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났지만 맛난다… 스윗한 반전매력 [이우석의 푸드로지]

2024. 10. 24. 09:1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이우석의 푸드로지 - 호박
부드러운 식감에 은은한 단 맛 일품
녹말 성분 많아 비상식량으로 쓰기도
이파리 쌈싸먹고, 씨앗은 볶아 먹어
칼국수·샤부샤부·나베와 찰떡궁합
핼러윈 데이 상징하는 등불로도 유명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인 호박은 타원형, 원통형, 편구형 등 다양한 형태와 색이 있다. 위 사진은 저마다 다른 모양의 호박. 아래는 단호박의 은은한 단맛을 활용해 만든 단호박 케이크.

호박의 계절이다. 유난히 뜨거운 올여름 땡볕을 받고 견뎌내 더욱 다디단 늙은 호박이 나오고 있다. 이때쯤이면 식탁뿐 아니라 도심 곳곳에서도 호박이 눈에 띈다. 그것의 이름은 ‘잭오랜턴(Jack o’ lantern)’. 커다란 호박에 무섭게 생긴 눈, 코, 입을 뚫어놓은 기괴한 등불이다. 시월의 마지막 주에 펼쳐지는 핼러윈 데이 행사를 장식하는 캐릭터로 잘 알려졌다. 호박의 윗부분을 잘라내고 속을 파낸 후 무서운 사람 얼굴 표정으로 눈, 코, 입을 뚫어서 만든다.

자신을 지옥에 데리러 온 악마를 속여 수명을 연장했다는 구두쇠 잭(Jack)의 이야기(아일랜드 민담)에서 유래한 잭오랜턴은 그 존재 자체가 악령이 아니라, 오히려 핼러윈에 찾아오는 무서운 귀신을 쫓아내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유럽에선 잭오랜턴을 만들 때 생기는 호박 속으로 수프를 끓이고 파이를 만든다고 하니, 어쨌든 가을이 호박의 제철임엔 틀림없는 일이다. 애호박과 늙은 호박, 단호박 모두 여름부터 가을까지 수확하는데 늙은 호박은 오랜 숙성을 거쳐야 맛이 드니 오히려 초겨울에 자주 먹게 된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시오’의 단호박을 넣은 수프카레.

호박은 유일하게 의인화되어 애, 어른 구분을 하는 작물이다. 여느 작물과는 달리 애호박과 늙은 호박이 따로 있다. 물론 애호박을 오래 키운다고 늙은 호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둥그런 맷돌을 닮았대서 ‘맷돌호박’이라 불리는 늙은 호박은 아예 다른 종이다. 참고로 오이 중에 ‘애오이’는 없지만 ‘노각’이라고 해서 늙은 오이가 따로 있기는 하다.

따지고 보면 호박이 의인화되는 경우는 하나 더 있다. 예로부터 못생긴 이들을 가리켜 ‘호박’이라고 놀리던 경우가 왕왕 있다.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냐’는 비아냥도 있다. 아마도 쭈글쭈글 볼품없는 늙은 호박을 보고 지어낸 말인 듯하다. 하지만 동서양이 호박에 관한 심상이 사뭇 다르다. 서양에선 호박이 ‘사랑스러운 자식’ 같이 긍정적 의미로 의인화된다.

이름에서도 연상할 수 있듯 호박은 박과에 포함되는 식물이다. 흥부전에 나오는 그 박이다. 먹어왔던 박인데 중국에서 들여왔다고 오랑캐 호(胡) 자를 붙여 호박이라고 했다. 호떡이나 호두(胡桃), 호부추, 호주머니와 같은 의미의 조어다. 분류학상으로는 호박속(Curcurbita)에 속하는 모든 식물과 열매를 칭한다. 호박 속에는 4종이 있는데 모든 작물이 그렇듯 오랜 세월을 두고 개량을 통해 지금은 수도 없는 다양한 품종이 나와 있다.

제주 ‘부두식당’의 갈치국.

호박은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미 북부가 주 원산지인데 한국에는 임진왜란(1592∼1598) 이후에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서양호박의 품종인 단호박은 일제강점기 때 들어왔지만 농가에 널리 퍼진 것은 광복 이후다.

