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오늘, 나는 챔피언스필드에서 바쁘게 기사를 마감하고 있었다.
눈치 없는 가을비 덕분에 포스트 시즌 역사상 첫 서스펜디드가 선언됐고 이날 한국시리즈 두 경기가 연달아 진행됐다.
경기 전 가장 주목을 받은 선수는 이번 가을을 불태우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의 김영웅이었다.
0-1로 뒤진 6회초 무사 1·2루 그리고 1볼, 김영웅의 타석에서 경기가 멈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김영웅은 훈련 시간에 마주친 KIA 선배들에게 “영웅아 그래서 번트 할 거야? 강공으로 갈 거야?”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물론 김영웅은 확실한 답은 못 하고 눈웃음만 지었다.
그렇게 ‘2박 3일’의 눈치 싸움이 전개됐고, KIA는 전상현을 내세워 중요한 아웃카운트를 만들고 1차전 뒤집기에 성공했다. 이때 삼성의 선택은 번트였다.
경기가 끝난 뒤 가장 주목을 받은 선수는 지난 시즌 KBO를 뜨겁게 달궜던 KIA 타이거즈의 김도영이었다.
예열을 끝낸 KIA의 방망이가 2차전에서 폭발하면서 1회말에만 5명의 주자가 홈에 들어왔다. 그리고 2회에는 김도영이 홈런포를 날리고 그라운드를 돌면서 분위기를 완전히 KIA로 가져왔다.
하루에 2승을 거뒀던 KIA는 기세를 이어 10월 28일 챔피언스필드에서 12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겨우 1년 전 일인데 아주 옛날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다. 그만큼 KIA의 올 시즌 1년은 지루했고,무미건조했다. 우승은 무엇이었을까?

잊지 못할 역사의 서스펜디드 현장에서의 하루. 그리고 1년 뒤 오늘 또 다른 우승 현장을 취재했다.
23일 기장 현대차드림볼파크 보조2구장에서 제106회 전국체육대회 남자 U18 이하부 야구 결승전이 진행됐다.
대전고를 8-6으로 꺾고 결승 진출을 이룬 광주일고, 비 덕분에 덕수고를 상대로 행운의 추첨승을 거둔 유신고의 맞대결이었다.
“동메달을 생각하고 왔다”는 광주일고 조윤채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의 우승 헹가래를 받았다.
우승을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은 있었다. 대회를 시작한 뒤 선수들의 타격감 눈에 띄게 올라왔다는 부분이었다.
‘광주일고의 오타니’ 김성준도 “깜짝 놀랐다”고 말할 정도로 감이 좋았다.
하지만 우승 도전에 불리한 부분도 있었다.
결승전 투수로 김성준을 생각했지만 준결승 고비가 있었다.
이겨야 결승이었던 만큼 광주일고는 준결승전에 투수 김성준 카드를 썼다. 결국 결승전에서 김성준은 톱타자 겸 유격수 역할만 해야 했다.
1회말 공격부터 3점을 뽑아낸 광주일고는 최현규의 홈런 세리머니까지 감상할 수 있었다.
2점 차까지 점수가 좁혀지기도 했지만 덕아웃은 흥겨웠다.
선수들은 온갖 응원가를 부르면서 그라운드 위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김선빈 응원가도 흘러나왔다. 광주일고에도 타자 김선빈이 있다.
경기를 즐긴 선수들과 달리, 실점을 하고 상대 주자가 나가 있을 때 오히려 관중석 어른들이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6-3으로 앞선 상황에서 9회초 광주일고의 마지막 수비가 시작됐다.
상대 방망이를 헛돌게 하면서 원아웃을 만든 박찬민. 하지만 연속 안타로 1사 1·2루가 됐다. 위기의 상황이었지만 2구째 타자의 방망이가 움직였고 공은 유격수 앞으로 향했다.
앞선 8회말 아마추어 마지막 타석에서 스탠딩 삼진을 당했던 김성준에게로 공이 향했다. 그는 침착하게 2루수에게 공을 넘겼고 이내 1루로 공이 연결되면서 광주일고의 우승이 완성됐다.

