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된 영화 속 과학] ③PTSD 치료 가능할까…'이터널 선샤인(2005)'

박정연 기자 2024. 10. 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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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기억을 지우기 위한 장치를 착용하고 있는 <이너널 선샤인>의 장면. 유튜브 예고편 캡처.

[편집자주] 공상과학소설(SF) 영화에 등장하는 놀라운 첨단 과학기술은 관객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기술의 힘을 빌린 영화 속 주인공은 현실세계의 우리들보다 편리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기도 하고 때때로 기술이 일으킨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고뇌에 빠지기도 합니다. 눈부신 기술의 발전 속도는 이러한 영화 속 상황을 곧 현실로 이끌어냅니다. 상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던 첨단 기술이 우리 삶에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이러한 기술들이 우리 삶을 바꾸는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할 수 있을지 살펴봅니다.

2005년 개봉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은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으로 고통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회사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다. 자신의 헤어진 연인이 첨단 기술을 사용해 주인공과의 기억을 지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서비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도 옛 연인과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의뢰한다. 헬멧 같은 기계를 쓰고 일종의 수면상태에 빠진 주인공은 연인과의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서서히 지워나가기 시작한다.

커다란 슬픔이나 고통스런 기억은 경우에 따라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질환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다. 환자는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계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안 장애 등을 겪게 된다. 생물학적으로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벤조다이아제핀 수용체 등에 이상이 생기게 된다. '마음의 상처'가 실질적인 '신체의 상처'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기억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 헤어진 연인의 기억을 지우는 <이터널 선샤인>의 등장인물처럼 원하는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삭제해 몸과 마음의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억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고통에서 해방되는 시대가 도래할지 주목된다.

● 고혈압 약물로 고통스런 기억의 '공고화' 막는다

뇌의 신경세포를 표현한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현재 연구 중인 기술들은 인간의 뇌에서 특정한 기억을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다만 기억이 뇌 속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는 과정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는 만큼 강렬한 기억의 인상을 억제하거나 기억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을 방지하는 기술들이 발전하고 있다.

괴로운 기억이 머릿속에 깊이 뿌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선 약물 치료가 가능하다.

우리의 뇌에서 기억은 부호화, 저장, 공고화, 재공고화, 인출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 이 중 재공고화 과정은 기억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는 데 관여한다. 

재공고화 과정을 막는 데는 프로프라놀롤이라는 약물이 사용된다. 원래 고혈압약으로 쓰이는 이 약물은 심장 박동과 말초혈관의 수축을 억제하는 작용을 통해 기억이 뇌 속에 오랫동안 자리잡는 것을 막는다.

특정한 기억을 떠올릴 때 뇌 부위에서 감정적 변화와 관련한 영역인 기저외측편도체에 이 약물을 투과하면 뇌신경전달 물질인 노르아드레날린의 작용을 감소시킬 수 있다. 노르아드레날린은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기억의 재공고화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로 우울증 발병과도 연관이 있다. 실제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회상할 때 프라프라놀롤을 사용하자 스트레스와 관련한 지표가 하락했다는 연구 결과도 다수 있다.

● 빛을 사용해 기억의 형성·유지 억제하는 기술도 등장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비롯되는 질환인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표현한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국내에서도 기억의 형성과 망각을 조절하는 기술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허원도 KAIST 생명과학과 교수 연구팀은 파장이 짧으면서 강력한 에너지를 지닌 빛인 청색광을 통해 단백질의 활성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과도한 기억의 형성을 억제하는 기술을 연구 중이다.

앞서 허 교수 연구팀은 뇌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활성화되는 신호전달분자효소인 단백질 'PLCβ1'가 뇌 해마에서 기억을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단백질이 결핍된 실험용 쥐에게서 과도한 기억 형성과 공포 반응이 증가하는 것이 관찰된 것이다. 

청색광을 사용한 광유전학 기술을 통해 이 단백질의 활성화나 비활성화를 조절하자 뇌의 특정 부위에서 일어나는 신경 활동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었다. 허 교수는 "단백질의 기능을 정밀하게 조절해 과도한 공포 기억 형성을 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정신질환 치료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뇌가 공포 기억을 저장하는 메커니즘도 정밀하게 규명되고 있다. 지난해 강봉균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연구팀은 기억이 저장되고 소거되는 원리를 시냅스(신경세포 간 연결) 단위에서 규명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연구팀은 뇌에서 특정한 기억을 떠올리는 데 관여하는 '엔그램' 세포의 시냅스가 물리적으로 기억을 저장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두 개의 저에너지 광자를 동시에 사용하는 이광자 현미경과 각 시냅스를 청록색과 노란색으로 구분해 표지할 수 있는 '듀얼-이그래스프'가 활용됐다.

연구팀은 이후 이 기술을 발전시켜 공포 기억에 관여하는 신경세포와 시냅스를 구별할 수 있는 '엘씨디-이그래스프(LCD-eGRASP)'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강 교수는 "기억을 저장하는 세포에 집중하는 기존 연구에서 한 단계 나아가 아주 세밀한 영역에서 기억을 억제하는 신경세포의 역할를 확인하고 기억 조절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며 해당 기술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참고 자료>
- DOI:10.22172/cogbio.2018.30.1.001
- DOI:10.1177/070674371405900408
- DOI: 10.1097/JCP.0b013e318222f360
- DOI: 10.1126/sciadv.adj4433
- DOI: 10.1016/j.neuron.2023.10.013

[박정연 기자 hes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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