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암살 시도 사건' 이후 SNS를 뒤덮은 음모론과 혐오 발언
"연출됐다(staged)."
지난 1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가 발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 지 몇 분 뒤 미국의 X(구 ‘트위터’)를 휩쓴 말이다.
SNS의 비주류 사용자들 사이에서 음모론의 동의어가 된 용어로, 누군가 공격당하거나 총격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자 사용된다.
그런데 지난 24시간 동안 이 용어는 주류 온라인 대화를 장악했으며, X에선 근거 없는 추측과 혐오 표현, 욕설 등이 담긴 게시물이 조회수 수백만 건을 기록하고 있다.
사실 과거 발생한 미 대통령 암살 시도 사건들도 수많은 음모론을 끌어모으는 자석 같았다. 1963년 11월 벌어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최초로 실시간 중계되던 대통령 암살 사건이었기에 이후 근거 없는 소문이 끊임없이 퍼져나간 것도 놀랍진 않다.
하지만 특히 이번 사건과 관련해 두드러지는 점은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광풍이 불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정치적 그룹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X 사용자들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고자 SNS 접속하면 개인 맞춤화된 ‘당신을 위한’ 피드에 이러한 근거 없는 소문이 적극적으로 추천돼 올라온다. 심지어 ‘파란색 체크 표시’를 단 유료 사용자들이 이러한 게시물을 올리면서 더욱 눈에 띈다.
'연출됐다'는 음모론의 확산
언제나 그렇듯 이번 사건을 둘러싼 음모론 또한 때때로 정당한 의문과 혼란에서 시작했다. 많은 사용자들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이러한 음모론의 중심엔 보안 실패론이 자리한다.
‘총격범은 어떻게 근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나?’ ‘왜 이를 막지 못했나?’와 같은 의문이 제기되고, 그 공백에 여러 허위 정보와 추측 등이 파도처럼 밀려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무척이나 연출된 것처럼 보인다”는 어느 X 게시물은 조회수 100만 회를 기록했다.
“관중석의 그 누구도 패닉 상태에 빠지거나 달리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실제 총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 사건을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를 믿을 수 없습니다.”
해당 계정의 프로필엔 아일랜드 남서부 해안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한다고 나와 있다. 이후 해당 게시물엔 이번 총격 사건은 진짜라고 지적하는 커뮤니티 노트(사용자들이 공동으로 배경 정보를 덧붙인 내용)가 붙었다.
사건 현장 안팎의 영상과 증언이 속속 공개되면서 당시 현장에 있던 관중들의 공포는 너무나도 분명해졌다.
한편 이러한 음모론은 사건 초기 공개된 보기 드문 이미지들로 인해 더욱더 악화했다.
특히 가장 많은 찬사를 얻은 사진은 미 AP 통신 소속 에반 부치 수석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으로, 얼굴과 귀에 피가 묻은 트럼프 대통령이 주먹을 들어 올리고 있으며, 그 뒤로는 국기가 나부낀다.
미국의 한 유튜브 계정은 해당 사진을 두고 “지나치게 완벽하다”면서 어떻게 저들이 “절묘한 국기 배치 등 어떻게 모든 걸” 완벽하게 구성했냐고 발언했다.
X에도 올라온 해당 게시물은 조회수 거의 100만 회를 기록했으나, 이후 삭제됐다. 작성자는 별도의 게시물을 통해 잘못된 말을 했다면 스스로 바로잡는 게 중요하다고 적었다.
총성이 울리자 트럼프가 무대에서 손을 들었다는 점을 문제 삼는 이들도 있었다. 해당 사건이 조작됐단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다.
미국의 어느 논평가는 “동정심을 얻기 위해 조작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고, 이들을 위해선 기도조차 아깝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해당 게시물을 포함해 가장 많이 화제가 된 게시물은 대부분은 과거부터 반트럼프 사상을 드러내던 좌파 성향의 사용자들에 의해 작성됐다. 이미 팔로워 수십만 명을 거느리고 있는 계정들이기에 꽤 큰 파급력을 자랑한다.
