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북] "인류.. 일을 잃고 삶의 의미 찾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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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오리진의 '미니북'은 손바닥 안의 책 한 권입니다. 화제의 저자 인터뷰를 비롯해 긴 호흡의 글을 전합니다. 이 순간만큼은 커피 한 잔 옆에 두고 느긋하게 읽어가 보시면 어떨까요. 디지털 시대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한 화제의 책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이야기입니다. 지난주 방한한 그를 따로 만나 책과 다른 자리에서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유발 하라리
1976년 이스라엘 태생. 영국 옥스퍼드지저스 칼리지에서 박사 학위 취득. 현재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 중세 전쟁사로 학위 논문을 받은 후 세계 역사 연구로 확대. 그의 세계사 강의가 유튜브를 통해 입소문을 타면서 주목받기 시작. 단행본 ‘사피엔스’가 맨처음 이스라엘에서 출간되고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후, 세계 30개국어 가까이 번역되면서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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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사피엔스'의 저자 맞나 싶다. 저렇게 왜소해 보이는 사람이 그토록 방대한 스케일의 책을 어떻게 썼을까. (이 책이 이스라엘에서 처음 출간됐을 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체구도 목소리도 심지어 내미는 손도 연약해 보인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큰 눈망울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상대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차분하다. 피아니스트를 연상시키는 선 가는 손도 '섬세하다'는 표현이 맞겠다. 대화를 하는 중에도 신중하게 생각을 한 후에 말을 이어가는 편이다.
1년 전 이맘때 그와 처음으로 이메일 인터뷰를 했을 때 첫 대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어떻게 이런 책을 쓰게 됐나요?" 원론적인 질문에 그는 '천진무구한' 답을 했다. 어릴적 시작된 불굴의 원초적 호기심이 오늘날 그의 지력의 원천임을 보여주는 말이었다.
10대 시절 나는 세상 일이 이해가 안 돼서 고민이 많았다. 왜 세상 일들이 지금 같은 건지, 인생의 목표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부모님과 선생님, 다른 어른들한테 물어봤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 역시 잘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더 의아했던 것은 그들이 그런 걸 몰라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다. 돈과 경력, 주택대출금,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을 많이 하면서도, 인생이 뭔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완전히 태평이었다. 나는 혼자 다짐했다. 내가 크면 일상적인 세상사에 함몰되지 않고 큰 그림을 이해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이 책은 어떤 면에서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1년 전 유발 하라리와의 인터뷰 전문
작년말 국내에 책이 번역돼 나오고도 한참 뒤에야 한국에, 그것도 중국을 거쳐 도착한 그는 그새 불어닥친 뜨거운 인기 덕에 말 그대로 숨가쁜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이날도 간신히 이른 아침 시간에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날아온 그에게 고향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예전에 예루살렘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1928-2014) 총리가 코마 상태에 빠졌을 때였지요. 사실은 사망했을 경우에 중동 지역 파장도 예상되고 해서 취재하러 갔는데, 결국 부음 기사는 한참 뒤에나 나왔지요.
네, 코마에 빠지고 나서도 아주 오래, 한 5-6년 그 상태로 있었지요. 살아 있을 때도 매사에 투지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샤론은 중동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 출신으로 별명이 '불도저'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는 죽을 때에도 그렇게 죽음과 오래 씨름하다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샤론 총리를 좋아했습니까?
그는 국내에서도 아주 논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업적도 양면이 있었지요. 어느 한쪽으로만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혹시 정치적인 입장이 있습니까? 지지 정당이라든가?
없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정치나 중동 정치에 대한 전문가가 아닙니다.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학자로서 특별한 입장을 취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치에 관한 한 사고 방식이 아주 부족적(tribal, 하라리의 어법으로는 '당파적'이라는 뜻에 가깝다)입니다. 남 이야기는 잘 듣지 않아요. 자기들만의 부족 이야기가 확고해서, 어떤 이야기라도 자신들이 믿는 것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면 들을 줄을 모릅니다.
다른 이야기를 할 때는 사람들이 아주 지적이고 개방적이지만, 정치 이야기만 하면 두뇌(이성적 사고)가 정지해버리고 말아요. 열린 사고를 못 해요.
그래서 저는 과학자로서 그런 모든 정치적 논쟁으로부터는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제가 정치적 논의에 기여할 만한 새로운 것도 별로 없어요. 한번 개입하게 되면 사람들은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요.
