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민주주의에 더 투자해야 한다!

[최용주 (전)5.18진상규명조사위 조사1과장]

전례 없는 혁신 있어야

윤석열이 파면되었다. 이 당연한 판결을 얻어내는데 무려 110일이 걸렸다. 그 사이에 우리나라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너무나 많은 비용을 지불했고 쉽게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특히 12.3내란 사태 이후의 정치적 혼란은 한국 민주주의가 제도와 운영의 측면에서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우리가 제도적 민주화를 쟁취한 1987년 이후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름대로 지키고 공유했던 민주주의의 기본적 작동 원리에 큰 균열이 생긴 것이다. 윤석열은 이 위기의 원인 제공자가 아니라 위기의 결과 또는 그 한 단면이다. 따라서 윤석열의 퇴장으로 이 위기가 해소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례 없는 수준의 혁신적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집권 정당은 자신들의 명백한 정치적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주적 정치게임의 기본 규칙은 게임 참여자가 현재의 패배를 인정하고 미래의 승리를 준비하는 것이다.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가 지적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어떤 정당이든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과 국민의힘은 이런 규범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패배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회에서 해제를 의결하고 국민의 대다수가 불법이라고 판단한 비상계엄 조치를 정당한 통치행위라고 끝까지 항변했고, 종북좌파 척결과 어처구니 없는 부정선거를 주장했다. 사실, 이들이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진심으로 수용했는지도 의문이다.

대의민주주의 하에서 정당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미래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의 승리를 미리 알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본래적으로 주권자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에 대한 “예측불가능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권 정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미래의 승리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태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에서 잘 확인했다.

지난 3월 8일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된 윤석열 전대통령이 서울 한남동 관저 앞에 도착, 차량에서 내려 지지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집권당이 폭력적 극우세력을 비호하다니

둘째, 집권 정당은 거리의 극우파 집단에게 “정치적 공간”을 제공했고, 그들의 폭력적 행태를 공개적으로 비호했다.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은 전광훈 등이 이끄는 탄핵반대 집회에 공공연하게 참석해서 발언하고 지지를 호소했으며,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무리들을 국회로 초청해서 공개적으로 발언할 기회를 제공했다. 국민의힘은 1월 19일 서부지방법원 폭동사태를 비호하였고, 윤석열은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의 폭력성을 부추기는 여러 정치적 신호를 보냈다.

우리의 정치적 경험에서 기성 정치의 대중 동원은 권위주의 정권의 장기집권 전략과 시민사회 통제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반면,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로 이행한 이후, 비록 여러 갈등과 대립을 겪기는 했지만, 보수 정당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극우파 집단과 제휴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러한 정치적 제휴는 단순한 득표 전략에 넘어서 파시즘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보수 정당이 극우파 세력과 연대하면서 민주주의가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로 변질되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여기저기서 확인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터키의 레제프 에도르완,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정권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윤석열을 옹호하는 국민의힘도 이 대열에 합류할 개연성이 크다.

선출되지 않은 관료 권력의 횡포 '뚜렷'

셋째, 선출되지 않은 소수의 관료 권력이 헌정질서를 파괴했고, 다수의 합의에 의한 민주주의의 존립을 매우 위태롭게 했다.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와 최상목은 국회가 의결한 법률안에 대해서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권을 행사했고,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국회의장의 권고와 야당 대표의 제의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검찰을 비롯한 사법권력은 사법정의 실현과 동떨어진 정치적 결정과 법의 선택적 적용으로 법 앞에 평등이라는 헌법 정신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불법적 비상계엄의 발동을 막지 못한 국무위원들 중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자발적으로 물러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주권자의 대의기구인 국회가 3분의2 이상의 동의로 대통령 탄핵을 의결했지만, 주권자는 무려 100일 이상 8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려야 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폭정과 우중정치로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수의 의견과 임명된 엘리트 권력의 견제를 인정한다. 이게 공화정 혼합통치의 작동원리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임명된 관료 권력은 이제 견제와 균형의 수준을 넘어서서 다수인 주권자를 통제하고 지도하는 지배적 지위를 점유했음을 확인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스키 등이 지적하는 이른바 “소수의 폭정”(tyranny of the minority) 또는 “엘리트 포획”(elite capture) 하에 놓인 셈이다. 임명된 권력의 전횡을 제어할 수 있는 실효적 수단을 갖추지 못하면 대의민주주의와 시민의 참여민주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난 3월 25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왼쪽)와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국기에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의 핵심은 대의민주주의 한계를 어떻게 보완하고 소수의 권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있다.

