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포틀랜드의 맛
A Taste of Portland
힙스터의 도시 포틀랜드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도전적인 미식의 실험대로 유효하다. 일과 여행의 경계에서 20년 넘게 포틀랜드를 오간 라이프스타일 큐레이터 강미가 포틀랜드 미식과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킨포크와 홀푸드, 동물복지와 팜 투 테이블, 그래피티와 타투, 자전거와 캠핑, 그리고 동성애와 마리화나. 포틀랜드를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것들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다양성’이 아닐까. 우리에게 익숙한, 그래서 흔히 ‘정상적’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반기를 드는 힙스터적 사고방식. 포틀랜드는 이런 것들에 유연한,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 중 하나다. 포틀랜드를 기이한 채로 내버려두라는 ‘Keep PortlanWeird’가 포틀랜드 로컬 비즈니 스 운동의 슬로건이 될 정도로. 미국 북서부 오리건주의 주도, 기이할 만큼 ‘my own way’를 외치는 포틀랜드적 무드를 한국에서도 느낄 수 있을까? 서울 옥수동, ‘against borders center’(이하 abc)와 ‘portland on table project’(이하 pot)에 가면 포틀랜드적 감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abc는 내추럴 와인 페어링 바, pot는 포틀랜드 내추럴 와인을 수입하고 디제잉 파티나 마켓 등을 여는 프로젝트 베이스의 브랜드다. 그리고 이 두 곳의 꼭짓점에 강미가 설립한 라이프스타일 큐레이션 플랫폼, ‘어게인스트 보더스(against borders)’가 있다. abc와 pot 는 자유롭고 편견 없는 포틀랜드적 문화 위에 음식과 와인, 그리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결합한 일종의 실험대다. 강미는 이 두 곳에서 직접 개발한 메 뉴를 선보이고, 그에 맞는 포틀랜드 내추럴 와인을 페어링한다. 과거 유명 패션 브랜드와 와인을 포함한 F&B 컴퍼니에서 브랜드 마케터로 활동한 강미. 4년 전 어게인스트 보더스를 론칭하며 라이프스타일 큐레이터로 변신한 그가 포틀랜드의 맛을 펼쳐 보이는 곳은 abc다. 그런데 이 름부터 범상치 않은 이 느낌은? 경계를 뛰어넘는 곳이란 뜻인가? “against는 negative와 같은 의미가 있어서 보통 빨간색으로 글씨 쓰기를 꺼려 하듯 잘 쓰지 않는 단어예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나 콘텐츠를 경계 없이 실험하고 싶어서 이 단어를 썼어요. abc에 따로 주방 섹션을 두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고요.” 그러고 보니 abc는 홀과 주방이 나란히 마주해 테이블에서 요리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디제잉 부스를 연상케 하는 입구 인테리어와 하나하나 출처를 묻고 싶은 빈티지 가구, 아티스트의 작품 같은 와인 레이블까지, 눈길 닿는 모든 곳에서 그의 취향이 느껴진다. 음식도 마찬가지. 강미는 abc에서 선보이는 모든 메뉴를 그가 좋아하는 ‘심플하고 직관적이며 맛있는’ 음식들로 채웠다. 튀긴 꽈리고추, 구운 콜리 플라워, 스피니치딥과 사워도, 바질 오일을 올린 그린 홍합 등 이름만 들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구체적이고 선명한 것들이다.
영감을 주는 포틀랜드의 맛
단순하지만 가볍지 않은 맛, 일체의 장식을 배제한 플레이팅. 재료에 대한 이해와 레시피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실질적 경험 이 없다면 불가능한 단호함이다. 강미는 과연 포틀랜드의 어디에서 이런 맛을 경험했을까? “제일 좋아하는 레스토랑은 ACE 호텔 1층에 있던 ‘클라이드 커먼’이었어요. 그곳의 대표 메뉴가 꽈리고추 튀김과 팝콘, 무절임 같은 건데, abc와 pot 메뉴에도 적용했죠. 오늘 선보인 아메리칸 시저샐러드도 LA에서 맛봤던 건데 그곳에서 다시 만났어요. LA에선 잎도 따지 않은 로메인을 통째로 접시에 담아 소스를 끼얹어 줬는데 투박한 모양과 달리 너무 맛있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거든요.” 하지만 아쉽게도 코로나19로 클라이드 커먼은 문을 닫았고, 그곳 셰프가 ‘퍼시픽 스탠다드’로 옮겨 아메리칸 시저샐러드를 선보인단다. 강미가 포틀랜드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달려가는 맛의 충전소가 클라이드 커먼에서 퍼시픽 스탠다드로 바뀐 것이다. “아메리칸 시저 샐러드와 스트릿 쉬림프 타코에는 경쾌하고 크리스피한 ‘Fais do do’를 페어링하면 좋아요. 재료의 맛을 더 잘 느끼면서 기분 좋은 상쾌함이 입안을 가득 채울 거예요.” 뉴올리언스 출신 드러머가 만든 ‘Fais do do’는 강미가 수입하는 포틀랜드 내추럴 와인. ‘두두’는 춤을 출 때 발끝 을 톡톡 치는 소리라니, 들을수록 그 맛의 뉘앙스가 더욱 궁금해진다.
