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오름은 고요히 솟아 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 곡선은 부드럽고 다정하게 나를 감싸 안는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사각사각 발에 채는 길섶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 오름에 오르는 길은 길지 않지만, 자연과 함께 호흡했던 시간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다다르게 되고, 탁 트인 풍경보다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제주의 바람이었다. 바다의 숨결을 담은 바람이 땅의 기운과 만나 나에게 고요히 와 닿는다.
바다를 넘고, 논밭과 마을을 지나, 오름 위까지 올라온 바람은, 나무숲을 스쳐 길섶 위에 앉았다가 나를 흔든다. 그 움직임은 조용하지만 깊고 큰 침묵으로 남는다. 바람이 머물렀던 자리에는 풀들이 숨을 고르며 길을 틔운다.
나는 그 길에 멈춰 서서 바람이 남기고 간 흔적을 더듬어 본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기운에 잠시 몸을 맡기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순간을 만끽한다. 풀이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온전히 품어내듯, 자연은 그렇게 ‘스스로 그러한’ 존재로 완성된다.
바람에 누웠던 풀잎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조금 전과 다른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 변화는 너무 미세하여 눈에 띄지 않을 정도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하고 있는 자연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다.
3월의 제주는 짙은 초록의 싱그러움보다는, 은은한 황토빛의 따스한 반짝임이다. 겨우내 제주의 바람을 강인하게 견뎌낸 억새 줄기와 잡초들이 옅은 색감으로 파도처럼 일렁인다.
그것은 질서 없이 무심하게 자리를 잡은 듯하지만, 어느 하나 허투루 쓰이는 것 없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한 붓 한 붓 집중하여 풀잎 하나하나에 깃든 바람을 그려낸다. 바람이 풀을 스치듯 붓이 종이를 스쳐 그 흔적을 드러낸다. 연한 먹점이 차곡차곡 쌓아 올려질 때마다 바람의 거대한 움직임을 기억한다.
풀잎의 고요한 떨림을 기억한다. 나는 자연과 이어지는 존재라는 것을 먹과 종이와 붓의 힘으로 한 점 한 점 고요히 되새겨본다.
숲, 오름

숲길

오름

오름

오름

오름

오름

오름

오름

오름

이한정 작가

2009년 중국 중앙미술학원 대학원 산수화과 졸업
2005년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한국화과 졸업
△개인전
2025년 바람의 자리, A Bunker, 서울
2023년 Rock, 히든엠갤러리, 서울
2022년 Beyond the scenery, 갤러리두, 서울
2021년 호흡의 시간, 문화공간Kki, 고양
2020년 고요, 도로시살롱, 서울
2017년 풍경의 표정, 이랜드스페이스, 서울 외 다수
△수상
2018년 LA한국문화원 제24회 Annual Juried Art Exhibition 선정작가상
2016년 제8회 후소회 청년작가상
2015년 제13회 겸재진경미술대전
2014년 제16회 단원미술제
△작품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정부미술은행, 경기도미술관, 오산시립미술관, 이랜드문화재단, 서울동부지방법원, 의정부지방법원, 서울시청, 인천미술은행, SKMS연구소, 박영장학문화재단, 상명초등학교 외 개인소장
청년타임스 정수연 디렉터