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의 전설'이 된 냉면집 사장님

아마추어 자전거 계의 전설 김팔용
주식으로 8000만원 날리고 만난 자전거
삶의 균형을 맞추는 계기가 된 교통사고

김팔용(53)씨는 자전거 동호인 사이에서 전설로 통한다. 김씨는 39살에 처음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연습 반년 만에 2004년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오르막으로 이뤄진 코스를 최단시간에 주파하는 기록경기)에 첫 출전 했다. 김씨는 수백~수천만원의 고급 자전거를 탄 참가자들 사이에서 80만원 짜리 중고 자전거로 그룹 1위를 했다.


이후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참가한 30여 개 대회에서 한번 일반부 2위 한 것을 제외하고 그가 속한 그룹 1위와 대회 통합 1위를 휩쓸었다. 힐클라임 대회는 연령대별(만 25세 이하 1그룹, 만 35세 이하 2그룹, 만 40세 이하 3그룹 등) 그룹으로 나눠 겨루는 대회다. 그의 경쟁자들은 조카뻘인 20~30대였다.


당시 각종 자전거 커뮤니티에서 김씨는 ‘괴물 동호인’ ‘힐클라임 레전드’라고 불렸다. 그와 자전거를 타며, 노하우를 전수받고 싶은 사람들이 직접 그가 살고 있는 강원도로 찾아오기도 했다. 지금도 그와 함께 페달을 밟고 싶어 강원도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출처: 본인 제공
김팔용씨

사실 그의 본업은 요리사다. 28살 때인 1992년부터 한식집과 고깃집 주방에서 일했다. 2007년엔 식육처리 기능사(식용육의 분할, 골발, 정형 작업을 하는 사람) 자격증을 취득해 월 400만원 이상을 벌기도 했다. 2015년부터는 작은 냉면집을 운영 중이다.

강원도 삼척 시골뜨기 소년에서 요리사로

1983년, 19살 시골뜨기 소년은 돈을 벌기 위해 1만 5000원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갔다. 식당 보조로 일을 시작했다. 요리가 적성에 맞았다. 주방장을 하겠다는 생각에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며 일을 배웠다.

출처: 본인 제공
요리사 김팔용

-어떤 요리를 배웠나요.

“주방장이 되려면 모든 요리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5년 이상을 탕, 냉면, 고기 전문점 등에서 일했죠. 1992년,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직원 100명이 넘는 한식집에서 조리 실장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새벽에 출근하고 11시 넘어서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저녁 있는 삶을 사는 공무원, 회사원이 부러웠습니다. 내 가게를 차려 원하는 시간에 일하고 취미도 즐기는 삶을 위해 고향 강원도로 돌아왔습니다.”


-가게를 차렸나요.

“먼저 남의 가게에서 일했어요. 그때 주식이 인기였습니다. 차 한 대 살 정도만 벌려고 했는데 투자한 종목 주가가 폭락했습니다. 결국 서울에서 모은 돈 약 8000만원을 잃었습니다. 식당을 차릴 수 없었죠.”

주식으로 돈과 건강 잃고 만난 자전거

빈털터리가 된 김씨는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위경련으로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점점 야위어 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다 몸이 다 망가질 것 같았습니다. 건강에 시간을 투자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자전거다. “처음엔 조금 탔는데도 힘들더군요. 그런데 오히려 식욕도 돌고, 기운도 났습니다. 자전거를 더 열심히 탔어요. 반복하니까 정신도 맑아지고 건강도 돌아왔습니다. 다시 주방일도 시작했죠.”

출처: 조선 DB

-자전거 동호회에 나갔다고 했습니다.

“친구 따라서 갔습니다. 당시 일반 자전거론 동호회 활동이 어렵다는 친구 말을 듣고 150만원짜리 자전거를 샀습니다. 비싸 봐야 30만원일 줄 알았던 자전거 값이 상상 이상으로 비쌌습니다. 그런데 500만원 넘는 고가 자전거를 탄 동호인들은 제 자전거를 보고 저렴하다고 한 마디씩 하더군요.


자전거도 자전거지만 제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실력이 모자라 자꾸 뒤처지니까 의욕도 떨어졌죠. 결국 동호회에서 나와 혼자 연습했습니다. 자전거도 몸에 맞는 것을 찾아 80만원짜리 중고 자전거로 바꿨어요.”


-얼마나 연습했나요.

“9시 넘어서 식당일을 마치면 봉황산과 삼척대학교(현 강원대학교 삼척캠퍼스)에 매일 나갔습니다. 거리 500m, 경사 15도의 언덕을 20번 이상 오르내리길 반복했죠. 삼척에서 저처럼 자전거 많이 탄 사람 없다고 자부할 만큼 연습했습니다.

첫 출전한 대회에서 1위, ‘업힐 왕’이 되다

2004년, 김팔용씨는 자전거를 탄 지 반년 만에 제2회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에 참가했다. 3그룹으로 출발한 김씨는 그룹 선두를 지켰고, 앞서 출발한 2그룹 일부까지 제치고 그룹 1위를 기록했다. 이후, 2007년 제5회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에 참가해 전체 1위를 하며 업힐(언덕을 오르는 것)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출처: 조선DB, 본인 제공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김팔용씨의 대회 출전 사진과 시상대에 오른 김씨

“2007년 8월 26일, 대회당일 식당일이 늦게 끝나 늦잠을 잤어요. 서두르다 클릿신발(클릿페달에 고정시키는 특수신발)과 장갑, 물통 등 장비를 놓고 왔죠. 헬멧과 고글만 쓰고 출발선에 섰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일반 운동화를 신은 발은 페달에서 미끄러지고 장갑을 끼지 않은 손에는 땀이 찼어요.”


어느 정도 지나자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르막길에서 기어변속을 하다가 체인이 빠져버렸다. MTB(산악자전거)를 주로 타다가 경주에 사용하는 로드바이크가 아직 익숙치 않아 생긴 실수였다. 그 사이 많은 참가자가 그를 앞질렀다.


재정비 후 출발한 김씨는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을 추월했던 참가자들을 따돌리고 선두로 올라섰다. 결승선에 들어와 기록을 확인하니 2위와 30초 차이로 전체 1위. 당시 2위는 일본 사이클 프로 선수였다. 이때 장비 없이 출전한 모습이 인터넷에서 화제였다. 사람들은 그를 업힐왕은 물론 자전거 계의 전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삶의 균형을 맞추는 계기가 된 교통사고

출처: 조선DB

그의 전성기는 2008년까지였다. 교통사고를 당해 더 이상 자전거를 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양쪽 복숭아뼈가 으스러져 장애 6급 판정을 받았다. 그래도 김씨는 달린다. 2년의 재활을 거쳐 가끔 대회에도 나간다. 전처럼 매번 1등을 차지하지는 못해도 지금도 늘 우승 후보다. 올해 8월에 열리는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도 준비 중이다.


“교통사고 전엔 너무 자전거에만 치우친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였죠. 뭐든 과하면 꼭 화가 생기더군요. 주식으로 돈을 날렸던 때처럼요. 사고가 계기가 되어 지금은 생업과 자전거와의 균형을 맞춰 살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삶이 영화로 나온다.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제작사가 있다. “처음엔 제 삶이 영화로 만들 정도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자전거를 만나고 나서 대회 라는 목표가 생겼고,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좌절을 맛보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여러분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드리고 싶습니다.”


글 jobsN 이승아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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