자유로운 상상과 도전이 가능한
내추럴 와인
강미가 포틀랜드 내추럴 와인을 수입하게 된 건 포틀랜드 여행을 하면서 떠올린 하나의 의문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컨벤셔널 와인과 달리 내추럴 와인은 양조에 관한 원칙이 엄격한 편. 손으로 수확한 유기농 포도와 자연 효모 사용, 산화를 막는 이산화황(SO2)의 허용 기준은 30m/L 이하 등 까다로운 규정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국제 기준이 없고 정부나 민간기구의 공인인증에 얽매이지 않아 와인 메이커의 자유로운 도전이 가능하다. 동네마다 마이크로 브루어리가 넘쳐나고 어반 와이너리도 수두룩한 포틀랜드라면 와인 메이커의 취향과 개성이 존중되는 내추럴 와인이 반드시 있을 것이고, 근사한 와인 메이커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부르고뉴와 위도가 같고 물과 공기가 맑은 오리건주는 포도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어요. 이런 훌륭한 자연환경에 포틀랜드적 다양성이 더해진다면 얼마나 근사한 내추럴 와인이 만들어질까, 상상만으로 도 즐거웠죠. 그런 마음으로 2020년 4월부터 오리건주의 내추럴 와인 메이커들에게 러브콜을 보냈어요. abc 베스트셀러인 타임머신 블랑(Time MachineBlanc)은 그때 디깅했던 곳이에요.” 네고시앙(중간 도매인) 없이 와인 메이커와 직거래를 하는 것이 강미의 와인 수입 방식.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원칙 덕분에 그는 포틀랜드의 젊은 와인 메이커들과 친구가 됐다.
“포틀랜드 로컬 와인 중에 내추럴 와인이 정말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예상대로 30~40대의 젊은 와인 메이커가 대부분이었고요. 그중엔 뉴욕에서 잘나가는 화이트칼라 직군에 있다 와인 메이커가 된 친구도 있어요. 지금은 디제잉도 하면서 매일 새로운 내추럴 와인을 실험하고 있죠. 또 다른 친구는 본래 아티스트였다 와인 메이커가 됐는데, 주특기를 살려 와인 레이블에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어 넣기도 해요.” 그렇게 알게 된 내추럴 와인 메이커들은 강미에게 와인은 물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었고, 어게인스트 보더스를 견인하는 든든한 비즈니스 파트너도 되었다. 내추럴 와인 수입을 결심하고 포틀랜드를 오가며 강미가 결심한 또 하나의 원칙은 한국에 도착한 내추럴 와인이 본래의 상태로 돌아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다.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고 끝없이 발효가 일어 나는 내추럴 와인의 특성상 안정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 포틀랜드에서 테이스팅한 맛과 향이 날 때까지 수시로 테이스팅을 한 후 스스로 합격점을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abc와 pot의 테이블에 올린다.
어반 라이프를 사랑하는 백패킹 러버
포틀랜드 여행을 통해 심플한 음식에 빠지고 내추럴 와인도 만나게 된 강미. 그가 포틀랜드를 여행하는 방법은 한 곳을 집요하게 디깅하는 것이다. “포틀랜드에 가면 일주일 이상 머물면서 같은 곳을 여러 번 가요. 와인 바나 레스토랑은 물론, 클럽이나 빈티지 숍도 같은 곳을 두 번 세 번 가서 깊게 디깅하는 걸 좋아해요. 그러다 보면 처음엔 못 봤던 것들이 보이고 점점 더 섬세하게 느껴져요.” 백패킹 러버이기도 한 강미가 포틀랜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대자연의 광활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후드산(Mt. Hood)과 로스트 레이크(LostLake)다. “포틀랜드 올드타운에서 자동차로 2시간만 가면 아름다운 강과 계곡, 산과 호수가 펼쳐져요. 특히 만년설이 쌓인 후드산과 로스트 레이크는 꼭 가 봐야 하는 곳이에요. 후드산 깊숙한 곳에 있어 휴대폰도 터지지 않고 삼나무가 빼곡히 둘러싼 로스트 레이크는 캠핑 러버로서 정말 사랑하는 곳이고요. 여름엔 호수에서 보트나 카약을 타기도 해요. 후드산에서 동쪽으로 1시간 정도 더 가면 갑자기 사막 같은 밸리가 나오는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황량한 곳에서 낮부터 테크노 파티를 해요. 처음엔 낯설었지만 어울리다 보니 묘한 해방감이랄까, 마음이 시원해지는 자유로움이 느껴져요.” 뉴욕의 브루클린을 닮은 올드타운이 있는가 하면 대자연의 광활함도 느낄 수 있는 곳. 누구보다 어반 라이프를 좋아하지만 마음 내킬 땐 언제든 숲으로 달려가는 강미에게 포틀랜드만큼 사랑스러운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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