현이 안 산다는 느낌이었는데 지인을 통해 레진을 접하게 됐는데 그 투명한 물 느낌이 너무 좋더라고요. 거기에 솜을 이용해서 어뢰의 궤적을 시도했는데 기포와 물보라 느낌들이 살더라고요.”
“제가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게 어뢰 표현인데 성공하기까지 실패도 많이 했었어요. 처음 어뢰를 표현할 때 흰 막대를 꽂고 솜을 둘러 만들었는데 레진을 부어놓고 보니 그냥 막대기 꽂혀있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어뢰 같은 느낌이 없거나 어색하거나 솜을 너무 많이 썼거나 너무 적게 썼거나 실패 원인에 따라서 데이터를 조금씩 쌓아나갔어요.”
“실패 끝에 성공한 기쁨도 잠시 레진에 황변이 오더라고요. 최근엔 레진 가격도 많이 내렸는데 당시에는 상당히 고가였거든요. 그나마 저렴한걸 쓰다보니 변색이 오는 거였어요. 완전히 갈색으로 변해버린 경우도 있었구요. 그때부터 맞는 레진을 찾기 시작했어요.”
“이것도 써보고 저것도 써보고, 어떤 건 기포가 많이 발생하고, 어떤 건 발열이 높아서 킷이 녹아버리기도 하고요. 딱 맞는 재료를 찾는 데만 거의 2년이 걸렸어요. 레진 데이터 쌓은 것도 한 4~5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그냥 일반적인 바다 표현에 1cm 정도 두께라면 큰 문제가 없는데 잠수함 디오라마 만들 때는 레진이 몇 리터씩 필요하고 두꺼워지기 때문에 이런 데이터가 꼭 있어야 해요.”
“그렇게 어뢰 궤적, 발사, 폭파까지 표현이 가능하게 되면서 만들게 된 작품이 어뢰를 맞고 폭발하는 유보트예요. 커뮤니티에서 반응이 아주 뜨거웠죠.”
“물속에서 폭발하면 물기둥이 솟아오르잖아요. 요즘은 이 표현을 좀 더 개선하기 위해 재료를 찾고 있어요. 지금도 하고 있긴 한데 좀 더 자연스러운 표현을 원하거든요. 지금은 점토와 솜을 쓰는데, 물보라라고 하기엔 좀 푸석한 느낌이 있어 개선하고 싶은데 알맞은 재료를 찾는 게 좀 어렵네요.”
국제 대회 배틀쉽 부문 심사위원
“대만에서 국제 컨테스트를 개최하면서 모델러들을 대상으로 심사위원으로 뽑고 싶은 인물을 선정한 적이 있는데 그때 배틀쉽 부분에서 1등으로 뽑힌적이 있어요. 저도 좀 놀라긴 했는데 이후 말레이시아, 마카오, 중국 톈진 등에서 심사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어요.”
“동남아 쪽 모델쇼들이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졌어요. 말레이시아 ‘말콤쇼‘ 같은 경우 출품작 수가 국내보다 거의 3배 이상인 600점 이상 출품되고, 대만 같은 경우에는 1200점, 많을 때는 1600점까지도 출품되더라고요. 헝가리 ‘모손쇼’는 거의 3500점의 작품들이 나오거든요. 규모가 어마어마해요.”
“컨테스트가 전체적인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는 굉장히 효과적이긴 해요. 서로 경쟁하면서 실력이 올라가는 게 눈에 보여요.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기도 해서 심사결과에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도 있지만 발전에 있어 순기능이 더 크다고 봅니다. 한국 모델러들이 항상 그런 국제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는데 국내 대회들이 규모가 좀 더 커지고 국제대회가 되면 좋은데 쉽지는 않아 안타깝죠.”
목표는 디오라마로 대한민국 해군을 알리는 것
“대한민국 해군 프로젝트는 평생의 과제인 것 같아요. 한국 해군 함정 키트가 별로 없어요. 세종대왕함이 있긴 한데 그것도 중국회사에서 만든 거예요. 중국 회사 제품을 써서 대한민국 해군 함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만들면서도 조금 가슴이 아프긴 하더라고요. 아카데미 같은 곳에서 제품을 만들어주면 좋겠지만 기업은 시장성이 있어야 할 테니까요. 그게 좀 안타깝습니다.”
“명량해전, 한산대첩을 정밀하게 박물관 전시스케일 정도로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예전에 방송 촬영 때 명량해전을 촬영 전까지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3주만에 후다닥 만든 적이 있었는데 제대로 만들려면 적어도 두어달짜리인데 3주 안에 하다 보니 퀄리티가 많이 아쉬웠어요.”
“컨텐츠 하나를 그냥 허무하게 소모해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제대로 하고 싶은 거죠. 혼자서는 안 되고 프로젝트팀을 꾸려서 박물관이나 기관이나 협의해서 제대로 전시하고 알리는게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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