그러고는 "아, 그러면 당신은 저 편이군요" "이쪽 진영이군요" 이런 이야기들을 하지요.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반대 편 사람은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일반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보수와 진보 어느 쪽에 속한다고 생각하세요?
(잠시 생각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저를 리버럴(liberal) 진영으로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나누고 싶지 않아요. 현실이나 인간 사회를 그런 기준으로 보고 싶지 않아요.
주제에 따라서는 사람들이 저를 리버럴로 볼 수 있지만 보수적으로 볼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제 책에도 썼지만 저는 제국(empire)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입장이에요. 서양에서는 제국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거든요. 가령 누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제국주의자"라고 하면 싫어해요. 심지어 미국조차 스스로 제국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잖아요.
하지만 저는 제 책에서 제국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물론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식민지에 억압적인 정책을 폈고 그밖에도 많은 문제를 일으켰지만, 사실 전쟁이나 억압 같은 문제는 비단 제국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었어요. 역사적으로 보면 작은 나라들도 그점에서는 마찬가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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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 제국이 인류 역사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부분도 많아요. 제국은 지난 2000년 동안 역사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성공적인 정치 체제였어요. 사실상 인류 대부분이 제국 체제 하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어요. 그 결과 오늘날 대부분의 지배적인 언어와 종교, 문화가 사실상 과거 제국의 유산이지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것도 영어를 통해 서로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대영제국의 유산임을 누구나 알지요. 마찬가지로, 세계의 다른 주요 언어들, 프랑스어나 아랍어, 러시아어, 중국어도 모두 제국의 유산이에요.
특히 언어는 아주 중요한데 비단 소통 수단으로서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말을 하고 생각하고 꿈을 꾸고 자신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제국을 그냥 나쁘다고 배척한다면, 제국의 유산인 언어를 쓰는 현실은 어떻게 볼 건가요. 주요 종교라든가 문화의 주요한 부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아시아 경우에도 상당한 문화가 중화 제국의 유산이지요.
인도도 마찬가지예요. 오늘날 인도 사람들은 차(tea)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인데, 차는 영국에서 처음 들여온 거지요. 19세기 전까지만 해도 인도에는 차 문화가 없었어요. 제국주의자들이 들여온 거지요.
-말씀하신 것들은 과거 제국의 유산입니다. 앞으로 바람직한 정치 체제라는 관점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시겠습니까?
물론 전통적인 형태의 제국, 그러니까 대영제국이나 몽골제국 같은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인류가 직면한 대부분의 중요한 문제들은 세계 차원의(global) 문제들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나 인공지능 같은 신 기술의 부상으로 인한 문제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점을 감안할 때, 세계 각국이 100% 정치적 독립성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은 20세기에는 아주 이상적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그런 식으로 당면한 문제들을 풀 수가 없습니다. 만일 각국이 독자적인 결정만 고수할 경우에는 인류 전체에 재앙을 부르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를 지배하는 독재 정치체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별 국가 이익을 넘어 인류가 직면한 재앙적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세계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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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노력이라면 세계 대전 후에 생긴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이 있지요. 하지만 국제정치학자들은 개별 국가 위에서 작동하는 국제 권위체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데요.
지금 인류가 당면한 문제로 보자면 국제연합보다 더 힘을 가진 무엇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는 지구온난화가 인간에 의해 일어난 문제이고 생태계는 물론 인류의 생존까지 위협하는 재앙이라는 데에 대체로 동의하는 상태입니다. 미래에는 더 나은 해결책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재 기술적 수준에서는 지구온난화를 막는 길이 경제성장을 중단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지금 같은 성장의 길을 계속해서 가는 한, 현재 기술로는 지구온난화가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개별 국가들의 성장 필요성 때문에 사실상 온난화를 막기 위한 효과적 조치는 취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교토, 리우데자네이루, 코펜하겐 등지에서 정상들이 수많은 컨퍼런스와 회의를 열고 결의문을 채택했지만 온실가스 배출 그래프를 보면 계속 상향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유일하게 마이너스를 기록한 때가 2008년, 경제 위기가 발생했을 때였어요. 그러니 온실가스 방출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성장을 멈추는 것뿐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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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구상의 어느 정부도 체제를 막론하고 그런 결정은 내리지 못할 겁니다. 민주주의 미국도 권위주의 중국도 그 점에서는 같아요. 중국이 경제성장을 멈추면 당장 혁명이 일어날 겁니다. 미국 대통령도 성장이 멎으면 자리를 내놔야 할 겁니다. 그러니 개별 국가들 차원에서는 어렵다는 이야기지요.
