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건물이 대피소라고요?"… 표지판 없고 쓰레기만 가득 [현장르포]

박지연 2023. 6. 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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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피소 지정 건물
빌딩 관리원도 대피소인지 몰라
건물 잠겨 있거나 주차차량 가득
외부차단 안되고 구호물품 없어
재난약자 배려 대피소 발굴 필요
지난 1일 찾은 국회의사당 인근 대피소 내부. 가림막이 없고 내부에 폐지가 쌓여있다. 사진=박지연 기자
지난 3일 찾은 강남구 논현, 역삼 일대 대피소. 정문이 폐쇄돼 있거나(왼쪽) 눈에 띄기 어려운 크기의 표지판이 붙어있다. 사진=주원규 기자
"여기가 대피소라고요? 몰랐어요. 처음 들었네요"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빌딩 관리 직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 3일 찾은 이 건물 지하주차장 3개 층은 민방위 대피소로 지정된 곳으로, 강남역에서 도보로 단 300m 떨어져 있다. 전쟁이 나면 인근 회사원과 주민 9800여명을 수용해야 한다. 주차장 입구에 '대피소' 표지판이 붙어있었지만, 이를 제외하곤 유사시 대비와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이 건물 지하는 주말 낮 시간대였는데도 대부분 자동차로 가득 차 있었다. 일부는 건물에 세 들어 사는 회사의 짐을 두는 적재공간으로도 쓰였다. 이 건물 1층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한 직원은 "평소에 관심이 없어 (지하가) 대피소인 줄 몰랐다"며 "만일 실제 비상상황이 터지면 대피나 제대로 할 수 있겠나"고 말했다.

지난달 31일 서울시의 '경계경보 발령' 소동 이후 실제 비상 상황에서 찾아갈 수 있는 대피소에 시민들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하지만 대피소 내부에 비상구호물품이 없는 것은 물론, 대피소 안내 표식이 없거나 야외와의 차단막조차 없는 경우가 많아 시민 보호가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표지판·비상물품 없고 쓰레기만

4일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서울시에는 총 3222곳의 민방위 대피소가 있다. 국가재난안전포털이나 안전디딤돌 앱, 각 지자체 홈페이지 등에서 대피소 위치를 검색해 찾을 수 있다.

본지가 지난 1~3일 강남, 여의도, 영등포 일대 대피소 10곳을 방문한 결과 이중 8곳은 대피소 환경이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에서 불과 500m 떨어진 지하보도 대피 공간 내부는 외부로부터 격리할 수 있는 마땅한 차단막도 없었다. 생화학무기나 포화로 공격받을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구석에는 쓰지 않는 폐지만 겹겹이 쌓여있을 뿐이었다.

아파트 내 주차장 대피소는 입장부터 어려운 곳이 많았다. 국회로부터 1㎞가량 떨어진 영등포동 소재 C아파트의 지하주차장 대피소는 거주자의 경우 내부 엘리베이터나 계단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외부인은 보안장치 때문에 자동차가 오가는 출입구로 걸어 내려가야 한다. 경사가 가파르고 내부가 어두워 노약자는 이동하기 어려워 보였다.

상당수 대피소는 구호물품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영등포구청역 인근 D상가 지하 대피소에서 만난 한 관리인은 "대피소 표지판을 걸어두고 구청에서 가끔 점검만 나올 뿐"이라며 "따로 비상물자가 구비돼 있진 않다"고 전했다. 온라인 상에서 대피소로 안내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건물이 잠겨있거나, 표지판이 아예 붙어있지 않은 곳도 있었다. 지자체 홈페이지에서 민방위 대피소로 소개한 역삼동 소재 F건물을 찾아갔지만 정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신논현역 인근 G오피스텔에서는 대피소 표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곳에 거주하는 송모씨(43)는 "여기가 대피소인 줄 몰랐다. 근처 가까운 지하철역으로만 가는 줄 알았다"고 전했다.

■"표지판 규격 맞추고 재난약자 배려해야"

유사시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대피시설의 접근성을 높이고 재난약자를 배려한 시설이 조성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연구원은 지난 2021년 말 펴낸 '서울시 대피시설 실태와 개선방안' 보고서를 통해 △지자체 간 격차가 크고 접근성 불리 △제각각인 대피소 안내표지판 △재난약자 배려 대피소 부족 △대피소에 대한 낮은 시민 인지도 등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연구원은 "대피시설별로 제각각 디자인·설치된 안내표지판에 대해 통합적이고 표준화된 기준을 마련해 적용하고, 설치 위치는 모든 출입구로 하되 대피 경로와 이동동선을 고려해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설치토록 해야 한다"며 "신속하고 안전하게 대피 수 있도록 노약자, 장애인 등 재난약자가 밀집한 지역을 중심으로 기존 시설 중 가용한 시설을 발굴하고, 대피시설이 방재활동 기지로서의 종합적 역할을 수행토록 해야 한다" 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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