나는 시민사회의 정치적 역량 강화가 핵심이라고 본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서 이 정도의 회복력을 유지한 배경에는 시민사회의 놀랍도록 민첩한 대응과 이타적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3일 밤 여의도로 달려온 시민들이 불법적 비상계엄의 실행을 막았고, 100일 이상 계속된 광장의 거대한 목소리가 윤석열의 탄핵을 이끌어낸 자원이었다. 이 놀라운 시민적 역량을 더 발전시켜서 훼손된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보호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로장발롱이 제시하는 “대항민주주의”(counter democracy) 개념은 적절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는 주권자가 투표 행위를 넘어서는 세 가지 감시 수단을 갖추고 실천할 수 있을 때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의 정당성이 회복된다고 지적했다. “경계”(vigilance), “규탄”(denunciation), 그리고 “평가”(evaluation)가 그것이다.

시민의 역할: 경계, 규탄, 그리고 평가

첫째, 주권자는 대의권력이 자신들을 제대로 대표하고 있는지, 임명된 권력이 주권자의 영역을 침해하고 있는지를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징후가 보일 경우 주권자는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 채널을 통해서 국가에 경고를 보내야 하며, 주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자경 수단도 강구해야 한다.

둘째, 주권자는 대의 권력과 임명된 권력에 대해서 그 권한의 축소, 회수, 폐기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주권자는 자신들이 선출한 권력을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어야 하며, 임명된 권력에 대해서는 탄핵과 교체 그리고 권한의 축소를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주권자는 국가의 통치 행위와 공공정책의 수립과 집행이 합목적적으로 수행되고 있는지 심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행위와 정책에 대해서 수정과 개선을 요구해야 하고, 해당 기구와 대리자로부터 평가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시민적 권리의 행사는 광장이 아니라 국가가 마련한 제도적 공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제도가 광장을 전부 대체하지는 않는다.) 즉, 국가는 시민사회와 정치적 협력과 긴장 관계를 동시에 유지하면서 민주주의를 심화하는 “공적 영역”을 마련해서 주권자의 참여와 감시를 장려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경계와 규탄 그리고 평가가 광장을 넘어서 제도 안으로 포용되었을 때, 우리는 불필요한 정치적 마찰을 해소하고, 시민사회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감수해야 했던 희생을 줄일 수 있다.

우리는 시민의 집합행동을 제도 안으로 흡수해서 그 역량을 정치와 공공정책에 반영하는 참된 공화정을 실천해야 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인용 선고가 내려지자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관저 인근에서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12.3내란 조사위원회를 만들자

나는 그 첫 걸음으로 12.3내란에서 탄핵 선고에 이르는 전 과정을 평가하는 조사위원회와 숙의기구 설치를 제안한다. 정치학자, 사회학자, 법학자, 공공정책 전문가, 군사전문가 등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조사위원회가 12.3내란 사태의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대통령 탄핵 과정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이 일련의 사건이 주는 교훈, 재발방지 방안, 법적, 제도적 개선안을 담은 보고서를 발간하고, 무작위로 선발된 시민들로 구성된 공론장에서 숙의 과정을 거쳐서 이 보고서를 국가의 공식견해로 채택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시민사회와 대의권력 그리고 임명된 권력을 포함한 국가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제휴해서 여전히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위기에 처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가치 있는 정치적 혁신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난 40년 동안 단 한번도 이런 소중한 정치적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다. 혁신은 전인미답의 길을 가는 것이다. 정치적 혁신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국가는 성공 여부와 관계 없이 그 비용을 기꺼이 치를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민주주의에 더 투자해야 한다.


※ 최용주 (전)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1과 과장은 전남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터키 대학에서 사회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공직을 은퇴한 후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을 지냈으며, (전)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1과 과장을 맡았다. 지금은 독립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 <책장 덮기: 역사적 관점에서 본 이행기 정의>(진인진 2022), <5.18 푸른눈의 증인>(한림출판사 2020), <나의 이름은 임대운>(객, 2022) 등이 있다. 1958년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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