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의 해다. 월드컵 하면 떠오르는 문구가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붉윽 악마’가 한국과 독일의 월드컵 4강전 때 선보인 카드 섹션 문구다.
그해 여름 우리 국민은 잊지 못할 순간들을 경험했다.
불가능할 것 같던 승리를 연달아 만들면서 장식한 4강 신화. 장례식장에서도 환호성이 터져 나오던 여름이었다.
꿈을 이뤘던 그해, 우리 국민에게 “꿈은 이루어진다”는 마법같은 주문이 됐다.
뜨거웠던 그 여름이 생생한데, 2002년에 태어난 선수들이 프로 선수가 돼 또 다른 꿈을 이루어가고 있다.
2022시즌이 끝나고 2002년생 ‘광주 신인왕’ 선수들의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다.
2021 KBO 신인왕에 빛나는 KIA 타이거즈 좌완 이의리와 2022시즌 K리그2 우승을 이끌며 ‘영플레이어상’을 받은 광주FC의 엄지성이 그 주인공이었다.
비시즌에 박찬호와 풋살을 하고 있다는 왼발잡이 이의리와 어렸을 때 동네 야구를 했지만 한 번도 야구장을 가본 적은 없다던 엄지성의 만남.
서로의 종목에 대한 궁금증을 묻기도 하면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내 친구가 됐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난 뒤에는 ‘항저우 아시안게임 동반 금메달’을 다짐했다.
하지만 기대감으로 시작했던 두 선수의 2023시즌은 아쉬움으로 끝났다.
3월 카다르 도하에서 열린 2023 도하컵 U-22 친선대회에서 아랍에미리트와의 결승에 선발 출장했던 엄지성은 공중볼을 다투던 중 상대와 충돌하면서 의식을 잃고 그라운드로 추락했다.
이 부상 여파로 엄지성은 시즌 도중 어지럼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리고 연령별 대표팀에서 꾸준히 이어졌던 활약에도 아시안게임 대표팀 탈락이라는 쓴 경험도 했다.
이의리에게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2023년이었다.
이의리는 아시안게임 대표팀 소집 전날 황당한 낙마를 경험했다.
조계현 KBO 전력강화위원장과 류중일 대표팀 감독은 ‘손가락 물집’을 핑계로 “부상으로 인한 경기력 저하 우려”라는 기준에도 없는 멋대로의 기준으로 정상적으로 경기에 등판했던 이의리를 명단에서 제외했다.
논란의 대표팀 탈락을 경험안 이의리는 이후 3경기에서 18이닝을 소화하며 2.00의 평균자책점을 찍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얼마 전 두 선수가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문자로 종종 안부를 묻던 이들은 시구자와 선수로 챔피언스필드에서 만났다.
엄지성의 이름 앞에는 스완지시티 선수이자 국가대표라는 이름이 더해졌다.
영국에서 두 번째 시즌을 끝내고 귀국한 엄지성은 지난 7일 이의리가 서던 마운드에 올라서 공을 던졌다.

한화전 시구자로 박수받은 그는 잠시 뒤 관중석에서 KIA 팬으로 뜨거운 응원을 보냈다.
지난해 처음 챔피언스필드를 찾았던 엄지성은 야구장 분위기에 매료돼 KIA 팬이 됐다.
고된 타국 생활을 버티게 하는 힘 중 하나가 KIA였다.
엄지성은 “시즌 끝나고 시간 될 때마다 경기를 봤다. 시차가 있어서 퇴근하면 경기 하이라이트가 떠 있었다. 그것을 보는 게 낙이었다”고 웃었다.
온전히 경기에 집중하고 싶어서 하이라이트를 보기 전에 인스타그램도 안 들어갔다는 엄지성.
미리 결과를 알고 경기를 보고 싶지 않았다는 게 엄지성의 설명이었다.
야구팬으로서 시구를 하는 꿈을 이룬 엄지성은 그리고 며칠 뒤 축구 선수로 가장 간절하게 바라던 꿈을 이뤘다.
16일 발표된 2026 북중미월드컵 국가대표 최종 명단에 엄지성의 이름이 포함됐다.
원래는 오른발잡이인 그는 손흥민을 롤모델로 해서 그의 영상을 보고 또 보면서 왼발을 단련했다.
엄지성은 피나는 노력 끝에 손흥민처럼 양발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선수가 됐다.
금호고 2학년 때는 손흥민이 토트넘 시절에 기록했던 70m드리블 골을 선보이기도 했다. 사실 손흥민보다 한 달 정도 앞서 금호고 엄지성이 70m를 질주 끝에 득점을 기록해 화제를 모았었다.
금호고 엄지성은, 손흥민 형과 함께 같은 그라운드를 누비는 꿈을 이야기했었다.
엄지성은 지난해 10월 파라과이와의 평가전에서 A매치 2호골을 장식했다.
기뻐하는 엄지성을 향해 달려와 포옹을 한 선수, 바로 손흥민이었다.