호박은 세상에서 가장 큰 열매를 맺는 작물이다. 흥부가 박을 타는 장면을 연상시키듯 자이언트 펌킨이란 품종은 열매 무게가 1t이 넘어서기도 한다. 설화 속에서처럼 호박 안에서 사람이며 금은보화가 나올 수 있을 정도다. 다리가 부러진 제비는 강남이 아니라 남미를 다녀온 것일지도 모른다.

식재료로서 호박은 사랑받는 작물 중 하나다. 그저 익히기만 해도 단맛이 나기 때문이다. 삶거나 으깬 상태로 그냥도 먹지만 설탕과는 달리 은근한 단맛을 추가하기 위해 여러 요리에 쓴다. 양파의 단맛과는 달리 부드러우면서도 자극적이거나 풀 냄새가 나지 않아서 좋다.

단 것이 귀하던 시절, 호박 역시 귀한 작물이었다. 텃밭에 심기만 해도 잘 자라지만 영글기까지 꽤 오래 걸린다. 조금만 그늘이 져도 제대로 크지 않는다. 커다랗게 자란 호박 열매만 있으면 주방 찬장이 든든했다. 고구마처럼 녹말 성분이 많아 비상식량으로도 쓸 수 있다. 그래서 예전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다’는 속담이 돌았다. 요모조모 해먹기에 좋으니 호박이 들어오면 꽤나 횡재했다는 뜻이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나들목’의 애호박 모둠전.

여름철, 제대로 익기 전에 수확한 애호박이라도 쓸 곳이 많다. 칼국수에 넣고 된장찌개에 빠질 수 없다. 가을에 단맛이 제대로 들면 더욱 좋다. 그대로 죽을 끓이고 떡이나 약식에 맛을 낸다. 서양에선 수프를 끓이고 빵을 만든다. 단호박 케이크나 파이, 푸딩은 낯선 음식이 아니다.

호박이 달다 보니 울릉도 호박엿도 호박으로 만든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울릉도 트위스트’ 가사에 등장할 만큼 울릉도가 섬 명물로 꼽는 호박엿은 사실 ‘후박엿’이다. 호박이 아닌 후박나무 열매로 만든다.

대신 호박은 이파리도 먹는다. 잔털이 많지만 커다란 호박잎을 찌면 쌈채로 먹기 좋다. 널찍하고 이파리 자체에서 은근히 달달한 맛을 낸다. 외국에선 호박꽃을 식용으로 쓰는 곳도 있지만 우리는 즐겨 먹지 않는다. 대신 속을 들어낼 때 나오는 호박씨를 볶아서 먹기도 한다. 볶은 견과와 비슷하니 맛이 좋은 것은 알겠지만, 이상하게도 ‘뒤로 호박씨 깐다’는 말은 알려진 그 어원이 엉뚱해 그리 소개할 것은 못 된다.

호박은 중남미에서 활발히 재배해 먹던 것이라 화석 등 관련 유물들이 그쪽에서 많이 출토된다. 원주민들에겐 든든한 식량자원으로 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옥수수와 감자 등 중남미에서 온 다른 작물과는 달리 호박은 주식 개념이 아닌 까닭에 세계적으로 널리 확산되지 못했다. 다만 15세기 이후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는 무척 선호하는 작물로 자리를 잡았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열대 지역에선 사탕수수 등 단맛을 위한 감미 식재료가 많지만 온대 이상 지역에선 달달한 맛을 내는 작물이 드문 까닭에 호박이 환영받았던 것이다.

호박은 맛 이외에도 유용한 성분이 많다. 항산화 성분인 베타카로틴이 들어 있어 노화 방지 및 피로해소에 좋다. 여기다가 비타민 A, C, E도 많이 함유해 간 해독과 면역력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칼로리도 100g당 29㎉에 불과한 데다 식이섬유가 많아 다이어트에도 좋고 특히 여성들은 얼굴과 몸의 부기를 빼는 용도에 주목해 호박즙을 상식하기도 한다.

호박을 넣어 끓이는 샤부샤부 메뉴.

일본에선 단호박을 일상 속에서 아주 다양한 용도로 쓴다. ‘카보차’라 불리는 단호박으로 아이스크림이나 양갱, 기타 빵 등을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일본의 디저트 시장에서 호박을 쓴 것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덮밥이나 스키야키, 나베, 카레 등에 넣는 것은 물론, 썰어서 바싹 튀겨내는 덴푸라에도 빠질 수 없는 아이템이 바로 ‘카보차’다.