우승 순간을 즐긴 특별한 관람객이 있었다. KIA 타이거즈 외야수 박헌이 ‘졸업생’으로 생애 첫 우승 순간을 즐겼다.
“학생 시절 한 번도 우승을 한 적이 없다. 우승 운이 없다”고 웃은 박헌.
그래도 운 좋게 결승전을 찾을 수 있었다.
KBO 가을리그 선수단에 포함된 그는 울산에 머물고 있다. 24일에는 기장 현대차드림볼파크에서도 경기가 진행된다.
마침 이날이 선수단 휴식일이었고 박헌은 후배들의 결승전 소식에 기쁘게 걸음을 했다.
우승 멤버는 된 적이 없지만 우승을 직관한 박헌은 “작년에 우승하고 갔었으면 좋았는데 우승 못 하고 가서 감독님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올해 애들이 잘해서 우승하니까 좋다”며 “우승은 운이다. 운이 진짜 많이 따라줘야 한다”고 웃었다.
지난해 우승을 기대했던 순간은 있었다.
2024년 청룡기 8강에서 광주일고는 덕수고의 전국대회 20연승을 무산시키면서 3-2 승리를 거뒀다.
박헌은 “(김)태형이가 있던 덕수고가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덕수고만 꺾으면 우승이라는 말들을 했는데 우승을 못 했다”고 아쉬웠던 순간을 떠올렸다.
덕수고를 누르는 이변을 연출했던 광주일고는 마산용마고에 덜미를 잡히면서 결승 진출이 무산됐었다.
운도 따라야 하는 게 우승이다. 하지만 우승은 단순히 운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박헌의 눈에는 다른 힘도 보였다.
박헌은 3학년 후배들의 힘을 이야기하면서 “많이 배웠다”라고 고백했다.
전국체전은 각 시도 체육회가 가장 신경을 쓰고, 공을 들이는 잔치다. 하지만 야구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가 끝난 뒤 치러지는 대회인 만큼 팀의 주축인 3학년들에게는 힘이 빠지는 대회이기도 하다.
프로에 지명된 선수 입장에서는 부상을 조심해야 하고, 지명받지 못한 선수들에게는 의욕이 떨어질 수 있는 대회다.
하지만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빅리그의 꿈을 꾸게 된 ‘특급 선수’ 김성준은 ‘주장’답게 선수들을 이끌면서 최선을 다해서 경기를 뛰었다.
조윤채 감독이 “마운드에서 만화 영화 찍냐고 말하기도 했다”고 웃을 정도로 김성준은 잘 던지고 잘 쳤다.
드래프트장에서 이름이 불리지 않은 이들에게도 이번 대회는 시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날 홈런포를 날린 최현규는 “솔직히 헌이 형보다 내가 더 잘 치는 것 같다. 내가 KIA가겠다. 2년 뒤에 형 따라서 프로 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당당한 도전 예고에 박헌도 활짝 웃었다.

그리고 이들은 가슴에 달려있는 ‘광주일고’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김성준은 경기가 끝난 뒤 “이 우승을 계기로 광주일고가 다시 빛나면 좋겠다”면서 팀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이야기했다.
개인이 아닌 팀을 위해서 그리고 우승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광주일고 선수들은 마지막 대회를 최선을 다해 즐겼다. 그리고 우승을 했다.
박헌은 “3학년들은 진로가 다 정해졌다. 그럼에도 열심히 하는 것 보니까 짠하기도 하고 멋있기도 했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프로를 왔는데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체전을 한 게 아니었는데 애들은 정말 잘하려는 게 보였다. 많이 배웠다”고 후배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후배들에게 배운 박헌은 실전을 통해서도 배우게 된다.
프로 지명 그리고 데뷔라는 꿈을 이뤘지만 프로의 높은 벽도 실감했던 한 해였다.
의미있는 휴식일을 보내고 다시 가을리그 경기에 나서게 될 박헌은 “수비에 초점을 맞추겠다. 수비가 약한 걸 알아서 타격보다는 수비 위주로 보완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타격은 솔직히 그래프라서 잘 친 날도 있고 못 하는 날도 있지만 수비는 꾸준히 해야 한다. 수비에 포커스를 두겠다”고 말했다.
야구는 팀 스포츠이다. 기싸움이기도 하다.
2025시즌 KIA 타이거즈에는 내가 아닌 우리, 두려움이 아닌 즐거움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광주일보 김여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