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 하이브리드 시대를 선점하다

페라리 SF90 스트라달레 아세토리오라노

페라리가 2024년에 사상 처음으로 하이브리드 모델 판매 비중이 내연기관을 앞질렀다.

글 이승용

페라리 e 빌딩

페라리는 2024년 총 1만3,752대를 인도하며 전년 대비 0.7% 성장했다. 판매량 증가 폭은 크지 않았지만, 매출은 66억7,700만 유로(약 9조6,700억 원)로 11.8% 증가하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주목할 점은 페라리 판매 모델 중 하이브리드가 51.3%를 차지하며, 내연기관(48.7%)을 처음으로 넘어섰다는 점이다.

2023년까지만 해도 하이브리드 비중이 40%대에 머물렀으나, 2024년 들어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페라리의 전동화 전환이 본격화되었음을 알렸다.

페라리 e 빌딩

하이브리드의 우세, 왜 중요한가?

하이브리드 판매가 증가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유럽을 중심으로 한 배기가스 규제 강화다. EU는 2035년부터 내연기관 차량 판매를 금지할 계획이며, 슈퍼카 브랜드도 예외가 아니다. 페라리는 이를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하이브리드 모델을 빠르게 확장했고, SF90 스트라달레, SF90 스파이더, 296 GTB/GTS 등 고성능 하이브리드 모델들이 판매량을 주도했다.

둘째, 소비자 인식 변화다. 과거 하이브리드는 성능보다 연료 효율성을 강조한 기술로 여겨졌으나, 페라리는 하이브리드를 성능 향상의 도구로 활용하며 기존 고객들의 인식을 바꿨다. 예를 들어, SF90 스트라달레는 1,000마력에 달하는 출력을 제공하며, 296 GTB는 V6 터보 엔진과 전기모터의 조합으로 경량화와 핸들링 개선을 이루었다. 이러한 기술적 성과가 하이브리드 모델에 대한 소비자 신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페라리 SF90 스트라달레

페라리의 수익성 전략, '적게 팔고, 더 많이 번다'

페라리는 2024년에도 생산량을 제한하는 전략을 유지했다. 전체 판매량이 1% 미만의 증가에 그친 반면, 영업이익(EBIT)은 18억8,800만 유로(약 2조7,300억 원)로 16.7% 증가했고, 순이익은 15억2,600만 유로(약 2조2,000억 원)로 21% 상승했다. 이는 단순히 더 많은 차량을 팔아서가 아니라, 더 비싼 차를 더 높은 마진으로 판매하는 전략 덕분이다.

페라리 296 GTB

페라리는 이를 위해 맞춤형 옵션(Tailor Made)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고객들이 자신만의 특별한 페라리를 만들도록 유도해 차량당 평균 판매 가격을 크게 높였다. 실제로 2024년에는 맞춤형 옵션 판매가 전년 대비 13.5% 증가했으며, 이를 통해 수익성이 극대화되었다. 또한, 한정판 모델과 고급 사양을 추가한 특별 모델을 통해 평균 판매 가격을 더욱 끌어올렸다.

페라리 296 GTB

또한 생산량을 의도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차량의 희소성을 유지하는 전략도 지속되었다. 현재 페라리의 주문 대기 기간은 평균 2~3년이며, 일부 한정 모델은 2027년까지 생산 예약이 마감된 상태다. 이러한 전략은 차량의 잔존가치를 높이는 동시에, 브랜드 희소성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페라리 e 빌딩

2025년 첫 전기차 출시, 페라리의 전동화 전략은?

페라리는 2025년 첫 순수 전기차(BEV)를 출시할 예정이다. 하지만 단순한 전기차가 아니라 '페라리다운' 전기차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페라리는 이미 마라넬로 본사에 'e-빌딩'을 완공하고, 배터리 및 전기모터 개발을 독자적으로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기존 전기차들과 차별화된 경량화 기술, 특수한 사운드 디자인, 모터 응답성 개선 등의 요소를 적용할 계획이다.

페라리 e 빌딩

페라리는 2030년까지 하이브리드 및 전기차 비중을 80%까지 확대할 계획이며, 이 중 40%는 전기차, 40%는 하이브리드, 나머지 20%는 내연기관으로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즉, 내연기관 모델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전망이며, 특히 V12 엔진 모델은 한정판 형식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페라리 e-셀 랩

전기차 시대에도 페라리는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차별화된 기술을 적용할 예정이다. 예를 들어, 엔진음이 사라지는 대신, 전기모터의 고유한 사운드를 증폭하여 주행 감각을 살리는 기술을 연구 중이며, 공기역학적 설계를 극대화해 기존 모델들과의 디자인 차별성을 둘 계획이다.

페라리 e-셀 랩

슈퍼카 시장에서의 페라리 위상, 경쟁사는?

페라리는 여전히 슈퍼카 시장의 최강자지만, 경쟁사들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람보르기니는 지난해 1만687대를 판매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고, 하이브리드 슈퍼카인 레부엘토(Revuelto)가 인기를 끌면서 전동화 속도를 높이고 있다.

사진 람보르기니

하지만 하이브리드 판매 비중에서는 여전히 페라리가 앞서 있으며(51.3% 대 10% 내외), 순이익과 영업이익률에서도 차이가 크다.

포르쉐 월드 로드쇼 사진 포르쉐

포르쉐는 전기차 시장에서 앞서가고 있다. 2019년 타이칸을 출시하며 전동화에 빠르게 적응했고, 현재도 전기차 및 하이브리드 모델을 꾸준히 확대 중이다. 하지만 포르쉐는 연간 30만 대 이상을 판매하는 브랜드로, 희소성과 브랜드 가치 면에서는 페라리와 차별화된다.

부가티 베이론 16.4  사진 부가티

맥라렌, 애스턴 마틴, 부가티 등 다른 슈퍼카 브랜드들도 전동화 기술을 도입하고 있지만, 판매량과 수익성 면에서 여전히 페라리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맥라렌은 최근 경영난을 겪으며 전동화 투자를 늦추고 있고, 애스턴 마틴은 하이브리드 모델 출시 속도가 더디다.

페라리 296 GTB 엔진

전동화 시대에도 '페라리는 페라리'

2024년은 페라리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된 해다. 하이브리드 모델이 처음으로 내연기관을 앞지르며, 전동화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음을 입증했다. 하지만 페라리는 단순한 전기차 브랜드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 전동화 속에서도 '페라리만의 감성'을 유지하는 방향을 택하고 있다.

2025년 첫 전기차 출시를 앞두고 있는 페라리는 하이브리드와 내연기관, 전기차를 균형 있게 유지하면서 브랜드 정체성을 지켜갈 계획이다. 경쟁사들이 전기차와 SUV 시장 확장에 집중하는 사이, 페라리는 희소성과 맞춤형 옵션, 최상급 성능을 강조하며 럭셔리 슈퍼카 브랜드로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결국, 전기차 시대가 오더라도 '페라리는 여전히 페라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