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가스에 모이는 엑셀 굇수들

이 영상을 보라.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E 스포츠 대회인데, 화려한 조명 아래 수백 명이 환호성을 지른다. 롤드컵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게임 화면이 아니다?선수들이 겨루는 종목은 다름아닌 전세계 사무직의 알파와 오메가, 만능손 ‘엑셀’이다.

사실 한국인들에겐 일 할때 빼곤 쳐다보고 싶진 않은 게 바로 엑셀인데, 도대체 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무슨 대회를 한다는 걸까. ‘엑셀도 E 스포츠 대회가 있다던데 어떻게 진행하는지, 한국인 성적은 어떤지 궁금하다’는 의뢰가 들어와 취재했다.

일단 취재를 하다가 좀 놀랐는데, 해당 대회에서 E 스포츠 최강국 한국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 대회 주관단체가 발표하는 세계랭킹을 보면 중국, 일본, 베트남,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까지 온갖 동아시아 국적 선수가 있지만 한국인은 한명도 없다.

사무실에 앉아 하염없이 엑셀을 쳐다봐야 하는 한국 직장인의 비애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우선 요 대회의 이름은 ‘마이크로소프트 엑셀 월드챔피언십(MS Excel World Championship)’.말 그대로 ‘엑셀 세계선수권대회’다. 미국에선 스포츠전문채널 ESPN이 중계할 정도로 주목받는 E 스포츠 대회라고 한다.

원래 이 대회의 모태는 ModelOff라는 엑셀 대회였다. 그랬던 게 2020년 ‘파이낸셜 모델링 월드컵’이라는 이름으로 E 스포츠 대회로 변신했다.

요 대회가 인기를 끌자 이걸 눈여겨본 엑셀의 친정 마이크로소프트가 공식 파트너십을 맺자고 제안했고,지금의 대회 형태가 갖춰졌다.

대회에 참가하려면 1월부터 9월까지 매달 진행되는 온라인 예선을 치를 수도 있고, 12월 라스베가스에서 현장 예선에 참가해도 된다.

대회룰을 다 설명하긴 너무 복잡하고 어쨌든 최후의 엑셀 신동 12인이 라스베가스 대회 3일째에 최종 결승전을 치러 우승자를 가린다.

근데 도대체 어떤 문제가 나올까. 이건 2021년 대회 16강전 문제인데, 요약하면 주어진 데이터를 가지고 테트리스 게임의 점수 계산 방식대로 엑셀 수식을 사용해 수많은 결과값을 30분 안에 최대한 맞게 산출해야 한다.

[황기성 ‘엑사모’ 전 운영자]

일반적인 엑셀 사용자라면 문제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아주 많은 시간이 소요될 가능성이 큽니다.
유니코드 도미노 타일을 파싱(parsing)해 점수·차례별 상태를 계산하거나, 드롭 순서를 읽어 최종 보드·승자·마지막 수까지 산출하는 등 일반 업무 현장에서는 마주치기 어려운 특수한 문제일 수 있어요.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못 알아듣겠지만 꽤 어렵단 말인 거 같긴 하다. 요 대회 참가자 중엔 아무래도금융, 특히 재무모델링, 회계, 각종 컨설팅, 보험계리사 등 엑셀을 많이 쓰는 직장인이 많다.

대회를 주관하는 단체 대표에게도 직접 물어봤는데, 단순히 빠른 손만 가지곤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다는 답을 받았다.

[앤드루 그리골리노비치 FMWC 대표]

클릭이나 키 입력 속도 같은 'APM(actions per minute)'은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위권 선수 APM이 평균보다 약간 높긴 했지만, 속도가 빠른 선수들이 꼭 상위권은 아니었어요.

매년 트렌드도 휙휙 바뀐다.지난해 대회에 사용자들이 직접 만드는 함수인 ‘LAMBDA’를 활용하는 경우가 늘었다고.또 6월 예선에선 AI를 활용한 우승자가 나오기도 했는데,이것 때문에 관련 규정을 바꿀지도 논의 중이라고 한다.

이 대회에서 한국인 성적이 안 나온 건일단 참가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 2023년 예선에 한국 사람이 2명 참가한 적이 있긴 하지만, 각각 323위, 340위로 본선 진출에 실패한 게 끝. 일단 대회의 국내 인지도 자체가 낮고 엑셀을 E 스포츠화 시키기엔 한국 사람들의 인식도 한계가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황기성 ‘엑사모’ 전 운영자]

한국에선 엑셀을 논리 수리적 문제의 해결 도구라기보단 단순히 일할 때 쓰는 사무자동화 도구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요. 또 대회 설명이나 튜토리얼도 영어라 기본적으로 언어 장벽이 있고요.

또 이 대회에 참가하려면 최신 버전 MS 오피스 365를 사용해야 가능한데,한국에선 이걸 사용해본 인구가 적다고 한다. 아무래도 정기결제가 필요한 MS 오피스 365보단 이미 가지고 있는, 한번 구매하면 계속 쓰는 MS 오피스 2016 이하 버전을 계속 쓰는 인구가 많은 걸로 추정된다.

근데 사실 온라인 게임판에서 ‘규격외’로 분류되는 한국인들이 맘만 먹으면 언제든 엑셀 대회도 정복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 이 영상을 보시는 직장인 분들, 평소 수많은 문서 작업으로 단련된 실력을 올해 엑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한번 뽐내보는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