사람들이 말로는 지구온난화를 중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성장 중단을 감수해야 한다면 어느 나라도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국가 단위의 한계지요.
-성장 중단만이 기온 상승을 막을 수 있지만 어떤 나라도 그런 결정은 할 수 없을 거라고 하셨는데, 기술 문명 자체가 갖고 있는 관성도 있지요.
맞는 지적입니다. 우리가 어느날 갑자기 기술의 발전을 멈춰보자 하는 식으로 중단시킬 수는 없습니다. 기술의 연구 개발 과정은 일시에 중단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기술 자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not deterministic) 점도 사실입니다. 똑같은 과학적 통찰이나 발명품도 아주 다른 방향으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 시기의 발명품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증기기관이나 전기, 라디오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온 19세기의 기술혁명을 어느 누가 중단시키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똑같은 기술을 가지고도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파시즘이냐, 자유민주주의냐, 독재 체제냐,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이냐는 데 대해서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결정하고 그것으로 뭘 할 건지는 기술이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현재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는 열려있고 우리 선택에 달렸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 같은 개개인의 삶은 기술에 의해 규정될 뿐, 기술의 구현 방향은 실리콘밸리의 혁신가들 손에 달린 것 아닌가요?
맞는 면도 아닌 면도 있습니다. 우선, 구글이 뭔가를 개발했을 때 국가나 사회가 규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도 애초에는 과거 증기기관과 마찬가지로 여러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인터넷 개발자가 어떤 식으로 써야 한다는 것까지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터넷이 20년 전 개발될 당시만 해도지금 같은 형태로 사용되는 것이 필연적인 일은 아니었지요.
더 중요한 것은, 이 점에서는 당신의 지적이 옳은데요, 개별 국가들, 특히 작은 국가는 거대 기업들의 기술 발달을 규제하는 능력에서 점점 뒤처지는 게 사실입니다. 중국 같은 대국은 독자적인 인터넷을 따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이나 이스라엘 같은 작은 나라들은 훨씬 어렵습니다. 그점에서 거대 기술기업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성을 잃어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글로벌 차원의 공동의 규제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글로벌 거버넌스를 말합니다. 어떤 상위에서 독재자가 결정권을 좌우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의 유엔보다는 힘이 있는 국제 기구가 규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 기술의 위험성에 대해 개별 국가 차원에서는 대응이 어려운 만큼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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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책에서 문명의 역설을 이야기했습니다. 가령, 농경문명만 해도 인류 차원에서는 진보였지만 개인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했지요. 지금 디지털 문명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신 기술이 인류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주었지만 개인들에게는 아주 큰 스트레스를 안기고 있지요.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예전에는 사무실을 떠나 퇴근하면 그것으로 일은 끝이었습니다. 연락할 방법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안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모바일폰에 이메일, 페이스북이 어딜 가든지 당신을 따라다닙니다. 사람들도 중독돼 있습니다. 누구를 만날 때도 모바일 폰을 탁자에 올려놓고는 상대와 대화하면서도 이따금씩 모바일을 쳐다보고 메시지를 확인합니다.
그 결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기본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FOMO(Fear of missing out)'라고 부릅니다. 잠깐 사이에도 뭔가 빠뜨리지나 않았을지 불안해 하고 확인하고서야 안심하는 현대인의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내가 모르고 있는 무언가가 세상 어디에선가 늘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는 거지요. 그 과정에서 지금 여기에 자신이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군산복합체'에 대한 두려움과 경고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일종의 실리콘밸리-복합체가 인류의 삶을 규정짓고 몰아가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 오늘날 가장 경계해야 할 주요 자원은 데이터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땅도 석유도 아닙니다. 데이터가 가장 중요한 자원입니다. 예를 들어, 미래에 건강의 핵심은 인간 신체에 대한 유전 정보가 될 것입니다. 유전자에 관한 막대한 데이터를 가장 먼저 모으는 첫 회사가 시장의 지배적 지위를 차지할 것입니다. 마치 구글이 지금 검색 시장에서 1인자가 된 후에는 다른 누구도 경쟁을 하기 어려워진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런 식으로 앞으로 모든 분야에서 데이터가 주요 자원이 될 겁니다.
