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 SURVIVOR, GMC 시에라

좁고 복잡한 빌딩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단순히 편안하게 멀리 가는 게 목적이 아니다. 얼마나 진땀을 덜 빼느냐가 핵심이다…

“저렇게 큰 차를 어떻게 몰고 다녀? 한적한 시골에서나 타야지….”

남다른 덩치를 자랑하는 자동차를 소유한 이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차 걱정, 좁은 길 걱정, 연비 걱정…. 거대한 차는 한적한 도로에나 어울리지 않나 생각했다. 하지만 편한 길만 달리는 건 <탑기어> 스타일이 아니다. 오늘의 도전 과제는 시에라와 함께 서울 시내 정복이다.

브랜드가 낯선 이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GMC는 우리에게 친근한 제너럴 모터스(GM)가 소유한 상용차 전문 브랜드다. 여기서 잠깐, ‘GMC’는 제너럴 모터스 컴퍼니(General Motors Company)의 약칭으로 보이는데, 왜 산하 브랜드가 쓰고 있을까? 공식적인 답변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GMC가 GM보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때는 바야흐로 1900년, 미국 디트로이트주 출신 맥스와 모리스 그라보우스키 형제는 1t 트럭 전문 제조사를 설립하고, 자신들의 성을 따 ‘그라보우스키 모터 컴퍼니(Grabowsky Motor Company, GMC의 첫 등장)’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간이 흘러 1908년 등장한 GM은 상용차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라보우스키 형제의 회사를 인수하고, 1912년 상용차 전문 브랜드 ‘GMC(General Motors Truck Company)’를 출범한다.

비록 ‘GMC’가 의미하는 바는 달라졌지만, 124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명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제무시’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1941년 GMC가 만든 미군 군용트럭 CCKW(대한민국 국군이 사용하는 ‘두돈반’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1940~1950년대 우리나라에 널리 쓰였고, 일제 잔재가 남아있던 당시 ‘지엠씨’의 일본어 발음인 ‘제무시’로 널리 알려졌다. 역사 이야기는 이쯤하고 본격적으로 달려볼 시간이다.

지하주차장 한편, 저 멀리 시커먼 덩치가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커도 되나?’ 시에라를 마주한 첫인상이다. 옆에 선 중형 SUV는 마치 경차처럼 왜소해 보인다. 웅장한 그릴과 껑충한 키가 블랙홀처럼 주변 모든 사물을 왜곡하는 탓이다. 시승차 색상이 검은색이라 그런지 더욱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간 KGM 렉스턴 스포츠 칸이나 쉐보레 콜로라도, 지프 글래디에이터와 같은 픽업트럭을 숱하게 마주했다. 하나같이 한 덩치 하는 모델이지만 이들에게 위압감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초대형 픽업트럭이 풍기는 포스는 남달랐다. 시에라는 포드 익스플로러쯤은 중형 SUV로 분류하는 미국에서도 ‘풀사이즈’에 해당하는 크기다. 길이와 너비, 높이는 각각 5890×2065×1950mm로 평소 자동차 제원표에서 보기 힘든 숫자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6m에 가까운 차체 길이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판매 중인 승용차 중 가장 크다는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ESV(5765mm)보다도 길다. 휠베이스는 무려 3745mm인데, 우리나라 경차 규격이 길이 3600mm 니까…. 앞뒤 차축 사이에 경차 한 대가 쏙 들어간다.

시에라는 나보다 키가 한참 크다... 쳇

서울 용산구 한 아파트 단지를 출발해 대형 쇼핑몰과 시내 등지를 누빌 계획이다. 정신줄을 단단히 붙들어 매고 운전석에 올랐다. 시트가 높이 자리 잡았지만, 커다란 전동식 발판 덕분에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다. 부우웅~ 시에라가 하품하듯 깨어낸다. 고배기량 8기통 엔진인데도 배기음이 그다지 자극적이진 않다. 2024년형부터는 가변 배기 시스템을 얹어 더욱 스포티한 배기음을 들려준다는데, 아쉽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승차는 2023년형이다. 시트를 조절하고 호기롭게 출발! …했지만 아파트 단지를 나오는 일부터 쉽지 않다. 지하주차장치고는 꽤 넓은 곳인데, 시에라 운전석에서 보니 한없이 좁게 느껴진다. 주차장 차단봉을 지날 땐 온 신경을 집중해 간신히 빠져나온다.