중식에서도 호박을 즐겨 쓴다. 형태 변형이 용이하고 뜨거운 열을 가해도 맛과 향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으깨서 만두에도 넣는다. 얼마 전 화제를 불러모았던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에서도 늙은 호박 대결이 펼쳐졌다. 백수저 황진선 셰프(진진)가 상대방 흑수저 ‘만찢남’을 상대로 탕수호박을 선보여 심사위원을 만족시켰다. 만찢남은 달콤한 호박 타르트로 도전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탕수호박은 여느 식당에서 보기 어려운 메뉴였던지라 식도락가들의 특별한 관심을 모았다. 바야흐로 제철을 만난 호박, 불볕을 견디고 단맛으로 튼실한 속을 꽉 채운 호박은 곳곳에 핼러윈의 불을 밝히고 식탁을 장식하는 등 진정한 가을의 전설이 되고 있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먹을까

◇호박죽 = 가락지죽집. 목포역 앞 원도심에서 오랜 시간 죽과 분식을 팔아온 노포. 제철인 요즘 식당 내부에 늙은 호박을 잔뜩 쌓아놓고 호박죽을 판다. 죽 종류가 많은데 단팥죽, 깨죽, 잣죽, 야채죽, 전복죽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호박죽엔 새알과 팥알갱이가 잔뜩 들어 먹기에 심심하지 않다. 특히 목포 명물 쑥꿀레와 아침마다 직접 짓는 약식을 곁들이면 더욱 좋다. 여름엔 콩국수, 겨울엔 팥칼국수를 먹으러 이 집을 찾는 이가 많다. 전남 목포시 수문로 45.

◇애호박찌개 = 애호락. 상호를 보면 유추할 수 있듯 애호박을 메인 식재료로 하는 전문점이다. 은근히 달고 싱그러운 애호박의 맛을 최대한 끌어낸 전라도식 애호박찌개로 유명하다. 고추장 양념 육수에 돼지고기와 애호박을 푸짐히 넣고 끓여낸 애호박찌개는 화려하지 않고 풋풋한 맛이다. 칼칼하지만 달달한 국물은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다. 식사 메뉴는 물론, 안줏거리로 좋은 전골도 있다. 서울 종로구 계동길 41 2층.

◇호박인절미 = 소미담. 프리미엄 떡 카페란 부연답게 콩쑥개떡, 옥수수크림떡, 수리취떡, 두텁떡, 찹쌀떡 등 퍽 다양한 떡 종류와 음료를 파는 집. 인절미 종류만 해도 5가지인데 이중 단호박을 넣고 지은 호박 인절미가 있다. 고물에 직접 갈아 넣었는지 호박 특유의 향이 잔뜩 배어 있고 은근한 단맛 또한 잃지 않았다. 인절미라지만 한없이 부드러워 일본의 찹쌀떡 식감을 낸다. 서울 성동구 뚝섬로 427 1층.

◇수프카레 = 시오. 일본 홋카이도에서 즐겨 먹는 수프 카레의 주인공은 채소다. 단호박, 버섯, 감자, 브로콜리 등 채소를 한번 구워내 향을 북돋운 다음 카레를 넣은 묽은 수프에 한소끔 끓여낸다. 카레 향기가 가득한 국물이 구운 채소에 스며들면 그때가 먹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한번 구워낸 단호박은 그 단맛이 절정에 이른다. 입안 가득 카레 향을 풍기며 부드럽게 녹아든다. 카레에 든 채소처럼 조금씩 잘라 먹어도 좋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11가길 23 1층.

◇스테키텐동 = 정데판. 데판은 철판(鐵板)에 볶는 일식 요리 스타일을 말한다. 스타필드 고양 지하에 위치한 정데판은 철판 요리를 1인에 맞춰 제공하는 집. 돼지고기, 소고기, 오리고기 등 고기 종류를 숙주나 대파와 함께 빠르게 볶아내 한상차림으로 판다. 스테키(스테이크)와 장어튀김 등 튀김을 곁들인 덮밥 메뉴도 있다. 덴동은 덴푸라(튀김) 돈부리(사발)의 줄인 말로 주메뉴와 튀김을 곁들인 덮밥을 이른다. 단호박과 연근, 새우 등을 튀겨내 스테이크와 함께 밥에 얹었다. 단호박 튀김은 바삭하고 부드러워 밥 먹는 재미를 더한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대로 1955 지하 1층.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