그런데 이런 데이터는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점점 적은 수의 회사들한테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 회사들은 수집한 데이터에 대해 아무런 값도 지불하지 않습니다. 사용자들은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이런 서비스를 모두 공짜로 이용하니까 아주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정보를 그 회사에 다 넘겨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정보들을 다 모아서 힘을 구축해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되고 있는 거지요. 데이터가 건강이든 다른 서비스든 정치든 모든 분야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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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사실상 오늘날의 제국 아닌가요?
네, 그들이 새로운 제국이 될 수 있습니다. 데이터의 제국이지요. 지금 미국 대선을 예로 들어볼까요. 가장 큰 질문 중 하나가 유권자들이 공화당과 민주당 둘 중에서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는 것이겠지요. 각 캠프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지지를 끌어낼 수 있을지 궁리합니다. 여기에 필요한 종류의 정보를 페이스북은 가지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은 수천만 미국인들의 정치 성향을 다 압니다.
일반적으로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부동층의 향배입니다. 정당들로서는 유동적인 부동층을 어떻게 하면 끌어올지가 관건이 됩니다. 누가 부동층이고,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두 가지 질문에 대해 페이스북은 데이터를 통해 답을 알고 있습니다. 오클라호마 경선에서 유권자 5만명을 상대로 트럼프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지지를 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 페이스북은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보를 페이스북이 정치인들에게 실제로 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선거 결과를 좌우할 수도 있을 데이터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기술에 대한 또 다른 우려로 그것이 부의 양극화를 키운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런 양극화에 대한 완화 장치가 민주주의 기제를 통한 개입일 텐데 그마저 고장났다는 목소리가 높은데요.
현재 세계 많은 곳에서 채택해서 실행되고 있는 민주주의는 20세기 유산입니다. 과거 산업사회 시대의 기술적 경제적 조건에서 생겨나서 적응한 정치 형태입니다. 따라서 지금 바뀐 사회 환경에서는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습니다. 전통적인 농경 사회였던 아프가니스탄에 미국이 들어가서 민주주의를 이식했을 때 제대로 작동 안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도 역사적 산물입니다. 일정한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기반으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현재 가장 앞선 사회들의 경우 그동안 진행된 변화로 인해 20세기 민주주의 기제가 낡은 것이 돼버렸습니다. 과거의 경제나 기술적 환경이 변했습니다. 예전의 민주주의 모델은 이제 고도로 선진화된 사회에서는 적실성이 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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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정치적 의사결정이 내려지는 사안들을 보면, 세계 차원에서 정말 중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중요한 결정을 필요로 하는 사안들은 모두 새로운 기술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인터넷, 인공지능, 생명공학기술, 유전학, 컴퓨터공학에 관련된 이슈들입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리려면 그것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필요한데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기본 이해나 소양이 부족합니다.
전통적인 의회나 선거 구성이나 운영 방식은 지금 기술로 인한 사회 변화에 대한 적응이 너무 늦습니다. 그 결과 지금 의회나 정치권에서 논쟁하고 있는 것들은 대개 옛날 의제들입니다. 국가 정체성이라든가, 이민자 같은 지역(개별 국가) 정치 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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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문제들이 정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여서라기보다는 대중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고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걸로 싸웁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고, 선거에서도 이슈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지금 대선의 최대 쟁점이 멕시코 이민자 정책입니다. 대중이 알아들을 이야기만 하는 거지요.
그 결과, 정말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와 현실 정치권이 다투는 문제 사이에 큰 간극이랄까 격차가 생기고 있습니다. 정작 심각한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종류의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지금 민주주의 기제가 낡은 시대의 유산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요?
우리는 아직은 대안적인 모델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모델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겁니이다. 사람들은 즉각적인 해답을 원합니다. 그런 것은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선 필요한 걸음은 현존 모델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출발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새 모델의 창출 과정이 과거보다는 덜 폭력적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과거 인류는 평화로운 산업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좋은 모델을 찾기까지 수십 년간 전쟁과 대량 학살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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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심각한 불만과 불안의 원인 중 하나가 실업입니다. 사회 갈등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자동화로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경제가치의) 무용성까지 거론됩니다. 일자리가 없어지고 경제 수요도 부족해지는 상황을 우려해 '보편기본소득제(universal basic income)'가 대안으로 논의되고 실험되는 상황인데요.