'사탄의 음모'
사실 현재 X에서 벌어지는 일은 코로나19 팬데믹, 전쟁, 총기 난사 사건, 테러 공격 등 현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이를 부정하고 나서는 열렬한 활동가들이 SNS에서 갈고 닦은 음모론 각본을 전형적으로 따르고 있다.
근거 없는 허위 정보를 종종 공유해온 미국 기반의 어느 계정은 “사탄 같은 소아성애자들을 무너뜨리고자 할 때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고 적었다. 트럼프가 보안 및 정보기관의 비밀스러운 연합체인 ‘딥스테이트’에 맞서 은밀히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큐어넌’ 음모론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담고 있다.
증거도 없이 이들은 암살 “명령”이 “CIA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며, 이번 트럼프 암살 시도 사건에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마이크 펜스 등이 연루돼 있다는 주장도 있다. 마찬가지로 뒷받침할 만한 증거도 없는 해당 게시물은 조회수 470만 회를 기록했다.
이는 이미 익숙한 패턴이지만, 이번에 특히 주목할 만한 변화는 이러한 용어가 일반적인 SNS 사용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이 조작됐다고 말하는 건 트럼프 반대파들만이 아니다.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사람들조차 이번 사건이 거대한 음모론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선거로 당선된 정치인들도 이에 가세했다. 공화당 소속의 마이크 콜린스 하원의원은 “조 바이 대통령이 명령을 내렸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그러면서 이번 주 초, 선거 대결을 두고 “트럼프를 과녁의 한복판에(bullseye) 넣겠다”고 말한 바이든 대통령이 발언을 문제 삼았다.
이 외에도 지금껏 다른 정치인, 언론, 온라인에서 트럼프를 묘사하는 데 사용한 일부 표현에 대해선 정당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러한 표현이 긴장과 갈등을 부추겨 이러한 암살 시도로 이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이 암살을 지시했다고 주장하는 건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다.
콜린스 의원의 해당 X 게시물은 조회수 600만 회 이상을 기록했지만, 이후 바이든 대통령은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지 않았다는 커뮤니티 노트가 붙었다. 아울러 해당 노트는 ‘과녁의 한복판’이라는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을 문맥에서 벗어나 인용했다고 지적했다.
총격범의 정체에 대한 거짓 추측
한편 총격범의 신원에 대해서도 증거 없는 다양한 추측이 줄을 이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총격범의 정체에 대해 현장에서 비밀경호국이 사살한 토머스 매튜 크룩스(2)로 지적했다. 그러나 FBI의 이러한 발표 이전 잘못된 추측으로 인해 다른 이들의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우선 이탈리아 출신 축구 해설가 마르코 비올리는 한밤중에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이 ‘안티파(대부분 좌파 성향인 정치 활동가들의 느슨한 모임)’의 일원이자 이번 공격의 배후라는 주장은 완전히 거짓이라는 해명글을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근거 없는 추측은 비올리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사실을 바로잡기 전까지 X에서 조회수 수백만 건을 기록했다.
이렇듯 정치 활동가들과 지지자들은 사건 이후 재빨리 자신들만의 반향실에 웅크리고 앉아 X의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게시물을 읽으며, 자신의 기존 사상을 또 한 번 증폭시키고 강화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음모론과 거짓 추측이라는 깊은 구렁텅이를 피하고자 바쁘게 움직였다.
총격 사건 이후 SNS에서 벌어진 이번 상황은 일론 머스크의 새로운 트위터에 대한 시험대였다. 그리고 X가 이번 시험을 잘 통과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X 외의 다른 SNS 플랫폼은 이 정도로 음모론과 거짓 추측에 침수되지 않았다. 주 사용자층이 달라서일 수도 있고, X가 워낙 정치적 담론의 장으로 유명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BBC는 X에 의견을 요청했으나, 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