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세 류현진과 42세 노경은이 한국 야구의 WBC 8강 진출을 이끌었다. 대만전에서 류현진이 선발 마운드를 밟았고, 노경은은 10회초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마지막 투수로 등판해 WBC 역대 최고령 등판 기록을 세웠다. 8강 명운이 걸린 중요한 경기에서 처음과 끝을 책임진 것이 모두 불혹을 넘긴 베테랑들이었다는 사실은 한국 야구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호주전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선발 손주영이 1이닝 만에 팔꿈치 통증으로 갑작스럽게 마운드를 내려가자 노경은이 급히 호출됐고, 2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위기를 막아냈다. 총 7명의 투수를 동원한 릴레이로 간신히 호주를 막아낸 것이 한국 투수진의 현실이다.
젊은 투수들은 어디에 있나

류지현 감독이 대만전 선발로 류현진을 예고하며 "현시점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투수"라고 한 말이 씁쓸하다. 류현진의 마지막 국제대회 등판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으로 무려 15년 전이다. 젊은 투수들의 성장이 더디고 국제대회에서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투수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한국 야구의 고민이 이번 WBC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불펜 사정도 다르지 않다. 20대 투수들이 각 구단 마무리를 맡고 있지만 막상 국제대회 뚜껑을 열어보니 가장 약한 고리가 됐다. 2024년 프리미어12에서 젊은 계투들이 고전했고, 이번 WBC는 연습경기 단계부터 불펜 난조가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됐다.
너무 얇은 투수층의 민낯

대표팀은 이번 WBC에 핵심 투수들을 동반하지 못했다. 유일한 확실한 에이스로 평가받던 안우진이 벌칙 훈련 중 어깨 부상으로 출전이 무산됐고, 좌완 구창모는 구단 반대로 대표팀 훈련조차 하지 못했다. 문동주와 원태인도 최종명단 발표 전후 차례로 부상 이탈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너무 얇은 국내 투수층이다. 주축 몇 명만 빠져도 국제대회에 쓸 만한 투수를 찾기 어려운 현실을 이번 대회에서 재확인했다. 최강 일본은 야마모토 요시노부 등 빅리그 투수들 외에도 국내리그 각 구단 에이스들이 한 수 위 기량으로 상대 타선을 압도했다. 대만은 2000년생 동갑내기 원투펀치 쉬뤄시와 구린루이양이 호주와 한국 타선을 꽁꽁 묶었다.

곽빈이 대만전에서 최고 157.5킬로미터 빠른 공을 던지며 3이닝 3분의 1 1실점으로 분전했지만, 그 외에는 기대 이하였다. 김영규는 일본전에서 연속 볼넷에 2타점 적시타를 맞으며 무너졌고, 유영찬은 체코 상대로도 고전하며 실점했다.
홈런 더비의 주인공이 된 한국

대표팀은 체코, 일본, 대만을 상대로 3경기에서 8홈런을 맞았다. 도쿄돔이 홈런이 잘 나오는 구장임을 감안해도 너무 많이 맞았다. 같은 조건인 대만이 4경기에서 4개, 호주는 3경기 1개밖에 맞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한국 투수진의 문제가 더욱 도드라진다.
류현진, 김광현, 양현종, 윤석민 등 확실한 대표팀 에이스들의 시대가 저물면서 한국 야구의 국제대회 성적은 급전직하했다. 새로운 마운드 자원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국제대회에서 웃기 어려운 상황이다. WBC 8강 진출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국 야구가 전혀 풀지 못한 숙제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대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