우리는 단연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보편기본소득제가 듣기에는 아주 좋은 이론인데, 현실에 적용했을 때는 예측하지 못했던 온갖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공산주의가 이론만으로 보면 얼마나 좋습니까. 모두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눈다는 것은 듣기에는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적용했을 때는 알다시피 문제가 많았습니다.
모두에게 일정한 기본소득을 나눠준다는 새로운 모델에 대해서는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을 무상 제공하면 그 사람들이 정치적 힘을 잃게 될 겁니다. 원래 정치적 힘은 경제적 중요성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정치적 힘은 그 사람에 대한 필요성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이 모델에서는 국가가 사람에 대한 필요성이나 가치를 쳐서 주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시혜적이고 동정적인 지원입니다. 잘 작동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생존이 그저 엘리트의 친절이나 호의에 의존할 때 아주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느 순간 그 결정을 철회하려 할 때 수혜자들을 보호해줄 장치가 없으면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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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문제는 심리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경제적 수입 때문만은 아닙니다. 일은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주기도 합니다. 하는 일 없이 삶에서 의미를 찾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만 쉽지 않습니다.
미래 사회에서 가장 주된 과제 중 하나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일 겁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이나 필요한 것을 마련하기 위해 굳이 일을 할 필요는 없어지고, 정부나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남는 문제는 무엇이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제공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온갖 아이디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놀거나 여행을 하거나 다른 여러 방식으로 즐기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가상게임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대답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가 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런 문제를 논의할 때 단순히 먹을 것을 위한 일이 아니라, 심리적 차원에서 사람들이 어디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것이냐는 측면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미 지금 선진국에서는 경제적으로는 별 어려움이 없으면서도 정신적인 문제들 때문에 신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리적 불안, 디프레션 같은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 말이지요. 인생에서 의미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가 미래에서는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삶의 의미가 중요한 문제이고 각자 답을 찾아야 할 문제라면, 당신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음...(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잠시 생각을 한 후에) 저는 개인적으로 삶의 의미보다는 진실(truth)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실상(reality)을 이해하는 겁니다.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 그게 제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아마도 그게 제 인생에 의미를 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이 저로 하여금 노력을 하게 합니다. 세상에 대한 진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
-인간이 더 이상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특별한 지위를 주장할 수도 없다면,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존재 이유(Raison d'etre)'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아는 최선의 과학적 지식에서 보자면, 우주든 인류든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습니다. 인류가 미리 예정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거대한 우주적 드라마 같은 것은 없습니다. 굳이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이곳에 존재할 뿐이지요. 우리의 주된 목표는 생명 너머의 어떤 더 위대한 의미를 찾기보다는, 고통을 줄이고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점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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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의 책에서도, 방한 후에 한 다른 인터뷰에서도, 인류의 미래와 관련해 직면한 문제는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유, 평등, 행복 같은 것은 보편적 가치로 동의된 것 아닌가요? 또한 많은 사람들은 불공정이나 불균형한 분배를 해결해야 할 보편적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가치들에 대해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역사가로서 저는 그것들이 상대적으로 새로운 가치들이라는 사실을 지적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들이 정말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 심지어 오늘날에도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가치들은 어떤 기본적인 사회 조건들을 확보하는 것을 가리킬 뿐입니다. 그것들을 인류의 삶의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이 단지 평등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평등과 자유를 이용해서 또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일까요?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가 있다고 가정해보지요. 그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한 최고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누린다고 칩시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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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의 사람들은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요? 실제로는 스웨덴부터 한국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일부 사회들의 경우에는, 역사상 이전의 수많은 사회들보다 기본적인 사회 조건은 더 잘 충족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사회들이 지금은 지구 생태계를 재앙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회의 시민들이 진정으로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극단적인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중에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과다한 소비생활에서 의미와 행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앞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될 거라고 한다면 종교적 사고의 부활을 뜻하나요?
전통 종교보다는 새로운 종교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전통 종교들은 21세기 현실에 점점 적실성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혼돈스럽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안전을 찾으려는 희망에서 아직도 전통 종교들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AI와 생명공학기술에 관해 해줄 만한 적실한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알고리즘과 유전자에 대해서는 몰랐기 때문이지요.