매년 크고 작은 부상에 신음했고,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불운에 울어야 했지만 엄지성은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달렸다.
그 노력의 결과 그는 머릿속에 상상하던 손흥민과 동료로 함께 뒤는 꿈을 이뤘고, 이번 월드컵에서 펼쳐칠 손흥민의 ‘라스트 댄스’에 함께 할 수 있게 됐다.
엄지성에게는 아직 남은 목표가 있다.
월드컵 무대에서 골을 장식하고 손흥민과 그의 시그니처 ‘찰칵 세리머니’를 하는 게 엄지성의 또 다른 꿈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기대되는, 기다려지는 장면이다.

‘운칠기삼’이라고 한다.
인생 살아보니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는데, 가끔은 허무할 정도로 운이 좋게 이뤄지는 것들이 있다.
프로 스포츠 세계에서도 운은 중요하다.
아무리 잘 친다고 해서 안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 맞은 타구가 직선타가 되고, 빗맞은 타구가 행운의 안타가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 어느 팀에서, 어떤 동료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도 선수 인생을 바꾸는 중요한 운이다.
운이 실력이 되는 것이다.
앞서 엄지성과 이의리의에게는 딱히 운이 따르지 않았다.
신인왕이라는 빛나는 순간을 맛보기는 했지만 부상에 시달리기도 했고, 중요했던 2023년에 두 사람 모두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다.
도쿄올림픽 에이스였던 이의리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황당한 탈락을 경험했고, 꾸준하게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엄지성은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시련의 시간은 있었지만 두 선수의 앞날은 창창하다.
누구나 인정하는 실력을 갖췄고, 더 큰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성실함과 영리함이라는 무기가 있다.
성향은 조금 다르다. 세밀하게 생각이 많은 이의리와 대범하고 도전적인 엄지성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엄지성의 축구 인생이 쉽지는 않았다.
상대들의 집요한 견제에 엄지성은 부상을 달고 살았다.
이정효 감독이 누구보다 강하게 조련했던 선수이기도 했다.
경기 내내 엄지성의 이름을 외치던 이정효 감독. 물론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건 아니었다.
엄지성의 능력과 그릇을 알기 때문에 이정효 감독은 더 엄지성을 몰아붙였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이정효 감독의 질책을 받던 순간에도, 목발을 짚고 경기장에 등장한 순간에도 엄지성은 웃고 있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겠지만 엄지성은 웃었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고민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서 도전하곤 했다. 그 결과는 월드컵 대표로 이어졌다.
꼬박꼬박 KIA 경기와 소식을 찾아봤던 엄지성은 이의리가 힘든 시간을 보낸 것도 잘 안다.
그래서 오히려 엄지성은 “힘을 내라”는 말조차 조심스럽다.
“종목은 다르지만 나도 힘들었던 경험이 있어서 잘 안다. 버티다 보면 어느 순간 좋아져 있었다. 선배님들 좋은 동료들 있으니까 좋은 조언도 얻고 힘든 과정 이겨내면 좋겠다. 신인상 받은 것처럼 좋은 순간도 있었으니까 반드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버티는 힘을 이야기한 엄지성은, 좋은 순간을 이야기했다.
프로 선수가 가장 받기 어려운 귀한 상이 신인상이다.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 단순히 운으로만 얻을 수 있는 상이 아니다. 실력과 노력 없이 이룰 수 없는 타이틀이다.
그만큼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한 의심 없이, 또 자부심을 가지고 달릴 필요가 있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누리고 싶던 순간에 이의리는 없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에 뛰어든 첫 해 국가대표 에이스 역할을 했지만 시상대에는 오르지 못했다.
대표팀의 아쉬운 성적에 묵묵히 역할을 하고도 고개를 숙여야 했던 이의리.
프로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우승 순간에도 이의리는 없었다.
팔꿈치 수술로 재활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뜨거웠던 동료들의 질주에 함께 하지 못했다. V12의 순간은 관람자로 지켜봐야 했다.
올 시즌도 시작은 좋지 못했다.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노력하고 준비했던 만큼, 이의리에게는 더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프로는 프로다.
결국 프로는 결과로 이야기해야 한다. 다행히 이의리는 조급했던 마음을 덜고 다시 시작하는 시간을 얻었다.
16일 삼성전에서 아쉽게 패전투수는 됐지만 이의리가 왜 이의리인지를 보여주는 장면들도 연출하면서 5.1이닝을 버텼다.
물론 이의리의 이름과 기대에는 부족한 이닝이지만, 재활의 시간 뒤 맞는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이닝이다.
이의리는 늘 그래왔듯 많은 목표와 꿈을 노트에 적어뒀을 것이다.
그 꿈들을 되새기고 이루기 위해 지금도 간절히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실력과 노력이 있다면, 간절하게 바라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노력에 비해 운이 부족했던 두 선수의 올 시즌에는 행운이 가득하길...
<광주일보 김여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