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예술인을 담다] (19) ‘여백에 눌러 담은 생’ 이달균 시인

전쟁 같은 삶·상실마저 사랑하게 된 시인

최근 ‘상실’을 노래한 열 번째 시집 출간
치열한 고민·자아 성찰 등 담아내

1987년 첫 시집… 꾸준히 삶의 모습 담아
여섯 번째 시집부터 ‘난중일기’ 연작 시작
“어떤 것이 간절하게 다가오면 시가 되죠
늘 마음을 열고 외면하지 않으려 노력해요”

40여년 시 썼지만 여전히 만족 못해
“내 시는 미완의 바퀴… 평생 쓰다 죽겠다”

곁을 떠나는 모든 것들에 슬펐다. 무언가 사라질 때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아서 한껏, 일부러 더 울었다. 산다는 건 인연을 만드는 일이어서 무언가는 또 곁을 채웠다. 그것들은 또 사라지고 생겨나고. 무수히 상실한 다음에야 생각했다. 더 이상은 애써, 슬프기를 노력해서는 안되겠구나. 그러다간 나를 잃어버릴 일이었다.

이달균 시인이 창원시청 내 집필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전강용 기자/

이달균 시인이 자신의 열 번째 시집 ‘달아공원에 달아는 없고’에서 상실을 노래하는 사정도 같다. 상실의 일상화. “우리는 인연을 맺은 많은 사람들과 상실을 겪어요. 너무 많은 상실을 체험하다 보니까 이제 이것들을 내가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시점에 온 것 같았죠.”

그래서 그는 상실마저 사랑하기를 택했다. 그러므로 어느날 마주한 일몰에서 그가 상실을 떠올린 것은 당연했다. “일몰도 일종의 상실이잖아요. 상실이 꼭 잃어버리는 것이라기보다도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그런.”

‘어제 한 화가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코끼리 어금니를 닮았다는 바닷가/ 내 안의 나이테를 헤며 가만히 걸어봅니다// 딱히 추억할 일도, 버려야 할 무엇도 없이/ 적막에 기대어 이름을 불러보지만/ 세월은 너무 견고하여 몰입은 쉽지 않네요// 안개인가 어스름인가 섬들 지워지고/ 둔탁한 생각이 발끝으로 밀려날 때/ 태양은 시한부로 지는지 붉음을 더해가네요’ - ‘달아공원에서’ 중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그럴 수 있는 것. 초연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연연하지 않을 뿐. 그래서 시인은 애써 말하기를 생략하기로 했는지 모른다. ‘하루해/ 짧다 해도/ 길다// 한 생애/ 길다 해도/ 짧다//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오늘은 또/ 말줄임표로’ - 시인의 말

“하루가 짧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니까 길어요. 근데 한 생애는 굉장히 긴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또 찰나이기도 해요. 많은 얘기를 아무리 해본들 모든 것이 다 상대에게 전달되지도 않을 것이고, 또 다 한다고 해도 속 시원해지지도 않을 것 같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여백 속에 담을 수밖에 없겠구나.”

그가 여백 속에 담아내는 것들은 우리를 둘러싼 전쟁과도 같은 삶. 그가 ‘난중일기’라는 이름으로 연작시를 쓰는 이유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한 번도 난중이 아닌 적이 있었나요. 역사적 사실로의 난중은 물론, 내적 갈등 속의 난중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요.”

난중일기의 첫 시작은 그가 통영시에 머무르던 2016년 내놓은 여섯 번째 시집 ‘늙은 사자’에서였다. 당시 통영엔 적조 피해가 크게 발생했고 떼로 죽은 물고기를 산에 묻었다. 그것을 보며 그는 1592년 한산대첩을, 우리의 승전으로 통영 앞바다에 수장된 왜적들의 주검을 떠올렸다.

‘세월을 당겨서 은하도 가까워진 오늘, 저 붉은 뉫살을 대적할 무기가 벽방산 무릎을 파낸 한줌 황토뿐이라니./ 한차례 태풍이라도 다녀가시면 모를까 의서에도 이 병의 처방이 묘연타 하니 이만큼 차오른 울화만 다독일 뿐입니다.’ - ‘통영 세병관에서 적조를 아룀 - 난중일기1’ 중.

“‘벽방산 무릎을 파낸 한 황토’만이 묘책이라니. 지금도 전쟁은 도처에서 일어나잖아요. 전쟁을 없앨 묘책을 찾지 못해서죠. 끊임없이 생명이 난도질되는 역사가 반복되는구나 생각하며 시를 적고 있습니다.” 시집 ‘늙은 사자’에 1~10, ‘열도의 등뼈’에 11~19, 그리고 이번 시집에 20부터 53까지의 ‘난중일기’를 담았다.

시인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에 유난히도 공감했다면 그 이유는, 오히려 그가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늘 정신적으로 열려 있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작가로서 좋은 작품을 써야겠다보다는, 적어도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외면하지는 않아야 되겠다 생각하는 거죠. 그러다 어떤 것이 간절하게 다가오면 시가 되는 것이고요.”

그는 1987년 첫 시집을 내고 40여년의 시간을 시인으로 살고도 아직 만족할 만한 시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여생에서 어떤 시를 써야 한다는 목표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언 숲에 묻어두고 갈 시 한 편이 있는가?// 비가를 쓰지 못한 비운의 시인에게// 오늘도 장수하늘소는 찾아오지 않는다’ - ‘섣달그믐’

“그래서 끝없이 글을 쓰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굴리는 바퀴는 미완의 바퀴이기 때문에 그 바퀴가 치열하게 굴러서 벽에 부딪혀서 산화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 처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끝까지 가서 한 번쯤은 피를 쏟는 결과물을 얻고 싶죠. 결국 글을 쓰다 죽겠죠.”

시인은 그저 치열하게 오늘을 산다. 그래서 우리는 무사히, 내일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김현미 기자 hm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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