19세기 산업혁명이 사회주의와 같은 신흥 종교(자신들은 '이데올로기'라고 불리는 것을 선호하겠지만)의 출현을 낳은 것처럼, 21세기 새로운 산업혁명은 아마도 추종자들에게 모든 오랜 보상들- 번영, 정의, 행복, 심지어 지상의 낙원-을 약속하는 새로운 종교들의 출현을 낳게 되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도움에서가 아니라 기술의 도움을 통해 실현한다는 약속으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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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트랜스휴머니스트(Transhumanist)', '포스트휴머니스트(Posthumanist)'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더군요.
어떤 점에서는 맞고 어떤 점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맞는다는 말은 이런 점에서입니다. 지난 300-400년 동안 인류에게 지배적인 이념은 휴머니즘이었습니다. 인간 존재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권위는 인간의 느낌(feeling)에서 나온다는 거지요.
정치적 권위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도 유권자들이 가장 잘 안다는 것을 전제로 했고, 경제에서도 고객/소비자가 항상 옳다는 것을 전제로 했지요. 사람들의 느낌이 최고의 심판자였고, 그런 점에서 늘 인간이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중심은 인간으로부터 이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포스트휴머니스트라는 점은 그런 뜻에서입니다. 휴머니즘의 시대, 역사에서 인간이 중심으로 여겨지는 시대는 갔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역사의 단계에서는 두 가지가 연관돼 있습니다. 첫째, 권위가 인간에서 인간 밖의 시스템으로 이동한다는 겁니다. 빅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이뤄진 시스템 말입니다.
두 번째로 제가 포스트휴머니스트라는 뜻은 '휴머니티'(humanity, 인간됨)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점에서입니다 . 생명공학, 컴퓨터공학과 더불어 인간의 몸과 뇌가 바뀌고 있습니다. 이제 사이보그와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인류가 지구상에서 등장한 지 수천 년이 지나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새로운 존재가 등장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제가 포스트휴머니스트라 불리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앞에서 말한 그런 변화에 대해 그렇게 열광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대체로 포스트휴머니스트 사상가들은 이런 변화가 아주 좋은 것이고 더 적극적으로 촉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공학 기술을 통해 인간을 업그레이드하고 사이보그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는 거지요.
'트랜스휴머니즘' 인류의 미래인가 논쟁
하지만 저는 그런 것에 대해 그들보다는 비판적인 편입니다.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에는 동의하지만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더 강력한 시스템을 구축하게 됨으로써 더 큰 힘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더 나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면 그 다음 새로운 종의 출현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확연한 구분 선은 없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새로운 종, 혹은 완전히 다른 생명의 형태로 진화하는 것은 급작스런 혁명적 변화가 아니라 수 세기는 아니어도 최소한 수십 년 동안 단계적인 과정을 거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새로운 종을 구분하는 것은 최소한 신체와 정신적 능력의 변화가 될 것입니다. 아마도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존재(예를 들어, 사이보그와 AI)는 비유기적 몸체를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유기적 몸체를 가졌거나 현재 알려진 물리적 실체에 자리잡기보다는 주로 가상적인 실체에 자리잡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요.
-기술의 혜택이 부의 불평등과 결합하면서 인간의 우열이 더 노골화되는 새로운 계급 사회를 낳게 될 거라는 우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게는 거기에 대한 해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은 아주 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기술의 부상, 특히 생명공학기술과 AI는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사회로 귀결되고 말 수 있습니다. 고용 시장에서 알고리즘이 인간을 대체하면서, 점점 더 많은 부가 점점 더 소수(알고리즘을 통제하는 사람들)의 손에 집중될 것입니다.
생명공학기술은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적 불평등을 생물학적 불평등으로 전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겁니다. 그것은 무척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미리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그 문제는 우리가 직면하게 될 위험한 가능성들 중의 일부일 뿐입니다. 불가피한 결과는 아닙니다. 우리가 현명하게 행동하면 이런 위험한 결과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의 발달 전망을 두고, 당신은 의식과 지능의 '디커플링(decoupling, 절연)'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럴 경우 의식은 없어도 지능이 뛰어난 초지능(superintelligence)의 출현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지요. 그렇다면 의식까지 갖춘 초지능의 출현을 뜻하는 '특이점(싱귤레리티, Singularity)'이 도래할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요? 그런 인공지능이 인류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호킹 박사의 경고에 대해서는요?