이어진 곳은 평범한 서울 시내 일반도로, 부드러운 승차감에 긴장이 한결 누그러진다. 드넓은 실내와 기다란 휠베이스, 두터운 타이어 (브리지스톤 프리미엄 SUV 타이어 알렌자를 신었다)가 안락한 승차감을 연출한다. 눈을 가리고 타면 이 차가 화물차라고 믿을 사람은 많지 않을 터다. 화물을 전혀 싣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부드럽다면, 적당한 화물 무게를 더했을 때 승차감은 더욱 좋아지리라. 시에라의 마법은 운전석에서도 이어지는데, 주변의 모든 자동차들이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세상의 왕이 된 기분이다. 첫 번째 목적지는 한 대형 쇼핑몰. 평소 자주 방문하던 곳인데, 시에라를 타고 보니 주차장 입구부터 분위기가 다르다. 평소엔 있는지도 몰랐던 ‘높이 제한 차단막 2.1m’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운전석이 워낙 높아 차단막이 머리 위를 스칠 것만 같다. 불안한 마음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려 직접 두 눈으로 여유 공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손바닥 한 뼘 정도 여유가 있다. 키 1950mm 시에라는 고작 15cm를 남기고 통과했다.

주차장 차단기를 지나면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폭이 좁은 회전 오르막 구간이다. 평범한 승용차라면 여유로운 속도로 지나가기 충분한 공간이지만, 초대형 픽업트럭에겐 너무도 가혹했다. 행여 범퍼나 바퀴가 긁힐까 노심초사하며 느릿느릿 나아갔다. 운전자의 감으론 한계가 있어 결국 고개를 내밀고 다시 한번 눈으로 간격을 재 봤다. 다른 운전자들이 이 상황을 본다면 왕초보 운전자가 허둥대고 있다고 생각할 테지…. 고맙게도 뒤쪽에 줄지어 선 차들은 경적 한번 울리지 않고 나를 기다려줬다. 휴~ 이번에도 별 탈 없이 무사히 지났다. 다음은 주차할 시간. 곳곳에 빈자리가 있지만 차를 넣기가 망설여진다. 차폭이 넓어 옆 차와 간격이 넉넉하지 않으면 접근하기도 어렵다. 설령 주차에 성공해도 사람이 내릴 수가 없다(주차를 마친 후 그대로 나온 적도 꽤 있다). 주차 과정이 정말 험난하다. 차가 너무 길어 꽁무니를 집어넣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문득 픽업트럭에도 뒷바퀴조향 장치가 있으면 대박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조사들이 만들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려나?

비매너 주차 아닙니

간신히 주차를 마치고 차 상태를 확인했다. 엥? 툭 튀어나온 전면부가 여간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다. 마치 주차를 덜 끝낸 것처럼…. 뒤쪽을 확인한다. 뒷바퀴는 분명 스토퍼에 닿았다. 그렇다. 차가 너무 길어 차 앞부분이 툭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누가 주차를 이 따위로 해놨어!’라고 짜증 내도 별수없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고작 주차장에 들어와서 주차만 했을 뿐인데 진이 빠진다. 음, 서울 시내에서 이곳보다 쾌적한 주차장은 드물다. 대형 쇼핑몰이 사실상 시에라가 들어갈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고 봐야겠다. 이보다 좁은 곳을 들어간다면 대참사가 기다릴 터다. 무리해서 진입하다간 자칫 소중한 차체가 손상될 수도 있고, 심할 경우 완전히 갇히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물리적 한계는 극복하기 어려우니까.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시에라가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답답했던 서울 시내를 벗어나 근교로 향하는 길, 다시 한번 여유가 느껴진다. 고요한 실내 분위기가 고급스러운 승차감과 조화롭다. 정숙성은 수준급인데, 특히 엔진음과 노면 소음을 상당히 잘 억제했다. 덩치를 생각해 엄청난 풍절음을 예상했지만, 고속 주행에도 특별히 거슬리는 소음은 없다. 보스 오디오는 음질도 출력도 만족스럽다. 나만의 작은 콘서트장을 만들기 충분하다. 수납공간 역시 광활하다. 콘솔박스는 축구공이 들어갈 만큼 커다랗고, 대시보드엔 상하단 2개의 글러브박스를 마련했다.

뒷좌석 공간은 중형 SUV 이상 크기다. 굳이 화물칸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2열 시트를 접어 추가 화물칸으로 쓰기 좋다. 막히는 시내에서 연비는 1L에 4~6km를 오간다. 426마력을 내는 V8 6.2L 엔진과 2.6t에 이르는 무게만 보더라도 좋은 연료 효율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나마 고속도로 연비는 낫다. 2시간 동안 정속 주행한 결과, 1L에 12km까지 치솟았다. 부하가 적을 때 실린더 8개 중 4개를 끄는 다이내믹 퓨얼 매니지먼트 기능 덕분이다.

거대한 덩치 탓에, 시내를 벗어날 일이 드문 이들에겐 추천하기 어렵다. 하지만 시에라만큼 목적이 뚜렷한 자동차가 있을까? 자유로운 적재가 가능한 화물차면서 프리미엄 SUV 부럽지 않은 고급스러운 실내를 갖췄다. 시에라 단 한 대만 운용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한다. 편하게 타는 승용차가 한 대 있다면, 시에라는 호화로운 주말 레저 활동을 위해 듬직한 발이 되어줄 동반자다.

권지용 사진 이영석, 한종협, SUGAR P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