의식이 없이도 초지능만으로도 인류에게는 거대한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택시를 몰거나 질병을 진단할 때도 의식까지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무의식 인공지능'은 수십억의 사람을 고용 시장에서 내몰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의식 없는 인공지능이 부주의하게(혹은 부주의한 지시를 따르다가) 인류의 파괴를 실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게 모두 인공지능의 의식 유무와는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호킹 박사의 우려가 아주 정당하다고 봅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미래를 불안해합니다. 기술 변화로 인해 일과 삶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점점 빨리 변하고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도 변화하고 학습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이상 일생에 걸쳐 고정된 경력이나 고정된 직업 정체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반복해서 재발명해야만 할 겁니다. 이런 일은 아주 힘이 들겠지요. 왜냐 하면 일정 나이를 넘어가면 사람들은 변화를 점점 싫어하게 돼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기 자신의 변화는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을 배우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은 전통 교육은 쓸모없다고 했습니다. 만일 당신의 자녀가 있다면 어떻게 키우고 가르칠 건가요? 전통적인 도덕적 가치와 덕목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대안은요?
이전까지 전통 교육은 학생들에게 평생에 걸쳐 도움이 될 정보와 옳은 대답, 일련의 기술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뒀습니다. 지난 시대에는 아마도 그걸로 충분했는지 모릅니다. 정보가 희소하고 세상이 상대적으로 느린 속도로 변했을 때니까요. 따라서 10대 시절에 배운 것들이 50세가 된 후에도 여전히 아주 유용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가 넘쳐납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30년 후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를 정도지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를 거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10대가 지금 무엇을 배우든지 50이 되었을 때는 아마도 소용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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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 같으면 정보 습득보다는 감성 지능을 발달시키는 데, '옳은 해답'을 고집하기보다는 질문을 하도록 하는 데, 일련의 정해진 기술과 정체성을 습득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변화시킬 줄 하는 능력을 배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도덕적 가치는 아주 중요합니다. 강한 도덕적 기초가 없으면 그토록 혼돈스럽고 폭풍 속 같은 세상을 항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테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종교적 독단주의와 광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혼돈의 시기에는, 사람들은 어떤 확고하고 절대적인 해답을 원합니다. 많은 종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신으로부터 직접 받은 무오류의 해답들을 제시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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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윤리는 신들이나 민족들 같은 허구적 존재에 대한 믿음에 기초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강한 도덕적 기초를 만들어낼 때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허구에서 실재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정말 실재하는 것인지(what is really real)?' 물어야 합니다.
실재하는지 여부를 가려내는 최선의 시험 중 하나가 고통입니다. 어떤 존재가 실재하는지 알고 싶다면 자신에게 이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제우스 신전이 불타내린다고 해서 제우스가 고통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유로 가치가 폭락한다고 해서 유로가 고통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은행이 파산한다고 해서 은행이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지요. 국가가 전쟁에서 패한다고 해서 국가가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주어로 쓰인 것들은) 모두 단지 은유일 뿐이지요.
반면에, 한 병사가 전투에서 부상당하면 그는 실제로 고통을 느낍니다. 투자자가 주식시장 버블이 꺼지면서 재산을 잃게 되면 고통을 느낍니다. 산업화된 대규모 공장식 농장에서 젖소가 갓 태어난 송아지와 분리되면 고통을 느낍니다. 이런 것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은 어떤 허구에 봉사하기보다 실재하는 고통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하라리 교수의 후속작(히브리어판)
-새로 나올 책 제목이 '내일의 역사( The History of Tomorrow)'이더군요. 소개를 좀 해주실 수 있습니까?
제목이 그렇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담은 책은 아닙니다. 21세기에 인류가 직면할 여러 상이한 가능성들을 조망해보려는 시도입니다. 우리가 맞게 될 주된 기회와 위험과 도전 들은 무엇일까? 질문하고 답을 제시해봤습니다.
AI와 유전공학 같은 기술 발달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하지만 기술 도서는 아닙니다. 가령 AI의 기술적 측면에 천착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신 기술들의 부상이 담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함의들에 주로 관심을 뒀습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